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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악의 꽃」을 읽은 지는 한참 됐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그때 분명 시들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감상문을 제때 남기지는 않았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도통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표현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나는 악을 굳이 찬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용' 측면에서는 굳이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롤리타」를 읽다가 문득 「악의 꽃」이 생각났다. 밀렸던 숙제가 갑자기 떠오른 기분이었다. 아무튼 무언가를 느꼈다면, 아무튼 그 감상을 기록하는 것이 좋은 법이다. 그래서 부리나케 「악의 꽃」을 다시 폈다(전자책을 결제해놓은 터라 '폈다'라는 말은 부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경우 처음부터 다시 읽고 새로운 감상문을 쓰는 것이 내 원칙이지만, 밀린 책이 산더미라 이전에 형광펜으로 표시해놓은 부분만 읽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강렬함이 전혀 증발하지 않고 온전히 내게 전해졌다. 불쾌한 노래지만 장미꽃처럼 또렷한 매력이 있다. 「악의 꽃」, 정말 잘 지은 제목이다.
「악의 꽃」들 속 시는 내게 그런지(Grunge) 음악 같은 인상을 준다. 내용이 한껏 퇴폐적이고 자조적인 점도 닮았지만, 그러나 그 비참함 가운데서도 꼿꼿이 자의식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닮았다. 보들레르의 노래에 윤리적인 불쾌감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적어도 아름다운 시상을 위해 거짓 풍경을 꾸미지 않는다. 삶에는 분명 밝은 면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것만 보려고 한다. 하지만 삶에는 그만큼 어두운 면도 존재하며 사람들은 모두 내심 그곳에 발을 걸치고 있다. 욕망이 없으면 마음의 혼란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인위적으로 제거해 얻는 것은 행복보다는 권태에 가깝다. 뉴스를 보라. 모두들 세상이 평안하고 무탈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별것 아닌 기삿거리에도 비방하는 댓글을 남기려 아우성을 친다. 보들레르는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독자들을 권두시로 끌어들인다. "위선자 독자여, 내 동류, 내 형제여!" 우리가 정말로 해탈한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권태를 못 견디고 죄에 어떻게든 엮일 수밖에 없다.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는 같은 인간인 한 타락한 시인의 형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악의 꽃」은 무작정 악을 찬미하는 시집은 아니다. 보들레르의 목적은 악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일 뿐이다. 어둠은 빛만큼이나 세상의 전제 조건이다. 진실한 사람은 빛에 취해 어둠을 부정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 모두 세계의 일부임을 알기에, 자기 발을 놓을 곳을 쉽게 정하지 못하고 고뇌한다. 보들레르는 이런 고뇌를 시를 통해 기린다. "나는 압니다, 고뇌야말로 유일하게 고귀한 것임을."
「악의 꽃」이 악을 무작정 찬미하는 노래들처럼 보이는 것은 보들레르가 솔직함을 실제로 찬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다른 면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체성으로 삼는 것에는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 선행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한껏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것에도 그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강간과 독약이, 비수와 방화가 비참한 우리 운명의 초라한 캔버스를 그들의 짓궂은 구상으로 아직 수놓지 않았다면, 아! 그건 우리의 넋이 그만큼 대담하지 못하기 때문!" 인간은 고백을 좋아한다. 의혹에 대한 솔직한 인정, 그리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을 동경한다. 독자가 「악의 꽃」에 매력을 느낀다면 아마 악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악의 꽃」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해방감, 그리고 추태들을 한껏 솔직하게 그리기 위해 채택한 강렬한 상징들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점 때문에 「악의 꽃」을 뇌리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했던 것 같다.
보들레르는 솔직한 추악함을 찬미하면서도 독자에게 그런 태도를 권하지는 않는다. 보들레르는 그저 시로 풍경과 마음을 그릴 뿐이다. 다만 보들레르가 확신하는 듯한 것이 하나 있다. 결국 인생에서 어둠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기 마련이고, 그때가 오면 사람들은 기꺼이 잠길 것이라고 보들레르는 확신하는 것 같다. "언제인가는 당신도 닮게 되겠지, 이 오물, 이 지독한 부패물을, 내 눈의 별이여, 내 마음의 태양이여, 내 천사, 내 정열인 당신도!" 그러고 보면 어둠이란 그 침식력 때문에 더욱 무서운 것 같다. 정의는 사람들 사이에 잘 옮지 않지만 부정은 사람들 사이에서 잘 옮아 다닌다. 어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 곧 인간들의 소굴에서 우리는 그나마의 빛이 사라지기 전까지 버티는 꼴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안녕,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찬란한 빛이여!"
그러나 지금까지 내면의 어둠을 알면서도 잘 버텨왔다면 앞으로도 잘 버틸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솔직한 추악함으로 스스로 나아가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고뇌하면서도 삶을 버텨내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안개 낀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권태와 끝없는 슬픔에 등을 돌리고, 고요한 빛의 들판을 향해 힘찬 날개로 날아갈 수 있는 자 행복하여라." 어둠과 빛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단 자신이 그렇게 선택한 길을, 등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도 자기 의지로 꿋꿋이 걷는 자가 초인이다. "중요한 것은 선이건 악이건, 그것이 우리의 정신에 무한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느냐이다." 그러므로 「악의 꽃」은 제목 그대로 악에서 피어난 꽃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 당당해지기로 결심만 한다면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다른 자리에도 꽃을 피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결국 악의 꽃은 인간의 꽃이다. 나는 「악의 꽃」을 통해 어느 곳에서든 또렷한 색을 갖고 사람을 매혹할 수 있는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배웠고, 앞으로 시를 읽을 때마다 이 꽃의 시상을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인상 깊게 읽은 시들을 소개하고 마치고자 한다. 서두의 「독자에게」에서 「상승」까지 이어지는 시들은 정말 황홀했다. 내가 조금 더 부지런했다면 어딘가에 필사를 해두었을 것 같다. 「당신이 시샘하던 마음씨 고운 하녀」는 비틀즈의 「Eleanor Rigby」가 생각나게끔 하는 시다. 특유의 우수(憂愁)가 인상적이다. 「경고자」는 제목처럼 인간의 내면에 박혀 있는 악한 본성이 시비를 걸어오는 모습을 재밌게 비유한 시다. 「살인자의 술」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시들 중 가장 도입부가 충격적이다. "아내가 죽어 나는 자유다! 그러니 나는 실컷 마실 수 있다. 돈 한 푼 없이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고함 소리 내 가슴을 찢었지."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더욱 충격적인데, 직접 전부 말해주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으니 이쯤에서 마쳐야겠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