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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나온 산문선으로 봄
총 21편의,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한겨레 <나는 왜 쓰는가>와 비교하면 수록글 자체는 적고, 정치적인 글을 중후반부에 배치했으며,
특히 비교적 긴 분량의 사회논평 <사자와 유니콘>이 실려있는 게 제일 큰 차이다.
번역은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잘은 몰?루. 일단 글 자체는 매우 잘 읽혔읍니다
조지 오웰은 어떤 사람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오웰을 말할 때 오웰의 정치성, 특히 다소 독특하다고 할 만한 사회주의적 '성향'에 주목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웰에 대해 논할 때 왕왕 저지르는 오류(그것을 특히 오웰에게 해당하는 '오류'라고 칭할 수 있다면)는 오웰의 글이 오롯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84나 동물농장을 인용할 때면 오웰은 너무나 무분별하게 '정치'와 결탁하여 인용된다. 이때의 문학은 일종의 주장을 위한 주장이 된다. 그러나 생각컨대 오웰은 글이란 것을 그런 식으로 다루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정치'를 빼놓고 오웰을 논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오웰을 정치라는 토대를 통해서만 경유해서 볼 때, 그것은 다소 독특한 지점에 있는 오웰의 문필가적인 특성을 평평하게 만들고 마는 것일 터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정치적 논제가 존재할 때 자신의 글이 더 쓸 만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를 읽은 뒤 뒤의 글을 살펴보면 오웰이 말하는 바가 '정치적 논쟁'에 국한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웰은 말하자면 오히려 지독한 형식주의자다. 초반부에 배치된 글, <코끼리를 쏘다>, <교수형> 등에서 오웰이 보여주는 것은 날카로운 정치적 주장만이 아니다. 물론 이 글들의 뒤에는 오웰 특유의 정치적 통찰이 숨어있지만, 실제로 오웰의 정치성에 내재되어 있는 힘은 그 사상의 무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꼼꼼한 문학적 직조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런 점을 이해할 때 오웰을 위대한 '문필가'라 할 수 있을 터다.
일단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오웰이 상당히 식견이 좋고, 비평 면에서 탁월한 시선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통찰은 지금 읽어도 꽤나 유의미한 부분이 있다. 초반부, 버마에서의 삶이나 따라지로서의 인생을 그린 몇 편의 에세이들에서도 이러한 식견은 빠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오웰의 중요한 에세이 중 하나로 꼽히는 <코끼리를 쏘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체제 자체가 이미 제국의 국민들과 피식민지인들이라는 양측의 대립을 정해놓음으로써 운영됨을,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양가측에 비극적인 상황만 만들 뿐이라는 통찰이 뒤에 깔려 있다. 그렇기에 버마에 대한 그의 시선은 차별적이지는 않지만, 반대로 동정적이지도 않다. 제국주의 산하에서, 실상 피식민지인들이나 그곳의 '치안'을 유지하는 제국의 일원들은, 모두 제국주의의 이념과 통제 '사이'에 끼어있는 신세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웰이 가장 경계한 것이 어쩌면 이것, 체제 이념에 의한 도구화일 것이다.
이렇듯 오웰은 의외로 정치, 특히 어떤 일견이나 소속으로서의 정치에서는 한발 비껴나가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이 중도주의나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웰은 오히려 중도주의에 비판적인데, 후반부에 실린 논평이나 평설들을 보면 굉장히 확고한 태도로 현세태를 비판하고, 의견을 제시함을 알 수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오웰의 시발점은 자신의 의견, 사상, 소속이 아니라, 세태, 사태, 현실이다. 그의 글은 어떤 관념이나 철학적 테제로부터 산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꼼꼼히 읽고, 분석하는 과정으로서 표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미학적 행위가 상이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철학가나 정치사상가가 아닌 미학자, 독서가, 문학인인 것이다.
잡설이 너무 길었는데, 아마 이젠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글들만 몇 개 모아 간단히 짚으면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태 문제에 대해 분석적으로 통찰한 글이 몇 편 있다. <소년주간지>에서 청소년 소설이 어떻게 어른들의 나쁜 세계를 반영하는지에 대해 설명한 것, 영국 요리에 대한 비호에서(조금 장난처럼 쓴 글이긴 하지만) 영국 요리의 진짜 문제점이 상업화된 관광·외식업 시스템에 있음을 짚는 것, 간디를 논하면서 제국주의 산하의 정치적 대립에 의해 그가 의해 오히려 '성인'으로 추앙되고, 한편으로는 그의 극단적으로 평화주의적인 태도 뒤에 종교적인 이념과 인본주의적 이념의 어긋남이 숨어있음을 파헤치는 에세이. 이렇게 세 편이 지금 기억에 남는다.
반면 오웰의 개인적인 일화로 이루어진, 수필이나 일기 성격이 다분한 글도 있다(물론 이런 글에도 논평적 시선이 다소 들어간 부분이 있긴 하지만). 책 마지막에 실린 사립예비학교 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의 <좋았고도 좋았던 시절>은, 오웰의 자전적 성격이 가장 강한 글이다. 이 글에서는 이전 글들에 비해 감상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면서도, 학교 생활이란 것이 어린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어른들의 '규칙', '체제'에 대해 고찰하게 한다. 청소년기에 대한 회상이 '아이들의 독자적인 세계'에 집중하면서 '참 이상한 시절이었다'는 어른의 자조로 끝나는 쪽과, 반대로 아주 이상했던 '어른들의 세계'가 아이들의 세계에 파고들면서 일어나는, 즉 아이들이 '사회화'되는(문학비평식으로 말하면 '교양화'되거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손상에 대해서 말하는 쪽, 두 가지가 있다면(즉 이러한 회고에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라는 상반된 시선이 있다면), 오웰의 글은 명백히 후자이다.
아무래도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가져오며 끝내는 편이 낫겠다.
나는 이스트본을 지날 일이 생겨도 학교를 피해 일부러 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학교 앞을 우연히 지나간다면 가파른 둑 위에 쌓은 낮은 벽돌담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평평한 운동장 너머 아스팔트 광장 뒤에 선 흉한 건물을 바라볼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큰 교실의 잉크와 먼지 냄새, 예배당의 송진 냄새, 수영장의 퀴퀴한 냄새와 변소의 차가운 악취를 다시 맡는다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릴 때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감정만을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얼마나 작아졌는지,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말이다! 그러나 내가 오랫동안 세인트시프리언스를 차마 다시 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말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이스트본에 발도 디디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세인트시프리언스가 위치한 카운티라는 이유만으로 서식스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어른이 된 뒤에도 딱 한 번 잠시 방문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세인트시프리언스는 나의 우주에서 영영 사라졌다. 그곳의 마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플립과 샘보가 죽었으면 좋겠다거나 학교가 불타서 없어졌다는 소문이 진실이면 좋겠다고 바랄 만큼 원한도 남아 있지 않다.
...
예전부터 오웰 에세이의 탁월함은 잘 알고 있었는데, 들은 바대로 여러모로 흥미로운 지점이 아주 많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재밌었다. 그리고 사족으로 곳곳에 1984에 대한 모티브가 되는 부분(따라지 수용소에서의 '기약 없는' 끔찍한 생활 등)들이 보였는데, 이런 점이 1984에서 이렇게 쓰였겠구나 하면서 생각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오랜만에 1984라도 재독해볼까...
암튼 끗
소설은 그닥이지만 산문은 일품인 오웰 센세...
오웰 소설이 얻대서!!!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