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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사람이 둘러볼 수 있는 범위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대한 지식을 전해준다.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조차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조금만 멀리 나가도 낯설어지는 게 정상인데, 지도가 있으면 자기 위치에 대한 대략적인 감각을 되찾을 수 있다. 마을 전체의 구조 속에서 자신이 있는 위치. 이 감각이 그러나 얼마나 유효한지는 또 다른 문제다. 너무 불분명하거나 틀린 것이 많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지도를 붙들고 이것을 완성해나가려 하지만, 조금도 그럴 수 없을 때. 절반쯤 그려나갔다고 생각한 지도가 사실 처음 시작부터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는 걸 알고 그 모든 노력이 일순간 풀어져 버릴 때. 자신의 삶의 지도를 그려나갈 이유, 곧 삶의 이유를 찾을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자기 안의 지도를 불태워 버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도는 그저 실제에 대한 유용한 모사에 불과해 지도가 없어도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단지 모든 곳에서 낯선 이, 방랑하는 실종자가 될 뿐이다.
일본에서 생활고로 인한 실종(증발蒸発)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지만, <불타버린 지도>는 그보다는 조금 더 실존적인 측면에서 실종을 바라본다. 단순한 생활고나 주변에서 오는 기대로부터 회피하기보다는, 이런 몰개성하고 변하지 않는 삶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 소설 서두에서 모든 게 다 똑같아 보여 서로 구분될 수 없을 것 같은 주택 단지의 모습, 아무리 되새겨 봐도 떠오르지 않는 실종자 아내의 얼굴 등을 묘사하듯 <불타버린>은 <모래의 여자>와는 달리 주변이 완전히 똑같고 굳어져 버린 현대 사회를 새로운 지옥의 배경으로 삼는다. 사설 탐정인 주인공부터가 일상 생활로부터 도피해 아내와 멀어져 이런 불규칙적이고 사회에 속하지 않는 변두리 인생을 택한 만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그래서 자신이 빠져나온 사회를 자신과 거리가 먼, 전후사정을 탐구해 서사를 적당히 만들어내야 하는 대상으로서 바라본다.
실종자 탐색 의뢰를 받았을 때 주인공이 실종자의 아내와 아내의 동생을 대하던 태도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다른 모든 사건처럼 이 사건 역시 실종자가 보험 따위를 위해 실종을 가장하거나, 돈 및 연애 문제로 도주했거나, 그 밖의 잡다한 시답잖은 서사를 어떻게든 만들어보려고 시도하며 정보를 제대로 가져다주진 않으면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얼굴을 내비추곤 하는 아내의 동생을 계속 의심한다. 어떻게든 이 희미하기 짝이 없는 정보로 그려내던 지도는 그러나 이중으로 실패하는데, 무언가 단서를 갖고 있을 거라고 의심하던 아내의 동생이 맥없이 죽어버리고, 마찬가지로 실종자에 대한 비밀스러운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 믿은 실종자의 부하 직원이 사실 일상 속의 모험을 꿈꾸며 거짓말을 했을 뿐이라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부하 직원이 자신의 특별함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주인공에게 전화를 건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문제는 더 심각해졌고, 여전히 주인공은 알아낸 것이 없다.
주인공이 아내와 만난 이후 아내가 주인공의 "도피"를 비난한 후 그는 다시 이 자발적 실종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다 주는 카페 동백에서 단서를 찾으려다 너무 깊게 파고들려 한 죄로 머리를 얻어맞고 기억상실증에 걸리며, 마치 실종자 본인이 된 것처럼 실종자가 본디 살았을 삶을 살듯 멍하니 일상을 보낸다. 그는 더 이상 실종자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려 하지도 않는다, 물론. 대신 그가 계속 떠올리려 애썼던 실종자 아내의 얼굴에 더욱 집착하며 그녀와 관계를 갖는다. <모래의 여자>에서 여자가 그랬듯, <불타버린 지도>에서도 주인공을 사로잡는 여자는 주인공을 사로잡는 현실의 응축과도 같다. 의미 없이 몽롱하게 취한 상태로, 남편이 사라졌지만 꿈속에서 만나는 대용물에 충분히 만족하며 사는, 내용물은 무관하게 조건만 충분하다면 상관없이 교체되는 부품으로 구성된 테일러주의적인 모습. 이런 세상에서 사실 더 무슨 의미를 찾겠던가?
이런 모든 점들이 확실히 왜 일본의 카프카라는 명성을 불러왔는지 납득할 수 있게 해주지만, 또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부분도 많다. 유독 다른 작품에 비해 <불타버린>이 비슷한 게 많은데, 아마 카프카의 <심판>이나 <성>에서 그려내는 관료제의 악몽이 여기에서도 지역만 바꿔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아마 동유럽이나 러시아 같은 동구권 국가에서 더욱 공감할 요소가 많기도 할 테다. <불타버린>의 시작을 알1리는 비슷비슷한 건물의 묘사가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한국에서 더 익숙할 텐데, 실제로 한국에서 러시아 도시를 방문할 때면 그 아파트 단지의 모습을 보며 마치 한국에 온 것 같다는 소감을 남기곤 한다. 자유로부터 한발짝씩 멀어질수록 아베 고보와 카프카의 세상에 더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그 똑같이 균일한 양품을 대량으로 뽑아낼 수 있는 세상이라는 전제가 훨씬 중요한 걸까? 최소한 남들과 똑같이만 할 수 있다면 될 테니까. 그러나 물론, 똑같이 하지 않을 방법도 없다.
<벽>도 표제작인 S. 카르마씨의 범죄는 너무 카프카스러워서 별로였던 기억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