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는 일리아스 제1권, 37-53 언저리의 번역 비교입니다. 근래에 헌책방에서 일리아스의 오래된 번역을 주워오기도 했고, 박문재 선생님 번역도 나온 김에 지난번에 썼던 번역비교글을 업데이트하여 써보고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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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판 세계문학전집 : 김병익 1987
"은빛 찬란한 명궁(名弓)인 아폴로 신이여,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 크리세 시를 감싸주시고 성스런 킬라와 테네도스까지도 지배하시는 그대 스민테우스(아폴로의 별명) 신이여, 내가 일찌기 그대를 위해 지은 사당이 마음에 들었다면, 또한 내가 일찌기 그대에게 제물로 바친 황소와 염소다리가 살찐 고기였다면, 지금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 부디 그대의 화살로 그리이스군에게 내 눈물의 값을 치르게 하여 주소서."
노인이 이렇게 하소연하며 기도하자 태양신 아폴로는 올림푸스 산꼭대기에서 그 소리를 듣고 매우 분노하여 어깨에 활과 화살통을 메고 내려왔다. 노여움에 찬 아폴로 신이 움직이는 대로 화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느새 내려온 그의 나타남은 어느새 어두워지는 밤의 나타남과 같았다. 그리이스군의 선단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화살 하나를 날리자 그 은궁(銀弓)의 소리는 무시무시할 만큼 크게 울렸다. 그 무서운 화살이 처음에는 노새와 군견(軍犬)들의 몸뚱이를 뚫었고 다음에는 병사들을 노렸다. 마침내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타올랐다.
아폴로 신의 화살은 아흐레 동안 쉬지 않고 온 그리이스군 위로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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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 천병희 2015 (2판)
"크뤼세와 신성한 킬라를 지켜주시고 테네도스를 강력히 다스리시는 은궁(銀弓)의 신이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오, 스민테우스여! 내 일찍이 그대를 위하여 마음에 드는 신전을 지어드렸거나 황소와 염소의 기름진 넓적다리뼈들을 태워올린 적이 있다면 내 소원을 이루어주시어, 그대의 화살로 다나오스 백성들이 내 눈물값을 치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자 포이보스 아폴론이 노인의 기도를 듣고 마음속으로 노하여 활과 양쪽에 뚜껑이 닫힌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올림포스의 꼭대기에서 달려 내려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성난 어깨 위에서는 화살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가 다가가는 모습은 마치 밤이 다가오는 것과도 같았다. 그가 함선들에서 떨어져 앉아 화살을 날려보내자 그의 은궁에서 무시무시한 소음이 일었다. 처음에 그는 노새들과 날랜 개들을 공격했고, 다음에는 대놓고 사람들을 향해 날카로운 화살을 쏘아댔다. 그리하여 시신들을 태우는 수많은 장작더미가 쉼 없이 타올랐다.
아흐레 동안 진중에 신의 화살들이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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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넷 : 이준석 2023
“제 말씀 들어주소서, 은궁(銀弓)의 임이시여! 크뤼세와, 지극히 신성한 킬라를 두루 살펴 다니시고, 테네도스를 힘써 다스리는 임이시여, 스민테우스여! 예전에 제가 그 우아한 신전 위로 지붕을 덮어드렸거나, 황소며 염소의 살진 사태를 태워 바친 적 있었다면, 저를 위해 부디 이 소원 하나 들어주소서, 다나오스인들이 임의 화살들로 제 눈물의 대가를 치르게 하소서!”
그가 이렇게 말하며 기도하자, 포이보스 아폴론은 이를 듣더니 심장이 노여움에 휩싸여 양 끝에 덮개 달린 화살집과 화살들을 두 어깨에 둘러메고 올림포스의 산머리에서 내려왔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노기 서린 두 어깨에서는 화살들이 귀청을 찢는 비명을 내질렀으니, 그는 마치 밤과 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배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그들에게 화살을 날리자은으로 만든 활에서는 살벌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먼저는 노새들과 재빠른 개들을 덮친 다음, 사람들을 겨누어 날카로운 화살을 쏘아 맞히니 화장터는 매일같이 시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타오르고, 신의 화살은 아흐레 동안 온 진영을 누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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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지성 : 박문재 2025
“기도를 들어주소서. 크리세와 신성한 킬라를 지켜주시고 테네도스를 힘 있게 다스리시는 은빛 활을 지닌 분이자 재앙을 부리는 이시여. 제가 신전을 지어 당신을 기쁘게 한 일과 황소와 염소의 기름진 넓적다리뼈를 태워 번제 드린 일을 생각하신다면, 소원을 이루어주소서. 당신의 화살로 다나오스인이 제 눈물의 대가를 치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자 이를 들은 포이보스 아폴론은 마음에 노기를 품고 활과 위아래로 밀폐된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올림포스산 정상에서 걸어 내려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성난 어깨 위에서는 화살들이 비명을 질러댔고, 그는 마치 밤처럼 어둡게 다가왔다. 그가 함선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화살 하나를 날려 보내자 은으로 만든 활에서는 날카롭고 섬뜩한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노새들과 날쌘 사냥개들을 공격했지만, 이내 사람들을 향해 날카로운 화살을 쏘아대니 시신들을 태우는 불길이 곳곳에서 계속 타올랐다. 아흐레 동안 신의 화살들이 진영을 휩쓸었고, 열흘째가 되자 아킬레우스는 사람들을 회의장으로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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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출판사 김병익 선생님의 번역은 영역본(Iliad, translated by Andrew Lang, W. Leaf, and E. Myers, Random House, 1950)을 1987년에 한국어로 중역한 것입니다. 이 영역본은 꽤 오래전에 초판(Iliad of Homer done into English Prose, translated bt Andrew Lang, W. Leaf and E. Myers, Macmillan and Co., 1883)이 처음 나왔고, 김병익 선생님이 쓰신 판본 이전에 몇 번의 개정을 거친 바 있습니다. 1873년에 발간된 비판편집본(Homeri Ilias, edited by La Roche, Teubner, 1873)에 기반을 두고 있고, 번역 자체는 운문 형태가 아닌, 산문으로 번역되어 있어 아쉽지만 상당히 좋은 번역이에요.
번역 비교를 위해 참고자료 조사를 하며 한 번 살펴봤는데, 일리아스의 맛깔난 번역으로 정평난 포프(Alexander Pope, 1909)의 번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글맛이 꽤나 괜찮더군요. 최근 몇년동안 읽어본 영역본으로는 라티모어(Lattimore, 1951), 피츠제럴드(Fitzgerald, 1974), 하몬드(Hammond, 1987), 페이글스(Fagles, 1990)가 있는데, Andrew Lang의 번역이 상당히 마음에 드네요. 새로운 발견이었어요. 산문 번역의 장점은 읽기 쉽다는 것이지요.
*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은 1982년에 처음으로 국내에 희랍 고전의 원전 번역을 해내셨다는 의의를 갖는데, 이 번역본은 지난 세기에 학계 표준으로 사용되던 그리스어 원전 비판편집본(Homeri Opera, edited by D. Monro and T. Allen, Oxford University Press, 1920)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천병희 선생님의 역본은 82년 이후로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2015년 번역본이 가장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숲에서 나온 번역의 제1판과 제2판의 경우 번역의 말맛이 약간 다르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는데, 저는 2판이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준석 선생님 번역은 학계 가장 최근 비판편집본(Homeri Ilias, edited by M. L. West, De Gruyter, 1998-2000)을 사용한 것인데, 이번 세기의 학계 표준이라 할 수 있는 비판편집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준석 선생님의 번역은, 가장 정확한 번역어를 사용하여 호메로스 원어의 맛을 가장 날것으로 느낄 수 있는 점에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요?” 같은 기존의 번역에 비교하여 “당신 이빨 울타리를 튀어나온 그 말은 무엇이요?”라는 이준석 선생님의 원문에 가장 가까운 직역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 박문재 선생님의 번역은 천병희 선생님과 같은 비판편집본 (Monro&Allen)을 사용했습니다. West의 비판편집본을 저본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굳이 먼로/앨런을 고르신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14권 언저리에서 위에 언급한 직역투의 문장이, 그리고 텍스트에 충실한 번역이 박문재 선생님의 역본에서도 발견됨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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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선생님의 번역과 이준석 선생님의 번역을 비교하려던 중, 다른 독붕이 선생님의 도움으로 총 네 역자분들(김병익, 천병희, 이준석, 박문재)의 번역을 간단하게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 김병익 선생님의 번역은 영역본 중역에다가 운문이 아닌 산문 형태라는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번역을 비교하려고 다시 한 번 음미하다 보니, 호메로스 특징적인 육보격 운문을 한국어로 완벽하게 옮겨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메로스의 말뜻을 가장 잘 옮겨오는 것이 아닐까요?
이준석 선생님의 번역본이 나온 이후, 독서갤러리에 천병희 선생님과 이준석 선생님의 번역 중 무엇을 고를까? 라는 류의 질문글이 꾸준히 올라옴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을 좋아하지만,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앞으로는 이준석 선생님의 번역이 우리 한국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합니다.
최근에는 박문재 선생님의 번역 또한 나왔지요. 현대지성 박문재 선생님 역본의 장점은 또한 다양한 시각자료라고 생각됩니다. 중간중간 그림이 정말 많아서, 처음 읽으시는 분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걸로 일리아스 번역비교를 마쳐보도록 하겠습니다. 박문재, 이준석 선생님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번역이 디딤돌이 되어, 천병희 선생님께서 기틀을 다지신 희랍 고전의 원전 번역들을 넘어 더 많은 고전들이 새로이 번역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헤시오도스의 새 번역이 정말 기다려지네요.
다음에 또 고전문학 번역비교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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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지성 관계자 여러분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띠지 제발 좀 어떻게 해주세요… 구매욕이 싹 사라집니다…]
west 편집본은 반복되는 시구 칼질하는 등 연구자 주관이 강해서 옥스퍼드판을 완전히 대체할 성격은 아니라고 들음
칼질한것들 어차피 Apparattus에 다 나와있을건디;; 그냥 아리스타르쿠스판을 전적으로 신뢰하냐 아니냐의 가치관 차이에서 학계의 평이 갈리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리고 이건 순수 뇌피셜인데 노교수들은 생각보다 신판 나오는거 잘 모르고 관심없는 경우가 있어서 유학시절에 봤던 책 그대로 보는걸수도 있음 ㅇ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대지성본 주석에서 희랍어 그대로 쓴게 마음에 든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것도 플러스점수네용
박문재님 번역이 나온 줄 이제야 알았네요. 글도 감사합니다.
각자 다 맛이 다르네요. 번역도 결국 해석을 위한 창작이니
오뒷세이아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번역의 평가가 다양해서 참 많이 고민했었는데 이제 좀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