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8eba3ebbc6b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다 읽었다. 에세이는 몇 편 읽어 봤지만 장편 소설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말고는 처음이다. 그리고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관계의 단절과 풍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겨우 두 작품밖에 읽지 않고서 이런 분석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하루키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항상 ‘보여져서 이해할 수 있는 일부’와 ‘보여주지 않는 대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러한 구성과 묘사에서 나는 각각의 인물에 대한 묵직한 현실감을 느끼곤 한다. 어색하고 멀었던 사람이 처음에는 겨우 몇 번의 대화로 성큼 가깝게 느껴졌다가, 이윽고 거듭하여 이야기를 쌓아나갈수록 타인에게 내가 모르는(어쩌면 본인조차 모르고 있는) 삶과 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더욱이 나는 그 사람에게 그 모든 순간들을 나에게 밝혀달라고 말할 의무나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에 내 속에 놓이는 그 휑덩그레함까지도, 하루키는 담담하고 능숙하게 그려내는 듯 하다.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러한 결여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고, 때문에 모두 깊이가 있지만 어딘가가 텅 비어있는(어쩌면 비어있기에 깊이가 생기는 걸지도 모른다) 인물들이며, 서로의 빈 곳을 맞물려 채우기 위하여 부단하고도 처량히 서로를 얽어매려 한다. 배격에 상처입은 마음 속 응어리를 풀기 위해 수십년 전의 친구를 찾아다니며 《색채가 …》에서의 다자키 쓰구루처럼, 또 영혼의 연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나오코를 가지지 못해 방황하는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처럼.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하나로 결합되고자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영혼의 상처에 허덕이고 있기에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열리지도 않고 젖어들지도 않는다. 그러니까─섹스를 못 한다.


그 놈의 섹스. 《노르웨이의 숲》에서 섹스는 마치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의 정점에서 응당 치뤄야 하는 의식처럼 다뤄지며 십수 회를 거듭해 가며 지겨울 정도로 묘사된다. 처음 한 두 번 쯤은 ‘에로티시즘인가’하고 넘겼지만 온갖 조연들과의 정사 씬을 넘어 등장인물을 소개하기 위한 과거 회상에서조차 섹스 장면이 튀어나올 때에는 되려 감탄이 나왔다. 무슨 섹스를 이렇게 집요하게 집어넣었나 싶어서. 소설 내내 어떤 등장인물과 주인공이 둘만 남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섹스를 하는지라, 중후반부에 와타나베가 미도리의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 와타나베라는 미친 인간 인큐버스가 기어코 60대 남성 뇌종양 환자와 섹스를 해버리는 걸까 싶어 자못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노르웨이의 숲》그 수많은 섹스 장면 중 단 하나도 생명으로 이어지는 결과, 즉 질내사정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작중에서 비중있게 그려지는 정사들은 거진 유사 성행위에 그칠 뿐이다. 서로의 이해와 사랑이 최고로 고조되었을 때에 마치 문장의 마침표처럼 빼놓지 않고 섹스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와 주요 등장인물들의 성행위는 본래의 목적—하나가 되어 뒤섞인다는, 그래서 새로운 무언가를 잉태한다는 본질적 목적이 처음부터 배제된 상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의 섹스는 소통의 도착지점이나 마일스톤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의 담벽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난다. 마치 네 육체와 정신을 모두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교감조차 겨우 이 정도가 끝이라고 말하듯 참담한 한계로써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작품 내내 유예되던 질내사정은 마지막에 가서야 사랑하던 이의 겉 껍데기—그러니까, 나오코의 옷—을 지닌 존재인 레이코와 겨우 이뤄지나 그렇게 이루어진 소통도 이전과 똑같이 이별이라는 결말을 맞는다. 와타나베가 할 수 있는 지고의 소통은 고작 이런 것이다.


소통하고 싶고, 뒤섞이고 싶고, 결합되고 싶었던 와타나베는 그 모든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는 와타나베인 채로 남는다. 그는 소설 막바지에 나오는 스스로의 말처럼,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 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뿐이다. 수많은 지인의 죽음들을 딛고 도달한 곳은 여전히 혼돈 속이고(때문에 도달했다고 말할수조차 없다) 와타나베는 그 혼돈 속에서 미도리의 말을 빌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물론, 대답하지 못한다. 그저 멍청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태울 수 있을 뿐이다. 고작해야 막다른 골목길로 이어질 섹스 정도나 꿈꾸면서.


누군가에는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할만한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우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은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상실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 문학사상사 역본(《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번안된)으로 읽었는데 나오코와 미도리의 말투가 존댓말로 번역되어 있었다. 원작에서는 두 명 다 반말을 쓴다고 한다.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받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