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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혈통에 대한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부가 불균등하게 몰리고 있을 때 그 부가 최대한 자기 영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핏줄로 이뤄진 울타리를 견고하게 치고, 그 울타리와 울타리가 만날 때 조금이라도 자신의 피와 돈이 유출되지 않도록 꽁꽁 졸라매는 수많은 굴곡 가득한 세상. 가계도는 이 짐승의 핏줄에 가까우며, 짐승의 몸에서 맴돌던 피는 의식을 위해 찢어놓은 피부에서 흘러나오며, 다른 짐승의 몸에 스며들어 기존과는 또 다른 피로 변한다. 피만으로는 구성되지 못하는 짐승은 서서히 외부로 유출되며 어느 순간 터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곤 하는데, 그러다 아들이 하나라도 나오는 순간 이 미래가 불분명한 짐승에 갑자기 형태가 잡히기도 한다. 자기 대에는 안 되는 대업을 위해 더 좋은 피를 들이고자 하기도 하며, 그 피를 매개삼아 다른 짐승의 힘을 빌려오기도 한다. 유전, 병력, 그 밖의 잡다한 발견이 짐승을 해부하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생명력을 대체해내지는 못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은 그런 이야기다. 단 한 사람의 남자로 구성되는 껍질 얇은 가정과, 두터운 심장 하나에 너무나 의존해 굳어져 가는 가정. 주인공 영빈은 부정부패 의혹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죽은 아버지를 뒀는데, 그 탓에 어머니는 언제나 청렴하면서도 인정받을 정도론 부유한, 중산층의 미묘한 위선을 강요하곤 했다. 고액과외로 돈을 벌다가 미국으로 유학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난 형과 달리 영빈은 어머니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따라 의사가 되어 대학 병원의 교수가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그를 홀렸던 자유로운 여자 현금과 몰래 야회를 즐기곤 한다. 아버지가 사망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늦둥이 딸 영묘는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뜻대로 법을 공부하다가 재벌가 맏며느리로 시집가게 됐는데, 영묘는 그 경직되고 신비주의적인 새로운 가정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삶과 죽음은 완전히 통제되며 그 통제는 영묘와 결혼한 재벌가의 맏이조차 피하지 못한다.
영빈은 매우 자유주의적인 의사로서, 아내가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환자가 자신의 몸과 병을 스스로 알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영묘가 시집간 재벌가는 토목 건설 기업인 탓일지 이치가 닿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완전히 구분하며, 영빈이 제공할 수 없는 합리적 치료가 맏이가 걸린 암을 치료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그를 대체의학과 신앙의 영역에 내려놓고 혹시나 모를 치료를 위해 온갖 영약을 대령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세속 영역에서 계속 준비한다. 영묘는 자신과 결혼한 환자 곁에서 서서히 고갈되며 남편이 기어이 죽은 뒤에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재벌가의 맏며느리 역할에 순종한다. 영묘의 가족은 더 이상 영묘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이 흔들린 질서의 수복이 둘째 아들인 영빈으로선 무리라는듯, 미국에서 크게 성공해 돌아온 영빈의 형의 손에 의해 마법처럼 회복된다. 그리고 영빈의 자유주의적 믿음에 대한 마지막 냉소로, 초기 암이 발견되어 치료만 하면 완치될 수 있다고 말해준 가난한 환자는 가정에 부담을 주지 않고자 조용히 목숨을 끊는다.
<아주>에서 그려내는 한국의 모습은 실제 한국의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미묘한 환상성을 부여하는, 한국식 고딕에 가깝다. (괴물이 오직 병과 돈이라는 현대적인 재앙으로만 나타나는 이 메마른 한국의 환상성이란!) 합리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영빈은 가정에서, 도덕에서, 이념에서 모두 철저히 실패하며, 엽기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미신 가득한 재벌가의 세상은 마찬가지로 신비스럽게 제시된 부유한 형의 귀환과 발을 맞춰 합리성을 뒤덮는 비합리성을 보여준다. 이 이치에 맞지 않는 공포스러운 숲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짐승이 되어야 하며, 짐승의 머리가 되길 거부한 영빈은 간접적으로 소설 속 많은 파국의 책임을 지고 있다. 덕분에 박완서 본인이 언급하듯 이 글이 자본주의, 혹은 돈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 게 약간 어색하긴 하다. <아주>는 돈과 피가 하나로 되어 유령으로 배회하는 황량한 황무지를 그려낸 소설이며, 우리가 <드라큘라>를 흡혈1)에 대한, <나사의 회전>을 유령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지 않듯, <아주> 역시 돈에 대한 비판이 되기에는 그 초점이 아예 다른 곳에 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점을 생각하면 나카가미 겐지의 <고목탄>과 <아주> 사이의 간극이 더욱 크나크다. 잔뜩 가지를 뻗쳐 아무렇게나 엉킨 가계도에서의 돈과 피의 문제와, 정반대로 잘 정돈되어 있지만 너무 희미해지거나 경직되어버린 두 가계도 사이의 문제. 돈이 잔뜩 메마른 <고목탄>에서 오히려 넘쳐 흐르는 생명력이 가장 큰 환상적 요소로 등장하는 반면, 돈이 꽤나 넘쳐 흐르는 <아주>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생명력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아주>에서는 돈이 가장 신비스러운 힘으로 작중 인물들을 사로잡곤 하며 <고목탄>의 주인공이 자신의 넘쳐 흐르는 생명력이 분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듯 <아주>의 등장인물들은 돈이 자신을 불모로 만드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그리고 고딕 소설이 늘 그렇듯 그 두려움은 양쪽 모두 실현된다. <아주>가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빈이 어릴 때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유일하게 사랑했던 현금은 결국 그 넘치는 돈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얻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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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흡혈은 이후 엄청난 상징적 의미를 얻었다. 젊음, 생명력, 돈, 그 밖의 온갖 것을 빨아먹는 자연의 고갈시키는 힘에 대한 비유라든가. 하지만 꼭 공포 문학이 아니더라도, 문학 비평은 문학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까우리라. 유령을 비유적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요즘은 데리다의 유령론이 가장 인기 많은 편일지도 모르겠다-을 유령 이야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듯. 이것이 어디까지 실재하고 실재하지 않는 것인가는 각자가 판단할 영역이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