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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4부작(<봄눈>,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 <천인오쇠>)은 유키오의 최고작이자 작품 철학의 집대성으로 유명했다. 허나 이 글은 일본 작가치고는 특이하게도 한국에 오래도록 번역되지 않았는데, 2020년대에 들어 갑작스럽게 <봄눈>을 시작으로 빠르게 번역되며 두 달 전, 결국 완역되었다. 이 미시마 유키오 붐은 생각할수록 참 미묘하고 신기한 구석이 있지만1), 독자들의 호응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글들이 전부 번역됐으니 좋은 게 좋은 일이리라. 그리고 <천인오쇠>를 읽으며 이렇게 긴 작품이 잘 번역된 게 참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이번 감상을 기회로 <천인오쇠> 자체보다는 <풍요의 바다>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해보고자 한다. <천인오쇠>는 서사 자체로도 기나긴 여정의 끝을, 노쇠해 처음 시작과는 달리 어찌 되어야 할지 모르듯 미몽에 가득 찬 끝을 보여주는 글이니 말이다.
<천인오쇠>에서 환생 속의 기요아키를 찾는 혼다의 여정은 끝을 내린다. 너무 늙어 마찬가지로 늙은 여인 게이코 외에는 말이 통할 사람도 없는 부유한 노년을 보내던 혼다는 악마 같이 자신을 꾸미는 천재 소년 도루에게서 환생의 표식인 세 개의 점을 발견하고, 그를 양자로 삼아 일본 사회에서 고품스럽게 잘 받아들여지는 가식의 옷을 걸치는 법을 가르친다. 늘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고 있던 도루는 혼다의 교육을 받되 더욱 더 악마스럽게 성장하여 혼다를 구타하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돈과 사회적 영향력을 상속받고자 혼다를 함정에 빠뜨려 금치산자에 준하는 상태로 만들고자 하고, 이에 불만을 느낀 게이코는 도루를 만나 혼다에게서 일찍이 들은 바 있는 환생 이야기를 꺼낸다. 진정 그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면 다른 모든 환생이 그랬듯 스무살에 죽어야 할 터인데 도루는 그럴 기미가 전혀 없으며, 그는 도루 본인이 생각하듯 특별한 사람이 딱히 아니라 그저 세속적으로 뛰어난 사람에 불과하다는 말. 도루는 그 말에 충격받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꿈꾸지만 실패하며, 이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백치처럼 집에만 박혀 지내게 된다. 혼다는 자신의 부가 결국 이렇게 불모하게 끝난다는 데에 내심 만족하며, 그 끝을 보고자 사토코가 은거한 청수사로 향한다. 그러나 혼다와 만난 사토코는 기요아키에 대한 일을 모르는 듯하며, 혼다가 평생 동안 집착했던 환생 이야기가 단지 미몽에 불과할 뿐이라는 암시와 함께 <천인오쇠>가 끝난다.
여기서 기요아키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생각하면 <천인오쇠>는 참 의미심장하다. 기요아키는 늘 혼다가 생각하는 일본성에 가까웠는데, <봄눈>에서 귀족의 무상한 아름다움으로, <달리는 말>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사로 등장했던 것과는 달리 <새벽의 사원>에서부터 그 환생체는 더 이상 일본스러움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태국 공주로 나타난다. <천인오쇠>에서 일본성은 완전히 죽어 없어졌는데, 얼핏 보기에 기요아키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듯한 모습의 도루는 혼다가 첫눈에 알아챘듯 어디까지나 진심 없는 보여주기식 인간상에 불과하며, 혼다는 그를 코제브가 일본인을 부른 바 그대로의 '속물'로 완성시킨다. 혼다가 도루에게 공감했던 것은 그 본인 자체가 도루와 마찬가지로 보여주기에 집착하는 속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러면 하나의 질문이 남는데, 혼다는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가? 이 질문은 어쩔 수 없이 혼다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혼다를 매개로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가? 그건 분명하다. '일본성'이다.
<천인오쇠>의 여정은 기요아키의 환생체를 향한 집착이 점차 우스꽝스러운 촌극으로 변해버리는 과정의 끝이다. <새벽의 사원>에서부터 흔들리던 환생에 대한 믿음은 도루라는 완벽한 가짜로 완전히 파탄나며, 더 이상 기댈 것도, 믿을 것도 없어진 혼다는 언제고 꼭 찾아가려 했지만 결국 한번도 찾아가지 못한 청수사에 가 사토코를 만나며, 그곳에서 사토코는 혼다의 마지막 미련을 말 그대로 베어낸다. 선불교의 화두가 펼쳐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인데, 혼다의 환생 속에서의 영원함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집착이 자신의 노쇠로 흔들리고, 환생체의 증거인 세 개의 점에 대한 믿음도 도루에 의해 흔들리며, 마지막으로 최소한 기요아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찾아간 곳에서 사토코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혼다의 최후의 집착을 끊어낸다.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단 말인가, 하고 끝없는 허망함에 사로잡힌 채 끝나는 글. 여기서 주어가 미시마 유키오로 바뀌면 이야기는 조금 더 안타까워진다. 일본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 끝에 나온 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본성을 찾는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니 말이다.
다만 유키오의 개인철학은 차처하고-나는 유키오의 이념에 대한 글은 거의 보지 않았고, 솔직히 앞으로도 볼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봤을 때 <풍요의 바다>는 참 대단한 글이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속세의 허망함을 꿈처럼 다루는 글은 참 많았다. 한국에서도 대표적으로 <구운몽>이 있으며, 중국의 <홍루몽> 역시 속세의 다사다난한 일을 길고 자세하게 다루는 것과 별개로, 그 위에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허망한 꿈속일 뿐이라는 듯 일렁이는 불교적 허무주의가 깃들어 있다. 그 외의 여러 불교적 색채가 돋보이는 현대의 글에 공통점이 있다면, 매우 작은 시간 간격 내에서 여러 사람의 삶이 이루는 세상의 역동성을 보여준 뒤 이것이 헛되거나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근현대에 급변하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존 세계관을 바라본다고 생각해보라. 서구권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세속화됐듯, 동북아에서 유교/불교/도교의 세계관 역시 격변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실제로 변하고, 다시는 그 변화 이전으로 돌아올 것 같지도 않으니 정적인 세상도, 순환하는 세상도 그럴듯하지 않다. 화족들이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우아하게 살던 메이지 말 무렵에서, 일본이 어떻게든 전신을 불살라야 한다고 소리치는 군국주의 광풍과 전후 폐허 및 서구화되는 일상까지의 여정을 보며, 이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예전처럼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종교적 광기-혹은 신자들의 편에서 표현하자면, 진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현대의 사건을 보면서 천년왕국 및 재림의 근거를 보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자유민주주의 정체의 시대에 다시 군주정의 시대가 돌아오는 역사적 순환성을 믿는 사람도 있으며, 유키오 역시 <풍요의 바다>에서 탐구하던 일본성의 끝에서 무언가를 느꼈지 않을까. 그것이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무아지경의 황홀함일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황폐한 허망함일지는 그 본인이 아니면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전제도 없이 생각하기엔 <풍요의 바다>의 결말과 유키오의 삶의 끝이 상당히 겹쳐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풍요의 바다>를 읽으며 참 즐거웠던 것과 동시에, 사람을 진심으로 만드는 그 무언가란 무엇일까 싶은 생각에 잠시 잠겼다. 어쩌면 그는 일본의 모든 것을 외국인처럼 긍정하는 게이코가 도루의 속물성을 폭로한 것처럼, 일본성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폭로를 원했던 걸까? 혹은 천인이 죽기 전에 보여주는 다섯 가지 쇠퇴의 증후, 곧 천인오쇠 중 가장 중요한 증후, 바로 이 허망함으로 인해 사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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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말로 기묘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책을, 특히 문학을 사서 읽는 사람의 수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생기는 과잉 대표 현상이 있긴 하겠지만, 놀라울 정도로 20대 남성의 구매율이 높은 것을 보면 미시마 유키오를 향한 열정이 <디시인사이드 독서 갤러리> 바깥에서도 어느 정도 호응을 얻고 있는지, 무언가 세대론적인 관점에서 이야기가 나올 법한 수준일지 궁금하긴 하다. 물론 아래 분포를 보여주는 <봄눈>의 세일즈포인트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1/100 규모다. 요즘 누가 책을 읽겠는가? 특히 젊은이라면 더더욱.
마지막 문단을 보니 슈펭글러의 사상이 이런저런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에게 곧잘 읽힌 이유를 알 것도 같고...
글 읽고싶은데,,,,, 참는다ㅋ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