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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눈은 태양을 볼 수 없다.” -플로티누스

“과학 위에 마법이 있다. 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완성으로서 마법이 과학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어느 한 메스머주의자

“나는 당신과 함께 궤도를 운행하며 심연으로부터 빛을 내는 하나의 별입니다.” -≪미트라스 제의≫



1-1. 태양의 계시

그래서 이제 우리가 지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그러한 어두움 속으로 돌진함에 따라,
우리는 단순히 단어가 부족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말을 못 하게 되고,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위-디오니시우스, 《신비 신학》

“그분은 이름할 수 없으시니라. 누구든지 인간의 형체를 지닌 자는 다른 자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라.”
— 《나그함마디 문서》, 〈복된 자 유그노스토스〉

썩은 악취를 풍기는 유황의 태양. 태양을 올려다보면 시체 피 똥을 보듯 눈을 찡그리게 된다. 인간은 썩은 태양의 아들이다. 썩어가는 태양 아빠의 몸을 맨눈으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지반은 똥오줌에 젖어 진흙처럼 질척거리며,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소리 — 목 잘리는 황소의 아우성을 지르며 황홀경에 잠겨 있다. 끔찍한 병증의 고통에 젖은 몸이 한껏 뒤틀렸다. 바타유의 아버지는 신경매독에 걸려 끔찍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눈먼 나의 아버지, 마비환자, 미치광이, 괴로움에 젖어 소리지르고 사지를 떨며 푹 꺼진 안락의자에 꼼짝없이 박혀계신 나의 아버지 […].’[6] 성부(père, [하나님] 아버지)는 고고한 권력자와 한참 멀고 찢겨지는 동물에 영 가깝다. 바타유의 심원에 아버지-눈-태양이라는 뒤집힌 삼위일체가 있다. ‘눈먼 아버지의 죽은 눈이 응시하는 태양은 썩었다. 썩은 아버지의 산 아들이 응시하는 태양은 눈멀었다.’[7] 바타유의 머릿속에서 아버지-눈-태양이라는 추한 위격이 하나로 회귀하고 다시 따로 분리되어 튀어나왔던 것이다.[8]

찢겨지는 짐승이 낳은 아이 — 조르주 바타유는 국립고문서학교를 2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명석했지만, 어려서는 학교 생활이 한없이 지루하다고 느꼈다. 중등학교를 중퇴하고 카톨릭에 귀의하여 수도승이 되고자 열망했으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사서가 되는 길을 밟았다. 젊은 바타유는 기독교 순교자의 고통에 마음 속 깊이 감명을 느꼈다. 그러나 카톨릭의 길은 바타유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었고, 바타유는 눈을 떠야 했다. 바타유가 살아온 삶을 놓고 보면 카톨릭은 잠깐의 여흥, 일보 후퇴에 불과한 것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맞닥뜨릴 적에 일단 물러서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9]

운명은 느닷없이 기이한 장소에서 찾아올 것이었다. 1927년 런던 동물원에 간 바타유는 원숭이의 항windoors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 (본디 계시[révélation]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드러난다[révéler]는 뜻이다.) ‘황홀에 취해서 진이 싹 빠져버릴 정도로 날 어지럽혔던 […] 만개하고 똥 처발린 그 거대한 항door 열매’+를 보았다고 바타유는 썼다. 바타유의 계시에서 드러난 기막힌 어둠은 맨눈으로 볼 수 없고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는 추(醜)였다. 태양은 마치 똥을 싸는 항moon처럼 빛을 배변하고 있었다. 태양빛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11] 이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갔다가 해양에 빠져 죽었다. 인간의 욕망은 추(醜)를 향한다. 추 앞에서 인간은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인간은 이카로스적이다. 살아서 파멸과 난봉을 추구하고 술과 이성에 취하며 죽어서 썩은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살같이 있는 것은 꽃잎처럼 추하게 썩는다. ‘[…] 아들은 아버지만 없으면 고백하기 어려운 오락을 즐긴다.’[12]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어서 타락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돌아갈 나지막한 동산은 없다. 인간 앞에 동산이 아니라 장대한 우주가 있다.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은 우주의 움직임을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주와 인간을 칼같이 구분하는 언어적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 사이에 매개자라고 할 것조차가 없다. 어지럽고 어지러운 역학적 움직임과 계사(copule)로 이루어진 은유뿐이다. 납은 황금 — 공기는 물 — 뇌는 적도 — 성교는 범죄 — ≪태양은 항x≫. 항X이 검게 빛나고 있다.

태양 항X이 낳은 (배변한) 삼라만상은 근본적으로 음하고 추악하다. 삼라만상은 곧 태양은 항X이라는 은유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태양환(太陽環)은 […] 항X이다.’) 태양 빛은 배변과 같다. 즉 하늘 한가운데서 지표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은 빛을 배변하는 항X이다. 《저주받은 몫》에는 인류가 태양으로부터 무한한 증여(don, 선물)를 받으며, 이 증여는 근본적으로 저주받은 것이어서 다 써버리지 않으면 그 저주가 되려 피증여인에게 닥친다고 되어 있다. 태양의 선물을 어서 써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재빨리 줘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똥독에 걸리기 딱 좋은 짓인 것이다.

인간이 사는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공전하고 있다. 하루 주기로 해가 떠오르면 주행성 생물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야행성 생물은 잠을 청할 자리를 찾는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주행성 생물은 몸을 움크리고 잠에 들며 야행성 생물은 기지개를 켠다. 그 배경에 온 우주를 통으로 아우르는 역학적 법칙이 있다. ‘법칙 운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회전 운동과 성(性)적 운동이다. 이 두 운동의 조합이 바퀴와 피스톤으로 이루어진 기차로 나타난다. 두 운동은 각각 하나가 서로 다른 것으로 상호 변화한다.’[13] 해가 지고 뜰 때 생명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누워 죽는 것은 태양과 달과 생명이 성교하는 것이다. 동물의 성교와 식물의 성장은 천체 회전의 메아리고, 동식물의 죽음도 회전 천체의 은유다.[14]

“인간은 관 위의 유령처럼 느닷없이 일어났다가 똑같이 쓰러지고 있다.
[…] 태양을 맞보고 도는 지구가 자전하며 이 위대한 천공과의 교접을 규정하고 있다.
고로 지구 생물의 움직임도 이 회전에 박을 맞추나, 그 움직임의 상은 자전하는 지구가 아니라 암컷을 관통하고 다시금 들어가기 위해 밖으로 거의 다 내빼는 음경이다.”[15]

두 가지 역학적 법칙조차도 서로 어지럽게 섞이며 인과관계를 거부하고 있다. (‘결과가 다시 원인을 야기한다.’) 메아리는 메아리의 메아리이며, 은유는 은유의 은유다.

“이렇게 우리는 지구가 자전하매 동물 및 인간이 교접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을 야기하듯) 동물 및 인간이 교접하매 지구를 돌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16]

이렇듯 바타유의 계시에는 신비주의와 과학적 사고가 성적 운동과 회전 운동의 상호 변환처럼 난삽하게 서로 엮여 있어서 양자의 범위와 한계가 어디인지 구분할 수 없다. 첫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잉여가 필멸자의 절멸을 일으킨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영지주의와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온 관념이다.

“[…] 그분은 어떤 생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볼 수 없으며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어떤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분이시니라. […] 아버지께서는 총체들을 넘어 높이 계시므로, 알려지지 않으시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니라. 그분께서는 이러한 위대함과 장엄함을 지니고 계시므로, 만일 그분께서 그분에게서 나온 에온들 가운데 있는 모든 고귀한 자들에게 갑자기 자신을 나타내셨다면 그들은 멸망했을 것이니라.”[17]

“태양이 하늘에 너무 밝게 떠 있는데, 우리가 그 태양을 올려다보는 순간, 우리 눈앞에 드러난 것은 눈을 가리는 어두움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그림자 사이에서는 번뜩 번뜩하는 빛이나 빛의 잔영만 희미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빛나는 어둠’을 뜻하지 않을까? […] 이 어둠은 빛의 결핍 때문에 생긴 어두움이 아니고, 빛이 너무 밝아서 생기는 어둠이다.”[18]

바타유가 신비주의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은 《내적 체험》의 성 폴리뇨, 예수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과 《주권》의 위-디오니시우스가 증언하고 있다. 지식을 넘어서 비지(非知, non-savoir)를 꿰뚫어 본 바타유에게 부정신학과 신비로운 황홀경은 막중한 문제였다. 게다가 희생제의와 태양을 엮는 사유에는 미트라교, 영지주의, 아즈텍 토착 종교 등 이교도 신비주의 영향이 뚜렷하다. 둘째, 그러나 우주의 결정적 법칙이 역학적 운동이라는 《태양 항무ㄴ》의 번득이는 착상이나 태양 에너지가 생명의 근원이며 지구와 태양 사이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교환이 경제의 근간이라는 《저주받은 몫》의 열역학적 기반은 분명히 과학적 사고에서 온 것이다. 바타유는 신비주의자도 과학자도 아닌 채로, 열렬하게 일방적인 구분을 거부하며 중립 지대에 남아 있다.

1927년에 쓴 《태양 항곰》부터 유고로 남은 〈제쥐브〉, 〈송과안〉, 《도퀴망》에 게재한 〈부패한 태양〉(1930), 《사회 비평》에 게재한 태양경제학의 모태 〈낭비의 개념〉(1933)을 거쳐, 〈우주 척도의 경제(L’économie à la mesure de l’univers)〉와 〈효용의 한계(La limite de l’utile)〉라는 짧은 소고로 이어지는 태양경제학의 수작 《저주받은 몫》(1947)까지, 그리고 사유의 최종점 《에로티즘》(1957)까지, 바타유의 인생에서 태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체와 분변으로 뻗은 우주에서 바타유는 도리어 눈을 돌릴 수 없었다.[19] 그렇다면 바타유가 태양을 완고하게 응시한 것은 인간을 잠식하고 허무는 저주, 태양의 신병을 뜻하고 있다.

시각에는 사물에 고정불변한 형상을 씌우고 이성으로 동화하려는 욕구가 있다. 드니 올리에(Denis Hollier)와 닉 랜드(Nick Land)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동화가 안과 바깥을 설정하며, 따라서 동화의 경계는 제방이라는 것이다. 바타유의 송과안은 시각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을 보고 절멸한다. 《태양 항곰》을 작성하고 고작 1년 후에 쓴 《눈 이야기》에서 바타유는 눈을 고문한다. 눈구멍에서 적출하고, 여근 속에 처박는다. ‘내 노고를 내려다보시는 신이시어, 나에게 맹인의 밤을 주소서.’[20] 바타유의 기도문은 시각(동화 과정)을 망가뜨리는 맹점을 은유하고 있다. 태양을 보면 눈이 부셔 따끔꺼리고 시각에는 맹점이 남는다. ‘땅거미 지기 시작할 무렵에, 우글우글 끓으며 고작 몇 분 멈추어 있다가, 미친 듯한 소용돌이 파도와 천둥으로 온 마을을 휩쓰는, 쏟아지는 폭풍우처럼 […]’[21] 어둔 빛이 휘몰아친다. 맹점은 시각이 망가진 지점이다. 맹점은 바깥이 쳐들어와 안을 침식하는 구멍이다. ‘태양은 마치 술에 취한 병자처럼 기막힌 하늘 가운데 뻥 뚤린 구멍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무수한 입 위에 뜬 체 토하였다.’[22] 조르주 바타유는 태양의 분변을 들이마시고 신병에 걸렸다.

심리학자 로버트 사폴스키(Robert Sapolsky)는 종교의 심리학적 경향을 ‘강박증적 경향’과 ‘조현병적 경향’으로 나누며, 종교심은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의 연장, 즉 ‘초마법적’ 사념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의 종교학 작업에 비슷한 말이 있다.[23] 프로이트는 ‘대양적 감정(oceanic feeling)‘[24]같은 신비주의적 황홀경을 추호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타유의 (신비주의적) 입장은 세속의 학자를 어지럽힌다. 종교를 지향하는 인간의 경향은 근본적으로 반이성적, 반인간적인 것이며, 시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불연속적인 인간이 다시 연속으로 돌아가고자 발버둥 치는 양상이다. 연속과 바깥을 향해 열리는 경향은 오르가즘의 ‘작은 죽음(La petit mort)’에서 정점에 가닿는다. 계산하는 이성이 죽을 때 인간은 아주 잠깐 무(無)를 맛본다. 그러나 바타유가 말하는 ‘죽음’은 불교의 열반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무(無)도 아니다. 예측 기능의 무화(無化)는 인간에게 존재의 절정, 황홀경을 선사한다. 태양은 절멸의 지복이다.




“신은 처음부터 신경일 뿐이며, 육체가 아니다. 따라서 신은 어떤면에서는 인간의 영혼과 유사하다. 그러나 인간 육체 내의 신경이 제한된 수로만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신의 신경은 무한하거나 영원하다. 신의 신경은 인간의 신경과 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잠재성에서는 인간의 개념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신의 신경은 창조된 세계의 어떤 사물로든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능력으로 그 신경들은 광선이라고 불리며 바로 여기에 신의 창조의 본질이 있다. 신과 천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다니엘 파울 슈레버

“내 이론에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 보다 많은 망상이 섞여 있는지, 혹은 슈레버의 망상에 다른 사람들이 아직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진실이 더 있는지는 나중에 가서 밝혀질 것이다.” – 「편집증 환자 슈레버-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니체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그의 우주관에서 비관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사물들의 근원적인 통일성에서 파렴치하게 탈선한 이 불의의 세계에서 나와 형이상학적 성으로 도망친다. 그는 이 성에서 몸을 내밀어 먼 곳을 두루 바라보다가, 오랜 사색의 침묵 뒤에 마침내 모든 존재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너희들의 실존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만약 가치가 없다면 너희는 무엇을 위해 실존하는가? 나는 너희가 너희들의 죄 때문에 실존하고 있음을 안다. 너희들은 죽음으로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너희의 대지가 어떻게 시들고 있는가를 보아라. 대양은 줄어들어 말라가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바닷조개들은 바다가 이미 얼마나 말라버렸는지를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다. 불은 지금 벌써 너희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너희의 세계는 결국 연기와 증기로 사라질 것이다. 언제나 이 같은 무상성의 세계는 항상 다시 세워질 것이다. 누가 너희를 생성의 저주에서 구1할 수 있는가?”[47]

비존재에 대하여-태양광증에 대한 사례보고서



왜 나는 현실보다 꿈에서 오감이 수만배 생생한지 억울한나머지 


읽히지도 않는 괜한 신비주의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