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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세가 심상치 않다. 차마 입에 담기도 무섭지만, 세계 대전을 옛날 이야기로만 치부하는 것도 안될 것 같다. 나는 이미 복무를 마쳤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자신이 전혀 없다. 한달에 한번 꼴로 새벽에 울리는 사이렌, 화포 안에서 헬멧을 쓰고서야 깨는 잠… 밤조차도 긴장을 풀 수 없던 18개월을 내가 어떻게 보냈으며, 앞으로 그 시간이 다시 다가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다. 마침 예전에, 표지가 정말 예뻐서 전자책으로 사두었던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기억났다. 반드시 읽어야만 했다.

레마르크는 전장의 풍경을 불쾌할 정도로 솔직하게 그린다. 그보다 더 불쾌한 것은 참상에 무덤덤해진 등장인물들이다. 그보다도 더 불쾌한 것은 이미 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전쟁에서 끝까지 사람들을 착취하고 권력을 이어가려는 지도자들이다. 나치즘이 지금에는 광기로 여겨지지만 그 시절 독일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전우애? 물론 전장에 그런 게 없지는 않다. 하지만 더 편하고 더 전망이 좋은 곳으로 나가려고 밀고를 일삼는 작자들이 있고, 심지어 그들은 그 술수를 애국심으로 포장할 수 있으니, 전쟁이 민중을 단결시킨다는 인식마저도 절반은 거짓말이다. 이런 상황에 신물이 나도 빠져나올 구멍은 없다. 이 난관은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끝나지 않는다. 이전의 패배자들은 복수하고, 이전의 승자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살기 위해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 아니면 작중 인물들 대다수가 그렇듯이 '우리는 의무를 다할 뿐'이라고 애써 정당화하는 것?

주인공인 그래버 또한 고뇌에 잠겨 있다. 휴가를 받아 기껏 돌아왔건만, 반겨줄 부모는 실종됐고 추억이 있던 거리는 파괴됐다. 일선에서 휴가를 얻어 또다른 전쟁터로 온 꼴이었지만 그래버의 경우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유럽에는 스위스 말고는 안전지대가 없었다. 어느 땅에 있든 폭음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죽음들과 이별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전장보다는 그나마 나은 곳에 있었기에 그래버는 고뇌에 잠길 시간을 벌었다. 그동안 그래버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였지만 희박하게나마 남아있는 진실된 믿음들을 재발견했고, 전장 속에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생명들을 느꼈고, 결정적으로 엘리자베스를 통해 사랑의 달콤함을 느꼈다.

어쩌면 인류든 세상이든 사랑받을 자격은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자기 고집을 강요하기 위해 민중을 끌어들이는 것이 정치의 원리다. 하지만 그래버는 엘리자베스와 시간을 보내며 전쟁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다. 전쟁은 사랑을 해칠 수는 있어도 영영 숨통을 끊을 수는 없다. 그래버와 엘리자베스가 전란 중에서도 사랑의 결실을 맺었듯이, 고난한 시기를 보내던 세상 각지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비극이 끝나고도 이들은 살아남아 다음 세상을 맞이했고, 그들의 미약한 힘들이 합쳐져 세계는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 인간의 어리석음도 섭리지만 인간의 사랑 또한 섭리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기만 한다면,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남아준다면, 생명은 그래도 명맥을 이어나가게 돼있다. 남을 이해할 줄 알고 관용을 베푸는 존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존재들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다. 폭격기를 많이 가진 쪽들, 많은 사상자를 낸 쪽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딱 하나다.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 어쨌든 미약한 개인이 역사의 어리석고 강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랑을 지켜갈 수는 있다. 전장으로 돌아와 그래버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들을 한다. 이미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을 학대하지 않는 것, 불필요한 학살을 막는 것. 어쩌면 그의 변화에 큰 의미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서로 새삼 선행을 베풀어도 곱게 보일 리는 없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제대로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사랑의 명맥이 이어진다면, 세상은 깊이 상처를 입은 만큼 뜨겁게 회복할 수 있다. "세계는 멈추지 않아. 일정 기간 동안 조국에 절망했다면 세계를 믿어야 하네. 일식이라는 건 있지만 밤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거야."

제목에서 말하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각각 어떤 때인가? 둘의 어감은 정반대지만, 정답은 '둘 다 똑같은 때를 가리킨다.'이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는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죄를 저지를 수 있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도 참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입힌 상처의 회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이어진다면, 세계는 영원히 어둠 속에 잠기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가 눈이 멀어 있을 때 관용을 품는 자는 자신이 행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의 행복을 이어나가는 불씨가 될 것이다. 그래버가 엘리자베스는 그래서 관용을 위해 건배했다. 둘의 사랑은 길게 이어지지 못할 운명이지만, 세계의 사랑이 길게 이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둘은 허무주의에 잠기지 않고 남은 시간동안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다.

다시 현실을 들여다본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끝이 요원해 보인다. 카슈미르의 분쟁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앞으로도 더 죽일 것 같다. 대만과 중국은 이미 수차례 위기를 겪었다. 우리도 국내 정세가 역대급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국제 정세가 더 혼란스러워졌으니, 정전국도 아닌 휴전국인 터에 남의 집 앞마당이 불타는 것을 남일처럼 볼 처지가 아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그 땅의 민중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인데 책상 앞에 앉은 양복쟁이들이 남긴 서명이 그들의 삶을 뺏고 있다. 국가의 경제적 이익이든, 권력자들의 정치적 술수든, 생명보다 중요한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계는 전쟁으로부터 졸업하지 못했다.

모두가 미쳐있을 때는 정상적인 사람이 미친 사람이 된다. 서로의 만행을 참아주기 힘든 시기가 오면,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취급을 받아가면서라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보상을 주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황폐화되더라도 이어질 미래의 생명들을 위해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겨눠야 해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근본적인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 때문에 살고 있고, 앞으로의 세계도 사랑하는 존재들에 의해 이어질 것이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몸을 지키되, 그보다 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지키자. 힘없는 존재라도 사랑에 최선을 다하자. 이것이 전쟁이 만든 황무지에서 피어날 꽃을 남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