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이란 드라마가 재밌다고 해서 연휴 쉬는 김에 한 편씩 이어 보고 있는데
1화부터 아동납치 살인사건을 다룬다.
죽은 건 여자아이였고 아이의 어머니는 공소시효가 끝나는 15년 동안 매일 경찰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을 잡아달라고 호소하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만 공소시효는 끝나고 어머니는 울부짖는다.
이 장면에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는데
1. 여기 이 극(한국의 드라마 시그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 이를테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감정은 대부분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모양으로 표출된다. 그것은 곧장 울부짖는다는 모습, 슬픔이 복받쳤을 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반응으로 어떤 연출도 개입도 없이 공개된다.
2.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별 거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 소설에도 아들을 갑자기 떠나보내게 된 부부가 나온다. 뺑소니 사고를 당한 아이는 며칠 동안 마치 잠에 든 듯 병원 침대에 누워있다가 어느 순간 깨어나 단발마의 비명을 내지르고 죽는다. 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레이먼드 카버가 피사체인 부부의 마음에서 조명하는 것은 불안과 긴장이지 슬픔이 아니다. 그들은 아이가 죽고 난 뒤에도 울부짖거나 통곡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의 슬픔은 공개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공유되지도 않고 함몰한다.
3. 이것을 드라마와 소설의 차이로 확대해석 해 본다면?
4. 나는 아직 20대이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다. 하지만 딸을 잃은 어머니가 울부짖는 장면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울었다. 만약, 카버의 소설에서 그들 부부가 울부짖었다면 나도 울었을까? 모를 일이다. 밀란 쿤데라와 크리스티앙 살몽이 나눈 '소설의 기술에 관한 대담'에서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제 소설에서 자아를 포착한다는 것은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술된 대담을 읽는 독자들을 설득하려는 듯 꾸준히 자신의 소설을 실존이란 그릇 위에 제대로 얹으려 노력한다. 쿤데라가 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는 토마시와 함께 하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본래 자신이 속해있던 '저속한' 세계로 돌아가고자 한다. 쿤데라는 묻는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리고는 답을 찾아낸다.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는 거라는. 쿤데라는 현기증에 대해 이렇게 썼다. "쓰러지고 싶은, 막막하면서도 이겨 낼 수 없는 욕망".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5. 수십 개의 낱말, 그리고 문장들. 단 하나의 장면.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른 종류의 감정이려나? 아니면, 한쪽은 감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6.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은 분명히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런 생각들이 들더라.
시그널같은 영상물은 카버의 소설처럼 부모의 장면을 담아내서 공감을 얻기 힘들듯... 내 생각이긴 하지만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는 방식과 글로 읽혀지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지지 않을까생각해봄
글로는 카버의 소설에서 부모의 불안과 긴장을 잘 전달할 수 있지만, 영상으로 그런 감정을 전달하려면 감독과 배우가 고민에 빠질듯... 더구나 시청률도 중요하고 시청자에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전달해주려면 시그널처럼 터지는 슬픔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