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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사르트르는 「마담 보바리」를 두고 '좋아하지는 않지만 정녕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나는 사르트르가 직접 해설을 남긴 「이방인」에 대해 같은 말을 하고 싶다. 「이방인」은 완벽하지는 않은 작품이며, 작위적인 면이 짙어서 어떤 면에서는 거부감까지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단점에도 불과하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부조리를 신선하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며, 독자로 하여금 부조리의 전제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대단한 작품이다.

뫼르소는 이해하기 정말 난해한 인물이다. 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 거짓말을 하지 않을 인물이다.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늘 적당한 융통성이 미덕이다. 그런 융통성을 갖추지 않았고 심지어 그런 흉내조차 낼 생각이 없는 뫼르소는 어느 나라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든 이방인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측면이고, '인간 뫼르소'는 그럭저럭 괜찮은 인물이다. 친해지기는 다소 어렵지만 특유의 무심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남들을 기쁘게 해주려 노력한다. 그를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사람들은 뫼르소를 성실한 인물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뫼르소와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가 아니었던 독자들이 뫼르소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조리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법정에서 증언 몇 개를 합쳐서 뫼르소의 일생을 픽션으로 재구성해서 사형을 구형한 검사들과, 뫼르소와 초면이면서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말이 풍기는 푸석푸석한 첫인상 때문에 뫼르소를 막연한 기인으로 생각하는 독자들은, 카뮈의 함정 안에서 동등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왜 아랍인을 죽였는가? 이는 정말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인데, 나는 「이방인」의 가장 큰 단점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랍인이 흉기를 들고 있었다고는 하나 먼저 공격하려는 의도보다는 방어의 의도가 더 진하게 풍겼는데, 뫼르소는 그에게 먼저 총알을 박는 것도 모자라 네 발이나 더 쏴서 확인사살했다. 독자 입장에서는 법정에서 그렇게까지 한 이유를 아주 솔직하게 '햇빛 때문'이라고 말하는 뫼르소를 사이코패스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철저한 사견인데, 뫼르소가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하나는 자연적인 의미다. 뜨거운 햇빛은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든다. 바로 직전에 (레몽을 노린 것이기는 했으나)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던 아랍인이 보이는데다 열기에 짜증이 일어나 무언가 신경이 고양된 뫼르소가, 평소의 그답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둘째는 상징적인 의미다. 태양은 한없이 찬란하여 어둠까지도 집어삼키며, 열기로 땅 위의 생명들을 고취시킨다. 그러나 뫼르소는 그런 태양의 의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뫼르소는 태양이 가까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태양을 등지기로 선택한다. 총을 쏘기 전에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햇볕이 잘 안 드는 감옥으로 데려갈 것임을 뫼르소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양이 이끄는 생명의 규칙과는 달리 뫼르소는 자기 신경이 당장 제시하는 명령을 평소처럼 따른다. 즉 모든 어둠을 비추는 태양 아래에서 악을 고의로 행한 것 자체가 모종의 반항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뫼르소는 논란의 여지를 잔뜩 남긴 채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방인」의 재판은 어느 작품보다도 인상적인 코미디다. 성직자들은 뫼르소를 위한다고 하지만 애초부터 뫼르소가 받아들일 생각도 없는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애를 쓴다. 벽에다 대고 직업 정신을 발휘하는 꼴이다. 법률가들은 소설가들이다. 변호사는 뫼르소를 침묵시키고 뫼르소에 빙의하기까지 하며 일을 한다. 검사는 뫼르소를 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취사선택해서 '뫼르소와 무관한 뫼르소 이야기'를 창작해 뫼르소를 비난한다. "이것이 바로 이 재판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라지만,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변호사가 재판정에 꽂은 비수이자,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올 수 있는 비판이었다. 한편 더욱 흥미로운 점이 있다. 카프카의 「소송」 속 요제프 K의 심판처럼, 뫼르소의 재판이건만 뫼르소의 의중이 반영되는 일이 없다. 직업인들은 각자의 작업 도구를 들고 일하는데, 이 법정에서 법률가들은 뫼르소를 도구처럼 쓴다는 느낌이 강하다. 뫼르소는 이 광경을 이렇게 회상한다.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방인」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조리의 정의다.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해와 다른 의지들의 결과가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 그래서 원래의 궤도를 강제로 벗어나게 만드는 것.

재판 장면은 부조리의 클라이맥스지만, 뫼르소에게만 이입하지 않고 성직자와 법률가의 입장에서 보면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예심 판사는 자기 의도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뫼르소에게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라고 간곡하게 묻는다. 대상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라서 꼴이 우스꽝스러워지기는 했으나, 아무튼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무감과 자부심을 갖고 뫼르소를 대하고 있다. 뫼르소에게 그들의 신념을 부정당하는 것은 곧 그들 인생의 의미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코미디를 꾸미고 있는 셈이다. 부조리는 뫼르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부조리는 공평하게 다가온다.

여하튼 우리는 뫼르소가 들려주는 「이방인」을 읽고 뫼르소의 부조리에 집중하게 된다. 뫼르소를 이해하는 사람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제가 나타나 뫼르소가 최후에나마 자신의 신념을 투영하게 만들도록 시도한다. 뫼르소만큼 난해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진저리가 날만한 장면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부조리가 인식을 넘어서 체험이 되어가고 있던 뫼르소는 이것을 계기로 오히려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간 뫼르소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태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의미를, 또 그것에 대응하는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생이 끝날 것이 결정됐으나 그 순간까지 자신의 의지로 사는 것. 그것이 뫼르소가 인식한 최후의 과제였다.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너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뫼르소는 윤리적으로 분명 잘못된 길을 걸었고, 누구도 그런 뫼르소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뫼르소는 적어도 남들에게 이해를 받으라고 태어난 존재는 아니다. 그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그런 뫼르소를 이해하고 포섭하려 드는 것은 뫼르소를 소유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뫼르소는 이들의 손길을 막연히 거부하다가 죽음을 앞에 두고 거부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됐다. 분명 그에게는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선택을 했고, 지금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굳이 나아질 것도 없는 삶에 미련을 품고 자아를 포기하는 것은 곧 부조리에 항복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자기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내린 선택이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끝까지 자신다운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정한다. 이것이 부조리를 향한 뫼르소의 저항이다.

나는 뫼르소가 종장에서 하는 말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에 홀리는 느낌을 받는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나는 「이방인」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뫼르소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설정된 캐릭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당장' 말고는 개의치 않는 인간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 무관심함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 인물은 본 일이 없다. 뫼르소가 애초에 독자의 이해를 위해 설계된 캐릭터는 아니라지만 지면을 넘어서 전해지는 그의 심리는 너무나도 푸석해서 도저히 공감을 사기가 어렵다. 더구나 그 상태에서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뫼르소에게 멋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어떤 죄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의 일갈을 읽으면 뫼르소가 그 어떤 인물보다도 '생명다운' 인물로 느껴진다. 그렇다, 생명이 걷는 길은 완벽하지 않다. 순간적인 감정의 발흥에 잘 속아넘어가며, 미래를 보지 못하여 어리석은 실수를 자주 보이는 것이 생명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부족한 조건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에서만 힘을 끌어내어 생명을 방해하는 조건들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생명의 미덕이다. 진정한 생명은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며 자신이 초래한 난관을 자신의 의지로 마주한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종장의 뫼르소는 생명의 귀감이었다.

뫼르소를 동경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그가 스스로 책임지겠다고는 했지만 그의 과오는 너무도 잘못됐다. 사실 가장 큰 부조리를 경험한 것은 바위에서 쉬다가 악의가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총알을 맞고 죽은 그 아랍인이 아니던가. 마지막의 연설에 감흥을 받아 뫼르소처럼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롤리타」에서의 유려한 문체와 말재간과 문학가로서의 괜찮은 커리어에 영감을 받고 험버트 험버트를 롤모델로 삼는 것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라고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것이더라도 그런 삶을 끝까지 감내하겠다는 그의 태도만큼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인생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 해도,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인생을 흘러가는대로 놔두는 것보다 그 안에서 자신이 챙길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챙기는 그런 삶이 가장 훌륭한 삶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돌아오는 것이 성취가 아니라 처참한 실패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그것 또한 삶의 조건이라고 받아들이고 힘든 지금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편 뫼르소가 사형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뫼르소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은 항소를 해서 자신의 재판에 있었던 부조리한 면을 폭로하고 삶의 권리를 다시 쟁취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는 뫼르소에게 한계가 극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뫼르소는 애초부터 그렇게 '미래'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삶을 즐기기는 하지만, 삶에 집착을 보인다기보다는 그냥 '살아있으니까 사는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재판에서 겪은 부조리가 특별히 그의 이런 인생관을 바꾼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부조리로 가득한 인생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뫼르소가 미래에 거는 기대가 그다지 없다면, 삶을 늘려보겠다고 싸우는 것이 오히려 작위적이다. 오히려 부조리를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부조리에 대한 가장 멋진 저항이 아닌가? 나는 그래서 뫼르소의 선택을 '반항'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으로서 부조리 앞에서도 떳떳이 '살아간다'라는 의미로 항생(抗生)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뫼르소를 표현하고 싶다. 사실 뫼르소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상 생(生)이라는 글자를 쓰기가 많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여러 생각을 거듭해도 뫼르소를 이해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나를 비롯한 평범한 독자들은 이런 뫼르소에게 이질감을 넘어선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불가해한 존재로 작위적으로 설정된 뫼르소의 성향이 「이방인」의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카뮈가 지면을 넘어서 독자들 중에서도 뫼르소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을 통해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현실 세계에까지 확장해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예술이 좋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신선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렇게 예술에 관한 선입견을 가진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었으니, 「이방인」이 문제작이기는 하나 매우 훌륭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것으로 「이방인」에 대한 감상을 마친다. 마지막으로 추억이나 좀 팔아보려 한다. 「이방인」을 처음 읽은 것은 202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 입대를 앞둬서 그랬는지 읽으면서 유난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재판 장면에서는 신검 때 알레르기 진단서를 보여줬는데 "그런 건 고려 사항도 아니다"라면서 '모든 신체 부위에 대해' 1급을 선고한 의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여하튼 그후로도 종종 생각나는 작품이다. 처음 「이방인」을 읽을 때 생긴 관심에 힘입어 카뮈의 작품들도 좀 더 읽었다. 「시지프 신화」는 읽을 때 「악령」과 「소송」을 읽지 않았던 터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인상적이기는 했다.) 「페스트」는 정말 즐겁게 읽었고, 지금까지도 정말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언젠가는 「페스트」에 대한 감상문도 공유하고 싶은데,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책을 놔두고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이방인」을 다시 읽은 것도 군대에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사둔 「전락」의 전자책을 읽기 전에 기억을 되살리려는 의도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좋아하는 책을 곁에 두고도 다른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부조리지만, 내가 내 돈으로 쌓아둔 책이고 내 선택이니, 이 부조리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려 한다.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죽는 날 내가 읽었던 많은 책들의 등장인물들이 배웅을 와서 격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