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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죽음이 다가오는 형태는 각각 다르나, 그 결말은 늘 같다. 어떤 인생을 살았건, 어떤 인물이었던 간에 결국은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우습고 슬픈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일이든, 타인의 일이든, 그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나 삶, 혹은 불멸하는 것에. 예로 키릴로프의 사상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 관해 어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겠다. 이에 관한 내 의견—속된 말로 개똥철학—에 그 누구도 관심이 없을뿐더러, 이 글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에서 논하려는 것은 비철학적이며, 작품에 대한 하나의 감상일 뿐이다. 그러니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주길 바란다. 서문이 너무 길었다. 이제 본문으로 가자.





죽음의 우스운 아이러니에 대하여


"장송의 프리렌"은 엘프 마법사 프리렌의 이야기다. 작중 엘프는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존재로, 죽음에서 가장 동떨어진 종족이다. 그러나 그런 존재에게 죽음은 자신의 또다른 면을 보인다. 죽음은 자기 자신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이상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죽음을 봐야만 한다. 또한 죽음은 주변인들을 남겨지게 하여, 죽지 않음에도 다가온다. 그 우스운 아이러니가 죽음 속에 있다.





삶과 죽음의 우로보로스


프리렌은 작중에서 죽음을 3번 겪는다. 스승 플람메의 죽음, 용사 힘멜의 죽음, 성직자 하이터의 죽음. 그들은 프리렌을 남기고 떠나나, 동시에 남기고 간 것도 있다. 스승 플람메는 프리렌에게 마법과 그녀의 존재를, 힘멜은 사랑을, 하이터는 제자 페른을 남긴다. 스승이 그녀를 살리고 마법을 가르쳤기에 힘멜 일행을 만났고, 힘멜의 사랑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인지했고, 하이터가 페른을 맡겼기에 비로소 인간을 깨달았다. 이것들이 지금의 프리렌을 있게 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노력하며 삶을 창조하려 한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죽음을 슬퍼하며

사람은 두 번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꿈도, 사랑도, 시절도 되찾을 수 없다. 아무리 갈망하여도 우리는 현재에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를 추억이라 부른다. 우리는 과거에 작별을 고하고 살아야만 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 시절을 위해서도. 이는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장송의 프리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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