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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추락' 보다 조금 더 이전인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쿳시의 글. 시대가 시대인만큼 있는 그대로 시대를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달력을 줄 수 있겠지만 쿳시는 타자에 위치한 화자가 전달하는 글을, 그로 인해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더 깊은 층위에 도달할 수 있는 글을 쓴다.

화자인 커런 부인은 백인이고, 늙은 여성이며, 자녀는 해외로 가 있으며, 암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다. 지식인에 위치에 있는 그녀에게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 역시 백인이며, 남아공 사람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녀가 어머니의 살을 이어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흑인들의 저항이, 어린 나이에 스스로의 말조차 아닌 '자유가 아니면 죽음' 을 외치는 소년들이 그녀와 다르다는 것은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진 폭력이 가깝게 다가올 때에 절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죽음을 신비화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그 의견이 전달될 일은 없다.

죽음을 앞둔 그녀가 목숨을 던져 무언가 상징적인 행위를 한다 치더라도, 과연 타자인 그들에게 이것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고민은 여실하게 타자와의 거리를 넓힌다. 죽음을 앞둔 그녀가 자신의 편지를 맡기는 홈리스인 퍼케일 씨 역시 이러한 타자에 속하며 진정한 소통과는 거리가 먼 존재에 속한다.

타자들, 사랑하기 쉽지 않은 상대들. 대화가 닿지 않는 존재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딸에게 보내는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도 어렵다. 그것이 설령 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랑하고자 해야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녀 내면의 소리는 그럴 수 없음을 고백한다.

쿳시의 글은 당사자들이 말하는 절절한 목소리 대신, 그들을 타자로 두며 스스로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독자를 자극한다. 이해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대신 그들과의 다름을 깨닫고, 그들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 타자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글에서 지속적으로 맴돈다. 자신이 속한 위치에 대한 고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거부는 세상 어디든 존재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말하기 쉬운 세상에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지만, 그렇기에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다가가지 않으면 온기 없는 포옹조차 할 수가 없다. 혹은, 체념의 추락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