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타자 / 레비나스와의 대화
전자를 먼저 읽고, 후자 앞부분의 레비나스 철학 해설을 읽기
뒷부분에 수록된 대담은 철학자 레비나스보다는 인간 레비나스에 초점을 맞춤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뻔하지만, 노년의 철학자가 남기는 말들은 (맞건 틀리건) 늘 귀기울여볼만함
일단 흥미로움
전체성과 무한
이런저런 선을 그려볼 지점이 많지만 일단 맴도는 건 초월과 타자의 상징으로서 여성성
레비나스는 관계의 낙관주의가 아니라 냉혹한 고독과 통약불가능성, 탈출할 수 없는 존재의 중압감(il y a)로부터 시작함
타자는 나에게 결코 소화되거나 종합되지 않으며 잔여를 남길 수 밖에 없음 ─ 말 그대로 ‘초월’
'여성(성)'은 이에 대한 상징으로 기능함
여성을 어떤 ‘타자의 상’으로 재현하는 대신(폭력이고 뭐고 불가능하기에)
침묵하게 만드는 타인, 도달 불가능한 초월의 문턱, 윤리적 책임의 기입 불가능한 상징으로 사유하기
히브리 사유의 라함(רחם), R-H-M, 자궁, 자비, 포용, 요컨대 야훼에 얽힌 여성성
타자를 내부에 품되 나 자신으로 환원하지 않는 열린 공간
레비나스가 말미에 제시하는 번식성/출산은 바로 이 맥락에서 작동함
여성으로서 타인과의 만남을 통한, '나 아닌 나'로서의 아이
선형과 순환을 거부하는 메시아적 시간으로서의 미래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것, 나 자신의 가능성이지만 또한 타자의, 사랑받는 이의 가능성, 이것이 나의 미래."
늙은 괴테가 파우스트의 말미에 놓아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레비나스 식으로는 모든 사유가 이르지 못하는 지점으로 볼 수도 있을듯
여성이 아닌 여성적인 것
데리다가 니체에서 끌어낸 서구지성사의 여성이라는 진리의 유혹
진리는 여성으로 형상화되지만 이 여성은 항상 벗겨져야 할 것, 즉 지연되고 은폐된 어떤 것으로 등장하기
형이상학은 진리를 끊임없이 드러내려 하지만, 그 드러냄은 실패되고 지연되는 방식으로 작동함
레비나스는 데리다의 덫에서 벗어날까?
욕망 이전, 초월이 아닌 문턱이라곤 하지만, 데리다 입장에선 여전히 또 하나의 재현에 불과한, 현전의 형이상학 냄새
아마 후기작업에서 성적인 상징 대신 대속, 속죄, 볼모로 급진적인 전환(혹은 하강)을 꾀한 이유일수도
전체성과 무한 후기에서 레비나스는 헤겔, 하이데거와 함께 블랑쇼를 적수로 삼았다고 적어두지만, 결국 블랑쇼의 바깥이 수행성 모순에서 자유로워보임
들뢰즈와 가타리 평전
가타리가 광인인건 알았는데, 들뢰즈도 만만치 않은듯
푸코 같은 성마른 번뜩임보다는 bloomer 그루브가 느껴지는 잔잔한 광기
교사 시절 들뢰즈에 대한 증언들은 무슨 <죽은 시인의 사회> 보는 기분
누가 봐도 괴짜인데 학생들 입장에선 의지할 만한 만화 같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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