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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갈 곳이 없다는 말은 곧 앞으로 어디로 흘러가든 무방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억지로 긍정을 주입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는 불행은 있을지 몰라도 출구를 찾으러 안을 돌아다니지 못할 불행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겪은 크지만 단편적인 좌절에 낙담하여 자신의 번민을 죽음으로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소세키도 번민에 빠진 제자가 폭포에서 목숨을 끊은 사건, 그리고 베르테르 효과처럼 적잖은 이들이 그의 뒤를 따른 사건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갱부」를 썼다.
시기로 치면 「갱부」는 소세키가 「산시로」 이후로 유작인 「명암」까지 이어지는 어두운 작품들을 쓰기 직전에 나온 작품이다. 「춘분 지나고까지」가 그나마 유쾌한 색채를 담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인간의 고뇌를 담은 작품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갱부」는 소세키의 마지막 유쾌함이 반영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기야 청년들의 죽음에 대한 답가로 써낸 작품이니만큼, 사회와 청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코믹한 색채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양다리를 걸쳤다가 들통나 가출한 주인공의 사연 자체도 우습지만, 그런 주인공을 길거리에서 낚아채 갱부로 취직시킨 조조 씨, 갱부들의 험악하면서도 어딘가 유쾌한 모습, 열악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환경 등등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많다. 소세키가 정말로 갱부 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묘사도 자세하다. 갱도(굿길)에 대한 설명은 어느 모험가 주인공 앞에 펼쳐진 흥미진진한 길에 대한 설명처럼 생생하고 재밌다.
주인공은 이 순례를 '죽을 곳을 찾기 위해' 떠났다. 아니, 죽지 않더라도 다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있는 사회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변해가는 굿길을 걸으며 주인공은 마찬가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일관성이 곧 인간의 미덕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면 변화의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변심이 곧 중죄인 것처럼 다그치기도 한다. 심지어는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비관해 아무도 책망하지 않아도 알아서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그리 일관적일 수 없는 존재다. "병에 잠복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에도 잠복기가 있다. 이때에는 자신이 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지배당하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지금의 굳은 심지가 나중에는 한없이 물러지는 것은 딱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변하며, 단지 그 변화를 표출하기가 두려운 탓에 멋대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다. 지식이란 세월이 흐르며 더 정확해지는 법이다. 사상의 잠복기가 끝나서 드러내고야 만 자신의 생각이 오히려 '참된' 자신임에도 사람들은 흔쾌히 인정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대체로 인간은 자신을 네모난 불변체(不變體)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리는 통에 곤란한 것 같다. 주변 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타인을 단숨에 밀어붙이고 싶어 하는 일이 꽤 많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자기 자신을 닦달하여 기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알량한 자존심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분되게 만들려 애쓴다. 대쪽같은 심지를 가식적으로 자아내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옹고집이다. 주인공만 해도 부잣집 도련님에서 갱부로 전락한 처지임에도 갱부의 길을 함께 떠나는 이들과 인격적으로 구분되기를 원하며, 갱부라는 직업 자체를 경멸스럽게 여기는 평소의 관념을 쉽사리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직접 그들의 삶에 자신의 삶을 맞대어보지 않으면 그들의 가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주인공의 삶에 자기네 삶을 맞대어보지 않으면 주인공의 가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경험도 없이 자신의 짧은 감상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든다면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경험과 함께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변화를 막연히 두려워하고, 나아가 자신의 변화마저 무서워하니, 인생의 부조리보다 더 큰 부조리를 스스로 만드는 꼴이다. 경험이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그리고 바뀐 자신이 앞으로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인간의 성격은 매 시간 변한다. 변하는 것이 당연하고 변하는 동안에는 모순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격에는 모순이 많다는 의미가 된다. 모순투성이의 끝은 성격이 있든 없든 같은 것에 귀착한다.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면 시험해보면 된다. 남을 시험하는 죄 많은 짓을 하지 말고 우선 자신을 시험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주인공이 결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한 것은 야스 씨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야스 씨는 주인공보다 더 억울한 전락을 경험했지만 아무튼 갱부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충실히 살고 있다. "어제야 도착한 나를 보고 놀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야스 씨만은 어두운 갱 밑바닥에서도 내 인격을 충분히 인정해주었다. 야스 씨는 갱부로 일하고 있지만 뼛속까지 갱부는 아니다. 그래도 전락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 전락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고도 했다. 전락의 밑바닥에서 죽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전락한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살아서 일하고 있다. 살아서…… 자신을 구하려 하고 있다. 야스 씨가 살아가는 이상 나도 죽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펼쳐질 삶도 여전히 절망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절망을 품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불행을 품고 강해질 수 있다. 하다못해 강해지지는 않더라도 언제 올지 모르는 볕들 날을 기다리며 목숨을 이어갈 수는 있다. 인간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그 안을 못 견뎌낼 리는 없다. 그러니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희망이 없더라도 스스로 희망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변치 않는 것 따위가 인간의 도리는 아니다.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도 변화해가며 완성에 다다르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방향이다.
「갱부」는 이렇듯 삶에 희망을 주는 작품은 아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가르쳐 주는 소설이다. 인생이 마냥 즐겁다는 이야기는 솔직히 거짓말이다. 갖가지 불안, 나아지지 않는 현황에 사람들은 지칠 수밖에 없다. 「갱부」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세계란 '걸으면 걸을수록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는 흐릿한' 곳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자신을 바꿀 수는 있다. 아니, 자신의 의지가 따르지 않더라도 경험이 자신을 바꾸게 되어 있다. 살아갈 이유는 살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만큼 충분히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진정 소중한 것을 배워가며 역동적으로 모습을 바꾸어간다면, 성공한 인생은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의미란 인간 스스로가 세상에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거울 앞에 서 있으면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신경 써본들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다. 세상의 규칙이라는 거울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면 자신이 거울 앞을 떠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굳이 거울을 보며 좌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세상에는 거울 말고 볼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을 향유하며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생을 이어가자는 것이 「갱부」를 통해 전해지는 소세키의 메시지다.
나는 「갱부」를 내 또래, 즉 20대 중반의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많은 좌절을 겪었고 예전만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내 또래 다른 사람들도 학교를 벗어나 사회의 신입생으로서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며 나도 삶의 활력을 많이 잃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를 덮치는 불행을 우리가 결코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려면 당장의 판단보다도 더 깊은, 더 많은 경험들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적응을 위해 스스로 모습을 바꿔갈 것이다. 이 변화를 진정한 자신에게로 나아가기 위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자아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면 앞으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삶의 종점이 눈앞에 아른거리게 될 것이며, 거기에는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없더라도 뒤를 돌아보면 충분히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변수가 없는 최선의 삶은 인간에게 잘 허용되지 않지만, 어떤 것이든 최선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일은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삶의 파편들이 우리를 찌를 때, 그것들이 입힌 자상이 영원하리라 믿지 않기를, 흉이 지더라도 언젠가는 나을 것임을 믿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흉기들이 어디까지나 삶 전체가 아니라 삶의 파편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 앞에 펼쳐진 가능성들이 모두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수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세키가 세상을 뜬 제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앞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독자에게도 분명 의미가 있다. 이 의미를 기억하고 삶이라는 굿길을 걸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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