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문학 (사사키 아츠시, 2016)
목차
프롤로그: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머리말 / 아쿠타가와상이 의미하는 것 / '문학'을 둘러싼 패러독스 / '문학'을 구해내려면
제1장 무라카미 하루키는 왜 '나(僕, 보쿠)'라고 하는가?
처음부터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 '나(보쿠) 소설'의 계보 / 구리모토 가오루(나카지마 아즈사)가 묻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1인칭' / 아라이 모토코 - '나(あたし, 아타시)'의 효과
제2장 '80년대'와 작가들
무라카미 류 - 더블 무라카미 시대 /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새로움'이란? / 시마다 마사히코에게서 보는 '문학'의 지위 / 요시모토 바나나 - 순정만화적인 문체 / 1981년의 베스트셀러, '난쿠리' / 《33년 후의 어쩐지, 크리스탈》
제3장 '영어 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새로운 일본어 문체 / 무라카미 하루키, '문체'의 비밀 / 영어 환경 속에서 본 '일본/문학' / '영어'와 80년대 작가들 / 다나카 고미마사 - 독특한 문장 / '번역'이라는 작업 / 가타오카 요시오와 '영어'
제4장 꽤 편향된 '일본 미스터리'의 역사
장르 소설과 팬덤의 형성 / '본격 미스터리'란 / '수수께끼와 해결'을 둘러싼 문제 / 잡지 "환영성" / 아부쿠마가와 쓰마오 - 심리 트릭의 명작 / 렌조 미키히코 - '본격 미스터리'의 기술 / 다케모토 겐지 - 메타픽션의 시도 / 시마다 소지 - 선배 작가로서 / 가사이 기요시 - '본격 미스터리'의 이론화 / 아야츠지 유키토의 데뷔 / '신본격 미스터리'의 발흥
제5장 그다지 편향되지 않은 '일본 SF'의 역사
'SF'란 무엇인가 / '과학'과 '상상' / 해외 3대 작가 / 전후 일본의 'SF' 수용 / 호시 신이치 - '쇼트 쇼트' 제1인자 / 고마쓰 사쿄 - 왕성한 'SF 사랑' / 쓰쓰이 야스타카 - 인기 'SF' 작가 / 장르로 인한 고난 / 거시적 비전 / 미쓰세 류 - 《백억의 낮과 천억의 밤》 / 마유무라 다쿠 - 내부자의 'SF' / 야마다 마사키 - 'SF 제2세대' / '세계'와 '이야기' / '사이버펑크'와 '노벨스' 붐 속에서 / 간바야시 조헤이 - 'SF 제3세대'
제6장 서브컬처와 (로서의) '문학'
1978년, 에토 준이 문예시평을 그만두다 / 하위문화로서의 서브컬처 / 1998년, 'J문학' 붐 / 1988년,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문예시평 / 오쓰지 가쓰히코(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소설 / 아카세가와의 '예술'과 오쓰지의 '문학'
제7장 포스트 버블의 '90년대'
'뉴아카' 붐의 종언 / 호사카 가즈시 - 철학적인 소설 / 아베 가즈시게 - '자의식'의 문제 / 1995년의 전환 / 타업종으로부터의 진입 / 나카하라 마사야 - 다재다능한 재능 / 마치다 고 - 뮤지션에서 아쿠타가와상 작가로 / 무라카미 하루키와 오에 겐자부로 / 마야 유타카 - '신본격'의 극점 / 교고쿠 나쓰히코 - '신본격' 그 너머에 / 메피스토상의 창설
제8장 '제로년대' - 장르의 확산
마이조 오타로 - '문학'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 / '사랑'과 '용기'를 정면으로 묻다 / 사토 유야 - 메피스토상에서 미시마상으로 / 니시오 이신 - 캐릭터의 매력 / 신잡지 "파우스트" / 출판 불황 속에서 / '라노베' 대두 / '일본의 음악'과 비교해 보면 / '문학' = 팔리지 않는 소설 / 가네하라 히토미와 와타야 리사 / 제로년대의 'SF' / 이토 게이카쿠 - 두 권의 걸작 / 엔조 도 - SF지와 문예지, 양쪽에서의 데뷔 / "어릿광대의 나비" 수상 기자회견에서
에필로그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
텐년대의 '일본의 문학' / 아베 가즈시게 × 이사카 고타로 - 장르를 넘어서는 시도 / 마타요시 나오키 - 현역 개그맨의 아쿠타가와상 수상 / "문학은", "문학이다"
후기
프롤로그: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머리말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 문학, 즉 '일본의 문학'의 역사를 풀어보는 책입니다.
그렇다 해도, 읽어보시면 바로 아시겠지만, 이것은 소위 '일본문학사' 종류와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역사라고 해도, 다루어지는 것은 주로 현대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70년대 말부터 일단 시작하여, 필요에 따라 몇 번이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2010년대 중반 이후의 현재(2016년 초두)까지의 '일본 문학'의 흐름을, 기본적으로는 순서대로 이야기해 나갑니다. 즉 대략, 80년대, 90년대, 제로년대(2000년대)라는 세 개의 디케이드(10년간)와, 텐년대(2010년대)에 들어선 후의 몇 년간이, 이 책이 대상으로 하는 '역사'가 됩니다.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이 구성은 고단샤 현대신서에서 나온 이전 두 작품 《일본의 사상》(2009년), 《일본의 음악》(2014년)과 거의 같습니다. 제목도 겹쳐 사용했고, 필자로서는 물론 이 세 권을,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의 흐름을, 다른 장르를 통해 세 번에 걸쳐 더듬어보는, 일종의 '3부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일단락을 짓는 완결편이 됩니다.
《일본의 사상》에서는, 80년대 전반의 '뉴아카(데미즘)' 붐부터 시작하여, 여러 의미에서 한 디케이드 전인 80년대와의 결별과 단절을 표방했던 (그리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80년대부터의 연속성을 담보하기도 했던) 90년대를 거쳐, 제로년대 말의 '아즈마 히로키 일인 독주 상황'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고찰했습니다. 두 번째 책인 《일본의 음악》에서는, 전작보다 1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 60년대 말에 일본 대중음악계에 찬연히 등장한 밴드 '핫피 엔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굳이 각 장 = 각각의 디케이드의 '주인공'을 설정함으로써, 일본의 '음악'이, 시간적(=과거)인, 또한 공간적(=해외)인 의미에서의 '외부'와의 관계성을, 어떻게 변용시켜 왔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일본의 사상》과 《일본의 음악》은 다루는 분야는 다르지만, 예를 들어 아사다 아키라와 사카모토 류이치, 나카자와 신이치와 호소노 하루오미의 협업, 공동 투쟁 관계를 생각하면 직접적으로 연결된 부분은 당연히 있으며, 설령 특별히 친교 등이 없었다 하더라도, 어느 시대나 사회나 세계 속에서 '사상'이나 '철학'을 논하는 것과, 같은 시대나 사회나 세계에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은, 역시 반드시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음악》에서는, 《일본의 사상》에서 더듬었던 '사상의 역사'에 '음악의 역사'를 겹쳐 봄으로써, 1964년생인 필자가 다소나마 제대로 사물을 생각하게 된 대학생 시절부터, 이제는 젊다고 할 수 없는 50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의 과거와 미래 같은 것, 즉 필자 자신의 동시대사로서의 '일본 현대사'를, 물론 어디까지나 한 권 단독으로 읽히는 것이 대전제이지만, 잘하면 이전 저서와의 병행 관계 = 이중 노출에 의해 떠오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획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는, 부디 이전 두 권을 손에 들어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 《일본의 문학》은, 더욱이 그 속편이 됩니다. 따라서, 이후 시작될 논술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더라도, 동시대의 '사상'이나 '음악', 혹은 그 외 다양한 예술·문화·언론·사상 등과의 영향 관계나 상관관계가, 항상 함의되어 있음에 유의하며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즉 '사상'과 '음악'과 '문학' 각각의 '역사'는, 실제로는 더 큰 하나의 '역사'에 감싸여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전 두 저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도록 신경 썼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실 세 권의 간행 순서는, 우연히 쓰인 순서일 뿐입니다. 내용적으로는, 어느 《일본의 ++》부터 시작해도 좋고, 어떤 순서로 읽으셔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전 두 작품 《일본의 사상》, 《일본의 음악》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상》에서도 《음악》에서도, 디케이드마다 몇 명의 핵심 인물을 다루고, 그 행보를 좇음으로써 논의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그때, 요점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인원수를 좁혀 보았습니다. 《일본의 사상》에서는 '80년대: 아사다 아키라, 나카자와 신이치, 가라타니 고진, 사네시게', '90년대: 오쓰카 에이지, 후쿠다 가즈야, 미야다이 신지', '제로년대: 아즈마 히로키'를 각 디케이드의 '플레이어'로 다루었고, 《일본의 음악》에서는 '70년대: 핫피 엔도', '80년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90년대: 플리퍼스 기타, 피치카토 파이브, 고무로 데쓰야', '제로년대 이후: 나카타 야스타카'가 각각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 수법이나 인선에는 찬반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필자로서는 굳이 그러한 극단적인 서술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비로소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본의 문학》에서는, 물론 여러 고유명사가 나오지만, 누구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와 같은 '++(고유명사)의 시대'와 같은 주인공 취급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문학'에 관해서는, 과거와 같은 '스타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었습니다. 각각의 디케이드를 '대표'할 수 있는 작가의 이름은 여러 명 들 수 있고, 실제로 이후 차례차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접근 방식은, 말하자면 각론적이라기보다는 총론적인 것입니다. 개개의 소설가나 그 작품을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여기서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필자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문학'이라는 단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선 처음에, 간결하게 말하자면, 이 책의 야심은 다음입니다.
'문학'이라고 불리는 소설과,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는 소설을, 같은 시각에서 다루는 것.
'문학'과 '문학 이외'라는 구분을 넘어선 '일본 현대 소설사'를 제시하는 것.
제가 아는 한, 위와 같은 견지에 기반한 문학사, 혹은 소설사는 지금까지 거의 쓰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그리고 '문학'과 '문학 이외'의 구분을 넘어선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아쿠타가와상이 의미하는 것
'문학'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엄밀하게 정의되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문학'이라고 입에 올리고, 특별한 단서 없이 이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단순히 '소설'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어딘가 다른 것이라고, 어렴풋이나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즉 '문학'이라는 단어는, '소설' 중에서도, 어느 한정된 일부의 대상에 대해서 사용되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해외에서도, 'Literature(문학)'와 'Fiction(소설)'처럼, 거의 비슷한 차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일본에서 '문학'이라는 단어는, 다른 나라에는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한 의미와 한정력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아쿠타가와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과 나오키 산주고상은, 모두 출판사 문예춘추가 운영하는 문학상으로, 명백한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935년에 당시 문예춘추 사장이었던 기쿠치 간에 의해 창설되어, 문예춘추 사내에 사무소를 둔 공익재단법인 일본문학진흥회에 의해 주최되고 있는 이 두 상은, 태평양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지만,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전부터 80년에 걸쳐 존속해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상으로서의 가치를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기마다 발표된 작품에서 후보작이 선정되고, 매년 1월과 7월 연 2회, 선정 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의를 거쳐 결정하며, 즉시 문예춘추 홈페이지에 게시됩니다. 특히 최근에는 수상작 발표 후 기자회견이 니코니코 생방송으로 실황 중계되는 등, 소위 '축제'의 양상을 짙게 띠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쿠타가와상은 신인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상으로, 최근에는 400자 원고지 100매 정도의 작품이 후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아쿠타가와상은 기본적으로 '문예지'로 총칭되는 '(순)문학' 전문지에 게재된 소설 중에서 후보작이 선정됩니다. 한편, 나오키상에는 매수 제한 같은 것은 특별히 없습니다(상 규정상으로는 아쿠타가와상에도 없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기능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미 간행된 단행본에서 후보작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오키상도 처음에는 명목상 신인상이었지만, 점차 그 요소가 희미해져, 중견이나, 때로는 베테랑이라고 해도 좋을 작가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은 한 세트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사실 그렇지만, 대상이 되는 작가/작품의 조건은, 지금은 다소 달라져 있습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은 초출 문예지의 출판사에 의해 먼저 단행본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상 발표 후(가능한 한 빨리, 대부분은 직후)에 '제X회 아쿠타가와상 수상!'과 같은 띠를 두르고 간행됩니다. 그러나 그 전후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은 월간 종합지인 "문예춘추"에, 나오키상도 마찬가지로 문예춘추에서 나오는 "올 요미모노"에, 각각 게재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쿠타가와상은 전문 게재되지만, 나오키상은 대장편인 경우도 있어 초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쿠타가와상에 관해서는, 이 "문예춘추"로의 일괄 게재라는 요소와, 그러나 가능하다면 빠듯한 두께라도 좋으니 한 권의 단행본으로 간행하고 싶다는 출판사의 속셈이 맞물려, 후보작의 매수를 역으로 규정하고 있는 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순)문학'(앞으로는 '문학'으로 통일하지만 '순문학'의 의미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 주십시오)이라는 단어가 가진 한정성은, 아쿠타가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쿠타가와상은 '문학'의 신인상이지만, 그 최종 후보가 되어 선정위원회에서 심판받는 작품은, 앞서 언급했듯이 '문학' 전문지로 여겨지는 '문예지' 게재작에서만 선정되는 것입니다. 현재, 문예지라고 불리는 것은, 신초샤의 "신초"(1904년 창간), 문예춘추의 "문학계"(1933년 창간), 고단샤의 "군조"(1946년 창간), 슈에이샤의 "스바루"(1970년 창간), 가와데쇼보신샤에서 나오는 "문예"(1933년 창간. 단, 창간 시 출판사는 개조사, 1944년에 가와데쇼보가 인수했으나, 동사가 가와데쇼보신사가 된 1957년에 일시 휴간, 1962년 복간)의 다섯 잡지입니다. "문예"만 현재 계간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월간지입니다. 아쿠타가와상의 후보작은 기본적으로 이들 문예지에 게재된 소설 중에서 선정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다섯 잡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다른 문예지도 있었습니다. 주오코론샤, 현재의 주오코론신샤가 "우미(海)"(1984년 5월호로 휴간)를, 현재의 베네세 코퍼레이션, 당시의 후쿠타케 쇼텐이 "카이엔(海燕)"(1996년 11월호로 휴간)을 각각 간행했습니다. 본론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두 잡지 모두 '일본의 문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잡지입니다. 문학 전문지인 문예지도, 옛날에는 더 수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쿠타가와상의 이러한 폐쇄성도, 최근에는 변화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2012년 하반기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구로다 나쓰코의 "ab산호"는, "와세다 문학"이 운영하는 와세다 문학 신인상 수상작으로, 같은 잡지에 게재되었습니다. "와세다 문학"은 1891년에 쓰보우치 쇼요에 의해 창간된 문예 잡지이며(5대 문예지 중 가장 빨리 창간된 "신초"보다도 이전입니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현, 동 대학 문학학술원)를 거점으로 하는 와세다 문학회에 의해 운영·편집되어, 출판사를 바꿔가며 휴간과 복간을 반복해 왔지만, 현재는 지쿠마쇼보에서 발매되고 있습니다(단, "ab산호" 게재호는 와세다 문학회 발매). 최근의 와세다 문학 신인상은 단독 선정위원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구로다 나쓰코는 그 회의 단 한 명의 선정위원이었던 사네시게에 의해 신인상으로 선정되어, 그대로 아쿠타가와상도 수상했습니다.
또한, 가와카미 미에코도, 2008년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젖과 알"은 "문학계" 게재작이지만, 그전에 한 번, 역시 "와세다 문학"에 게재된 "나 비율 인 치아-, 또는 세계"로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문예 5지 이외에서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나온 것은,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와세다 문학" 이외에도, 마찬가지로 대학 계열인 "미타 문학"(게이오기주쿠 대학 출판회) 등은, 앞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수상작을 낼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후쿠다 가즈야, 쓰보우치 유조 등이 편집 동인이 되어 후소샤에서 발행되던 독특한 잡지 "en-taxi"도, 꾸준히 문예지 계열 작가의 단편 중단편을 실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아쿠타가와상을 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은밀히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잡지는 2015년 말에 휴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문예 5지 이외에서 아쿠타가와상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오히려 문예지의 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필자는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현재, 문예지에 실린 소설에서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선정된다는 기본 조건은, 아직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아쿠타가와상은 '신인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쿠타가와상의 본산인 문예춘추 간행 문예지 "문학계"에는 '신인소설 월평'이라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연재 기획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호 두 명의 평론가가 지난달 문예지에 실린 신인의 소설을 모아 단평하는 것으로, 필자도 과거에 담당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신인'의 정의란 '아직 아쿠타가와상을 받지 못한 작가'를 가리킵니다(필자도 의뢰받았을 때 편집부로부터 그렇게 설명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데뷔작으로 갑자기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는, 두 번째 작품부터는 더 이상 '신인소설 월평'에서 다루어지지 않게 되고, 사실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 스와 데쓰시의 "아삿테의 사람", 모브 노리오의 "개호 입문", 구로다 나쓰코의 "ab산호", 그리고 마타요시 나오키의 "불꽃"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한 작품밖에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 시점에서 이미 '신인'이 아니게 된 것일까요. 반대로 몇 번이고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었다 하더라도, 수상하지 않는 한, 어떤 의미에서는 언제까지고 '신인'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묘함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2005년에 아베 가즈시게가 "그랜드 피날레"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을 때입니다. 이 시점에서 아베는 작가 데뷔 후 1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첫 작품 "아메리카의 밤"은 1994년에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 같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 이후 "트라이앵글즈", "닛포니아 일본"으로 수상까지 세 번 후보가 되었습니다). 대표작인 대작 《신세미아》(2003년)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인'이라고 부르기는 무리가 있었지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으니, 즉 그때까지는 '신인'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궤변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중견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작가가 갑자기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는 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때, 그 혹은 그녀는, 수상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계속 '신인'이었던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쿠타가와상은 '신인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원리적으로는 '문학에서의 신인 = 문예지에 글을 쓰고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지 않은 작가'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신인소설 월평'을 보면, 물론 거기까지 엄격하지는 않은 듯, 아쿠타가와상 작가가 아니더라도 베테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작가의 작품은, 대체로 대상 외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첫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사람은, 다음 작품부터 거기서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신인소설 월평'에 "문학계"(문예춘추)에게 아쿠타가와상 후보작 리서치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쿠타가와상=신인상이라는 등식의 역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 또 하나의, 더욱 중대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쿠타가와상='문학'이라는 등식에 깃든 역설입니다. 아쿠타가와상은 왜 '문학'의 상이라고 여겨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너머에 '문학'과는 카테고리가 다른 소설, 오락 소설이나 중간 소설, 현재는 주로 엔터테인먼트 소설(엔타메) 등으로 불리는 작품에 주어지는 상, 즉 나오키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오키상이라는 '문학 이외'를 대상으로 하는 상과 한 세트이기 때문에, 아쿠타가와상은, 말하자면 '문학 이외 이외'인 '문학'의 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역시 궤변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면, '소설'이라는 큰 집합 안에 '문학'이라는 부분집합이 있습니다. '소설'에서 '문학'을 제외한 요소는 나오키상의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쿠타가와상의 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문학'에 들어 있는 요소뿐이며, 그렇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문예지에 실린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문예지에 게재되어 (그로 인해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거나, 혹은 이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가에 의해 쓰인) 소설'이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더욱 기묘한 점을 깨닫게 됩니다. 당연하지만 소설이 게재된 잡지는 문예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소설은, 위의 정의에 따르면 '문학(=아쿠타가와상 후보)'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출판사는 문예지와 '그 이외'의 소설지를 모두 간행하고 있습니다. 신초샤는 "신초"와 "소설 신초"를, 슈에이샤는 "스바루"와 "소설 스바루"를, 고단샤는 "군조"와 "소설 현대"를, 문예춘추는 "문학계"와 "올 요미모노"를, 각각 발행하고 있습니다(가와데쇼보신샤만 "문예"뿐. 참고로 동사의 정기간행 잡지는 "문예"뿐입니다). 이것들은 거의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에 대응합니다. "소설 현대"에 실린 소설은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지 않고, "군조"에 실린 소설은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지 않습니다.
기묘한 점이란, '문예지'와 '그 이외의 소설지' 양쪽에 글을 쓰는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문예지에 쓴 것은 '문학'이고, 그 이외의 잡지에 쓴 작품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 될까요. 확실히 작가 자신이 이 구분을 의식하고 작품을 나눠 쓰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문예지 지향의 소설과, 문예지 지향이 아닌 소설의 엄밀한 구분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납니다. 오히려 전혀 같은 소설이라 할지라도, 문예지에 실리면 '문학=아쿠타가와상'으로, 그 외에 실리면 '엔타메=나오키상'으로, 자동적으로 분류된다고 생각해 버리는 편이, 차라리 깔끔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즉 '문학'과 '엔타메'는, 말하자면 서로가 상대를 자신과는 대극에 있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정의하는 상호 의존적(상대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 명의 작가가, 혹은 하나의 작품이, 그때그때 어느 쪽에 넣어지는지는, 역시 결정적인 것이며, 그 영향도 큽니다. 이 상대성과 결정성의 패러독스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양쪽의 후보가 되는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문학'을 둘러싼 패러독스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현대 사소설 작가로 알려졌으며, 2015년에 작고한 구루마타니 조키치는, 1993년에 작품집 《소금 단지의 숟가락》으로 미시마 유키오상을 수상했습니다. 미시마상은 신초샤가 1988년에 설립한 '문학'상으로, 아쿠타가와상의 대항마로 여겨집니다(신초샤는 마찬가지로 나오키상에 대항하는 상인 야마모토 슈고로상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시마상은 아쿠타가와상과는 달리, 한 작품뿐만 아니라, 단편집이나 단행본도 대상이 됩니다). 구루마타니는 1981년에 "만조의 경우"로, 1995년에 "표류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었지만, 결국 그가 받은 것은 나오키상이었습니다. 나중에 영화화되기도 한 장편 《아카메 48폭포 심중미수》로, 1998년의 나오키상을 수상했습니다.
구루마타니와 같은 시기에, 정확히 정반대의 패턴을 걸었던 것이 하나무라 만게츠입니다. 하나무라는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범죄 소설 등을 주로 써 온 작가로(데뷔작은 "소설 스바루" 신인상), 이 시점에서 상당한 인기 작가였습니다. 하나무라는 1998년, 엔타메의 중요한 상 중 하나인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을 《미나즈키》로 수상한 직후에, "문학계"에 실린 "게르마늄의 밤"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습니다. 즉 1998년은, 그 이전에는 아쿠타가와상 쪽에 있었던 구루마타니 조키치와, 어느 쪽인가 하면 나오키상 쪽이었던 하나무라 만게츠가, 결과적으로 스위치해 버린 해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인기 작가인 가쿠타 미쓰요는, 1990년에 "행복한 유희"로 카이엔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의 세계에 데뷔했습니다(그 이전에 다른 필명으로 주니어 소설인 코발트 노벨 대상을 수상한 것은 유명합니다). 가쿠타는 그 후, 1992년부터 93년에 걸쳐 "어젯밤의 신", "핑크 버스", "또 하나의 문"으로 세 번 연속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미시마상에도 세 번 후보가 되었지만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작풍을 현재와 이어지는 방향으로 서서히 전환해 나가, 문예지 이외에서도 왕성하게 글을 쓰게 되었고, 2002년 《공중정원》이 나오키상 후보가 되었으며, 그리고 2005년 《건너편의 그녀》로 나오키상을 수상합니다. 그 후의 활약은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가쿠타 미쓰요 이전에도, 비슷한 길을 걸었던 작가가 있습니다. 야마다 에이미입니다. 1985년 "베드타임 아이즈"로 가와데쇼보신샤의 문예상을 수상하며 데뷔,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었고, 이후 "제시의 등뼈", "나비의 전족"으로 세 번 연속 후보가 되었지만 수상하지 못했고, 1987년에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로 나오키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야마다는 2003년 상반기부터 아쿠타가와상 선정위원을 맡고 있습니다(아쿠타가와상의 2015년 상반기 시점 선정위원 총 9명 중, 같은 상을 수상하지 않은 위원은 야마다와 시마다 마사히코 두 명. 시마다에 대해서는 후의 장에서 논하겠습니다).
또 한 명, 이번에는 야마다·가쿠타와는 반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토야마 아키코는 2003년에 "잇츠 온리 토크"로 문학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 그대로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됩니다. 그 후, 가쿠타 미쓰요와 마찬가지로 "바다의 선인", "근로감사의 날"로 세 번 연속 후보가 되지만, 수상하지 못했고, 2005년 《도망 빌어먹을 놈》으로 나오키상 후보에 오릅니다. 그러나 수상은 놓치고, 그리고 그 다음 회의 아쿠타가와상을 "바다에서 기다리다"로 수상했습니다. 같은 해 상반기에는 나오키상, 하반기에는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가쿠타 미쓰요와 야마다 에이미는 나오키상 작가, 이토야마 아키코는 아쿠타가와상 작가가 된 것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경위를 보면, 반대가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쪽으로 기울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경우도 이토야마 아키코와 비슷합니다. 요시다는 1997년, 문학계 신인상을 "마지막 아들"로 수상하고, 같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었지만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2002년에 《퍼레이드》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 같은 해 "파크 라이프"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습니다. 요시다의 그 후의 행보를 보면, 만약 아쿠타가와상을 받지 못했다면, 후의 작품으로 나오키상을 받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최근, 나오키상인가 했더니 아쿠타가와상, 아쿠타가와상인가 했더니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작가가 몇 명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 작가가 같은 회의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양쪽의 후보가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되는데, 실제로 그것이 과거에 몇 번인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51년에 시바타 렌자부로가 "데스마스크"로, 1958년에, 기타가와 쇼헤이가 "물의 벽"으로 각각 아쿠타가와·나오키 양쪽 상의 후보가 되었습니다(모두 낙선). 그러나 이것은 역시 좋지 않다고 여겨졌는지, 기타가와 쇼헤이 이후에는 없습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후에 나오키상 후보가 되거나, 나오키상 작가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른 적도 한 번도 없습니다. 두 상 모두 문예춘추가 하고 있으므로, 그 점은 조정하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앞으로, 화제 만들기까지 포함하여, 그러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역사상,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을 모두 수상한 작가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조차 장래에 절대로 탄생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양쪽에서 후보가 되는 경우는, 반드시 최근의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1965년에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급서한 야마카와 마사오는, 1964년 "사랑처럼"으로 네 번째이자 결과적으로 마지막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된 이전 회에 해당하는 나오키상에서 《크리스마스의 선물》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야마카와는, 어느 쪽도 수상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추리소설의 대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쓰모토 세이초는, 1953년에 "어떤 '고쿠라 일기' 전"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지만, 이 작품은 처음에는 나오키상 후보였다가, 작품 내용을 감안하여 아쿠타가와상 선정으로 회부되어 수상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옛날부터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은 어느 정도 스위치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그 경향이 다소 강해지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이 점은 이 책의 잠재적인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반복하지만, 두 상을 모두 수상한 작가가 현재는 없다는 점도 있어, 설령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에서 핑퐁처럼 후보가 되었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어느 쪽이 되는지는 역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날부터 그 작가는 '아쿠타가와상 작가' 혹은 '나오키상 작가' 중 하나로서 문단이나 세상으로부터 취급받게 됩니다. 그것은 그 작가의 대중적 이미지나, 출판업계에서의 위치, 집필 매체의 다양성, 단행본 발행 부수 등등, 다수의 조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로, 현재, 우리가 아주 평범하게 사용하고 있는 '문학'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제도적인 것이며, 게다가 그 제도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거의 핵심 없는 듯한 여러 조건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컨대 '문학'이라는 단어=개념은,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조성되어 온 허구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결국 '어쨌든 이렇게 해두자'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합의, 즉 '제도'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인 이상, 그것은 끊임없이, 암묵적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다방면에 다양한 힘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실로서, 이제는 '문학' 전문지인 문예지에 실린 작품만이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고,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될 수 있는 소설이 '문학'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노골적인 패러독스, 거의 넌센스인 상호 정의('A는 B이다'이면서 'B는 A이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예지와 소설지를 비교해 보면,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거기에는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 판단과는 또 별개로, 서로 교환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여러 편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예지라면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될 수 있고, 소설지라면 나오키상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반대는 거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자가 주로 '문학'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역시 이것은 어느 시간을 들여 조성되어 온 일종의 제도, 약속,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문예지=아쿠타가와상=문학' 대 '소설지=나오키상=엔타메'라는 이항 대립의 구도를, 그것이 제도=약속=허구임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전제로 삼고 논술을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문학'을 둘러싼 패러독스, 그것을 지탱하는 '문학'이라는 제도는, 현재도 엄연히 기능하고 있으며, 단지 그것을 무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이항 대립의 허구성을,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드러내는 작업을 시도해 보고자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있는 한, 이 제도는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제도는 역사적인 허구, 일종의 시스템이며, 개개의 작가, 개개의 소설은, 싫든 좋든 예외 없이 시스템에 편입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대부분의 경우, 시스템과는 또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더듬으면서 증명해 나가고 싶습니다.
필자는 문예지에 이것저것 원고를 쓰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매호 문예지의 시평이라고 해도 좋을, 소위 '문예시평'도 신문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문학'이라고 불리는 소설을 물론 매우 좋아하지만, 소위 '문학 이외'의 소설이나 소설가도 매우 좋아합니다. 여러 분야에 관여해 왔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소설'에 대한 글쓰기 작업을 많이 하게 된 지 아직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물론 독자로서는 훨씬 이전부터 '소설'을 매우 좋아했지만), 저 자신으로서는 처음부터, 그러한 자세로 '소설' 비평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지금까지 말했 '문학'과 '문학 이외'의 제도적인 구분을 확실히 알면서(그것의 의미나 옳고 그름을 생각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척도로 '소설'을 읽고, 그것들에 대한 글을 써왔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그런 필자의 개인적인 문학사, 소설사의 측면도 있습니다. 당장의 시작점이 1970년대 말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바로 다음 장에서 언급할 몇 가지 사실과는 또 별개로, 저 자신이 본격적으로 '문학'을 읽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르 소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스터리나 SF, 판타지, 시대 소설, 포르노 소설, 경제 소설, 라이트 노벨 등등, 다양한 '장르'에 특화된 소설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어느 장르 내부에는 대체로 여러 하위 장르가 있으며, 미스터리라면 본격 미스터리, 신본격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혹은 이야미스(싫은 기분이 되는 미스터리) 등등,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고, 또한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기도 합니다. 장르라기보다는, 일종의 딱지라고 부르는 편이 실태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작가 자신이 특정 장르에 강한 귀속 의식을 가지고 있거나, 작품을 쓸 때 장르의 특성 = 장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며, 미디어나 저널리즘이나 아카데미즘이나 시장에 의해 멋대로 분류되어 이름 붙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론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제가 아는 한, 미스터리나 SF는 상당히 강한 의미에서의 '장르 소설'로서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구해내려면
이 책의 입장은, '문학'도 일종의 '장르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번역가·서평가인 오모리 노조미가, 언젠가 어디선가 말하거나 썼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도 전혀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관념적으로 어느 정도 엄밀한 정의를 내릴 수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 정의를 (대부분 역시 관념적으로)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했, 실제로는 '문학'인지 아닌지는, 단지 문예지에 실려 있는지 아닌지로 결정됩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깔끔한 현실이 있습니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사실로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SF나 미스터리와 같은 '장르 소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같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유일하게 정기 간행되고 있는 SF 전문지 "SF 매거진"에 실린 소설이 'SF'라는 일종의 동어반복(토톨로지). 어느 장르로 분류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그 장르의 이름이 붙은 용기에 들어 있는지 아닌지라는 역설. 이것은 아마도, 그 장르의 마이너성이나 약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예를 들어 'SF'와 비슷한 정도이거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마이너일지도 모르는 '문학'이 '장르 소설'로 취급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는 아무리 봐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학'을 '장르 소설'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효용은,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에, 무근거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증명 없이, 잘 알 수 없는 채로 붙어 있는 권위성이나 예술성, 고귀함이나 고상함의 이미지로부터 '문학' 자신을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소설'의 중심이며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하다는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문학 신앙은 일단 버리고, '문학'도 다른 여러 '장르 소설'과 동등하게 다룬다는 관점에서 이 책은 진행됩니다. '문학'은 '소설'의 한 장르일 뿐이며, 이 장르와 다른 장르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위계가 있다면, 그것은 개별 작품 사이에서 가늠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동시대의 SF와 미스터리와 문학을 나란히 놓고, 그중 어느 작품이 재미있는지, 뛰어난지, 시의적절한지, 시간을 넘어 존재 의의가 있는지, 등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혹은, 그들 다른 장르에 속하는 소설들을, 무언가 공통된 시각에서 바라보고, 상호 관계나 차이 등을 분석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지금까지의 문예 비평에서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러한 시도에 의미가 있는가 하면, 일반 독자, 어느 정도 이상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그렇게 읽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읽기를 인생의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재미있을 것 같으면 '문학'도 읽고 '엔타메'도 읽고 '라이트 노벨'도 읽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단지 흥미가 가는 대로 '소설'을 읽고 있을 뿐이며, 장르는 그 작품에 우연히 편의상 붙여진 라벨일 뿐입니다. 어느 특정 장르에 유별난 애착이나 고집을 가지고, 그 대신 다른 장르에는 무관심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혐오감마저 느끼는 것은, 사실 꽤 특수한 심성이 아닐까 필자에게는 생각됩니다.
음악 이야기로 하면, 알기 쉬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한마디로 '재즈'라고 해도 많은 것이 있고, 그중에는 자신에게 좋은 재즈와 좋지 않은 재즈, 좋아하는 재즈와 그렇지 않은 재즈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재즈라는 장르 자체가 좋은 사람은, 그런 좋고 나쁨이나 좋고 싫음과는 다른 차원에서 재즈 자체에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때로는 장르의 운명이 개별 뮤지션이나 작품에 대한 평가보다 상위에 와 버리기도 합니다. 재즈는 어디까지나 예시이지만, 필자도 이러한 팬 의식은 물론 이해할 수 있지만, 역시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불건강하다고도 생각합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이니까 다른 소설 장르보다 무조건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결국 일종의 신앙일 뿐이며, 게다가 이미 말했듯 그 신앙은 매우 제도적인, 말하자면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선은 현상에 입각하여 '문학'을 굳이 '장르 소설'의 일종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장르 소설'과의 병렬 속에 놓아보는 것입니다. 그 위에, 장르 간을 관통하는 역사적인 여러 문제나 동시대의 조건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 후에, 다시 한번 '문학'의 의미와 정의와 가능성을 되물어보는 것입니다. 대략 이러한 것이, 필자가 이 책에서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쓰고 있으면, 너는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등으로 꾸지람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필자는 자신이 남들 이상으로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문학'이고,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는 가치 판단도, 문예지에 실려 있는지 아닌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실 제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뒤에 항상 '나에게 있어서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며, 단지, 그 누군가의 권위나 인기, 영향력 등에 의해, 그 신뢰도나 신빙성이 좌우될 뿐이 아닐까, 필자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역시 실제로는, 이제는 '문학'에 정확한 정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문예지에 게재된 소설이 문학이다', '문학이란 문예지에 게재된 소설을 말한다'는, 너무나도 핵심 없는 정의(?)는, 요컨대 '문학은 문학이다'라는 동어반복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2016년 초 현재, 아마도 '문학'은, 단지 스스로를 '문학'이라고 주장하고, 강조함으로써만 연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관적인, 이제는 절망적인 상황일까요? 어디에 '일본의 문학'이 나아갈 곳이 있을까요? 애초에 나아갈 곳 같은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단지 '아쿠타가와상'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는 '문학은 문학이다'라는 불모하고 강력한 동어반복일 뿐일까요?
이러한 물음에는, 이후 시작될 긴 여정 끝에, 에필로그에서 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한국처럼 신춘문예 제도가 없으니까 문예지들이 신인 작가 투고작 중에서 선별해 수록하는 시스템인가 보군. 신춘문예가 일본에서 시작된 제도인데 한국에만 남아 있다는 게 참 ㅋ 중복없이 해마다 적어도 한명의 신인 작가 이름을 알/리게 한다는 점에서(최근엔 거의 없지만 당선작 없는 회차도 있으니까) 아쿠타가와 상도 괜찮은 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저기도 고인물 얘기가 나오는구나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