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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젊은작가상 감상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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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젊은작가상 총집편[시리즈] 2025 젊은작가상 리뷰 시리즈 · 2025 젊은작가상: 반의반의 반(백온유) · 2025 젊은작가상: 바우어의 정원(강보라) · 2025 젊은작가상: 리틀 프라이드(서장원) · 2025 젊은작가상: 길티gall.dcinsi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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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똑같은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거겠죠


한 줄 요약

좋아하는 것이 죄라면, 접속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벌써 젊작상의 절반이다. 남은 3개도 전에 괜찮게 읽었던 거 하나, 니세모노 씹덕 제목 하나, 그리고 젊작상 특유의 실험작 특수 하나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떨련지 모르겠다. 어쨌든 난 이번 젊작상은 이 작품만으로 작년~재작년보단 낫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정도로 괜찮고 좋은 소설이었다기보다는...... 그냥 '크게 불편한 지점 없이 무던하게 끝까지 잘 읽은 젊작상'이 상당히 귀해서......


내용도, 주제의식도 사실 매우 간단하다. "사회적 논란이 있는 예술창작자를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다루는 게 이 소설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아역배우 아동학대 논란이 있는 영화감독 김곤을 좋아하는 '나'가 김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밀 모임인 '길티 플레저 클럽'에 가입하고, 거기서 김곤 덕질을 이어가다가 끝내 김곤 덕질을 포기하게 되기까지의 덕질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나'는 김곤 덕질을 하지만 라이트 계층에서 출발했으며, 영화과 출신도 아니며 미학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논란이 터진 이후로 '나'가 김곤을 옹호하는 방식은 회색 지대에 머물러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지고 나서 말해도 되지 않나" "왜 보지도 않고 평가하냐" 등의 소극적 실드가 그렇다. 즉, '나'는 김곤의 아동학대 논란에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김곤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실이고 여전했기에, "안전하게 덕질할 곳"을 찾던 중에 길티 플레저 클럽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클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곳에는 불순분자가 한 명 있었으니, 곧 김곤 논란에 대해 김곤의 해명을 듣고 싶었던 미진 선생님(클럽 내에선 서로 선생님이라 호칭함)이었다. 이때 클럽 내에서 미학의 부족으로 소외감을 느끼던 '나'는 자신의 덕심을 증명하고자 미진 선생님에게 반박했으니 그 말이 곧 "적어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였다.


'나'가 김곤 덕질을 포기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김곤 때문이었다. 김곤이 GV에서 아동학대 논란에 대해 "정석으로 사과"한 것이었다. 그 사과를 직접 목격한 '나'에 대한 심리 묘사는 '허망함'으로 표현된다. 그 이후 시간이 흘러 결혼한 '나'는 신혼여행으로 치앙마이에 가게 되고, 어른 호랑이를 만지게 되는데, 발톱과 송곳니를 다 뽑히고 무력하게 앉아있는 호랑이를 만지면서 묘한 쾌감을 느낀 '나'는 이 쾌감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눈치채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나'가 김곤을 좋아하던 이유 같은 건 해설에서 잘 다뤄주고 있다. 물론 너무 서열화해서 설명하려는 감은 있지만...... 하여튼 '힙한 취향'에서 우월감,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다"라는 심리 아래 "논란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못하지만 덕질은 이어나가는" 모순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의 절정은 길티 플레저 클럽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나'가 덕심을 증명하기 위해 미진 선생님의 의견을 반박하고 실드 친 장면이다.


그렇기에 이 모순은 김곤 본인이 논란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무너지고 말았다. 사실 극을 전개하기 위해선 김곤이 사과하는 게 맞았다. 김곤이 사과하지 않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길티 플레저 클럽에서 덕질을 계속했을 것이고, "적어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속에서 안전한 덕질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그래서야 '좋아하는 마음'을 단면적으로 다룰 뿐이지 않은가.


이 작품은 뚜렷한 자기주장을 하기보다는 '사회적 논란이 있는 예술창작자를 좋아하는 일'을 입체적으로 다루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자기주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마지막 치앙마이의 에피소드는 결국 작가가 견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치앙마이의 발톱과 송곳니가 다 빠진 무기력한 호랑이의 모습 속에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분명 이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호랑이를 쓰다듬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쾌감은 곧 김곤을 덕질하던 시절과 빠르게 연결된다.


작가는 이런 '길티 플레저'가 인간의 모습인 걸 긍정하면서도,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내겐 읽힌다. 치앙마이 에피소드만 아니라 갑분싸의 원인인 미진 선생님의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는 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또한 '나' 역시 논란에 대해 부정하기보단 의심하고 흔들리고, 회색 지대에서 소극적으로 변호하는 위치에 세웠다가 '길티 플레저'를 깨닫고 김곤 덕질을 내려놓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렇기에 나는 이 작품을 괜찮게 읽었지만, 작품에 동의하진 못했다.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작가를 좋아하는 것과 직결될 수 없고, 작가를 좋아하는 것이 작가의 삶을 긍정하고 선망하는 것과 직결될 수 없고, 작가의 삶을 긍정하고 선망하는 것이 곧 본인이 그렇게 사는 것과 직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사이에는 수많은 접속사가 생략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는가? '그래도'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러거나 말거나' 좋아하는가?


좋아하는 것 자체를 죄로 삼는 건 동의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걸 마치 전제로 깔고 있다. '나'나 미진 선생님이 깔고 있는 생각의 전제가 그것이다. "논란 있는 예술창작자를 좋아하는 건 죄다" 따라서 '나'는 그 죄의식을 덕질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이고, 미진 선생님은 반대로 덕질을 그만두고 해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길티 플레저 클럽의 나머지 인원은 애당초 덕질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럽게 묘사해놔서 제외.


그렇기에 여기에 동원되는 논리가 피해자 2차 가해의 논리다. "너 그 말 피해자 앞에서도 할 수 있어?" "피해자가 버젓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고?" "네 가족이 그런 일 당하고도 그런 말 나올 수 있을까?" 특히 마지막 말은 작중에 대놓고 언급이 됐고, '나'는 이 말 때문에 엄청 흔들리며 고민하기까지 한다. 그건 다시 말해서 작가가 견지하고 긍정하는 태도 자체가 이쪽이라는 뜻이다.


이건 곧 좋아하는 일 자체를 죄로 만드는 작업이다. 기호가 죄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감을 통한 역지사지'가 적극적으로 쓰인다. 그로 인한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기에, 고통을 유발한 근원을 좋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논리는 모순이 많다. 음식에 대한 기호를 두고 "아프리카에는 이런 것조차 못 먹어서 굶어죽는 애들이 있는데 네가 그렇게 굶고도 뭐가 싫단 말이 나올까?"라고 말한다면? 위 작품의 전개와 논리로 따지면 이건 거부하거나 부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기호는 '죄'가 된다. 이게 정녕 합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이걸 옹호하는 측도 이제 히틀러나 극단적 사상가, 범죄자들을 좋아하고 추종하는 자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접속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유 역시. 좋아하는 일 자체는 죄가 될 수 없다. 좋아하는 일 자체가 죄라면, 무지 역시 죄라는 뜻이다. 좋아하고 말고는 자유다. 그러나 좋아하기 때문에 벌인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그럼 이제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냐고 박 터지게 싸워야겠지만, 일단 여기선 기호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나'가 논란이 터지고도 김곤 덕질을 못 놓은 건 단순히 죄의식을 덕질의 원동력으로 삼기로 '의식해서'가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김곤이 좋았기' 때문에 덕질을 계속한 것이었다. 바꿔말하면, 논리보다 마음이 우선했다는 얘기다. 이런 마음을 죄라고 규정하는 건 가혹하고 지나친 통제다. '나'가 김곤을 좋아하는 일에 회의가 들 수 있고, 찜찜할 수도 있다. 논란이 터졌으니 실망하고 덕질을 접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여전히 좋아할 수도 있고, 그래서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거기엔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좋아하고 말고는, 그 사람 마음의 몫이지, 어떤 논리나 윤리적 태도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를 논리나 윤리적 태도로 규정하고 정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이미 그 문제를 앓고 있고, 그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을 가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이럴 순 없다"는 마음 역시 가지고 있으니까.


'나'가 길티 플레저 클럽을 찾고 거기서 열렬히 덕질했던 것도, 결국 '논란 있는 창작자를 좋아하는 나'가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바꿔말해, 길티 플레저 클럽을 통해 '나만 이런 게 아니란 걸' 확인받은 '나'는 죄의식을 적절하게 덜어내고 덕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결국 죄의식과 기호의 문제에서 죄의식의 손을 들어준 셈이지만...... 나는 그 반대의 손을 들어준다고 해서 그렇게 지탄 받고 욕 먹을 일인가 싶다.


요컨대, 김곤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걸 죄로 규정하는 건 언제나 타인이고, 그 타인을 내면화한 자신이다. 그 모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좋아할 것인가, '그래도' 좋아할 것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좋아할 것인가, 혹은 같은 접속사를 쓰면서 좋아하지 않을 것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러다가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