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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하는 쪽을 고르겠습니다."


 바틀비의 이 선언은 기이하기만 하다. 사실 멜빌의 인물 가운데 기이하지 않은 인물은 없겠으나, 그의 행동은 가히 손에 꼽히는 기이함일 것이다. 이는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 난관을 봉착시킨다. 물론 화자가 신뢰할 수 없는 부류이니, 모두 그의 망상이고 헛된 것이라 여기면 간단하겠으나 그렇게 된다면 이 소설의 가치는 전무한 것이 된다. 그러니 화자에 의심을 품되,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선에서 만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사기꾼 같은 작품은 예외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 감상은 그런 이들을 위한 것이고, 이 단편을 미리 읽었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를 바탕으로 쓰고 있다. 이를 감안하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단편에는 희극성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직원들의 별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터키, 니퍼스, 진저너트. 터키는 술에 취함이라는 속어와 얼간이란 뜻이 있으며 그의 기름진 인상에 어울린다. 니퍼스란 별명은 그의 신경과민적 인상을 준다. 과자를 사오는 소년은 생강과자란 별명이다. 그들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오로지 바틀비의 이름만을 알 수 있다. 이들과 바틀비의 차이점은 이름뿐만이 아닌 태도에도 드러나 있다. 그들은 일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고 바틀비는 이를 거부한다. 이 기묘한 대조가 단순히 우연이라 생각하기엔 의심쩍다. 

 이름은 개인성을 드러낸다. 이는 사람에도, 동물에도, 심지어 사물에게조차 마찬가지다. 이는 개인마다 내재된 속성으로 특별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바틀비를 제외한 인물들은 별명으로 불린다. 그 또한 친근함의 표시가 아닌 하나의 특성으로 불릴 따름이다. 그들에게 개인성은 거세되었다. 바틀비는 이와 달리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의 이름이 드러남은 그의 개인성을 내포하는 것일 것이다.

 바틀비의 거절은 처음은 서류 대조의 거부에서부터 점차 확대되어 끝내 먹을 음식의 거절까지 이른다.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는 바틀비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반항 등의 여러 해석이 있으나 개인성을 중심으로 보자. 화자는 믿을 수 없는 부류다.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며 합리화를 하는 것이 어느 한 소아성애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비슷한 인물이나 다른 면모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소아성애자는 자기 합리화의 형식으로 글을 쓴다. 치품 천사나 배심원을 운운하며 당위성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다. 바틀비의 화자는 이와 다른 매우 독특한 부류라 생각한다. 그에게도 자기 합리화가 있으나, 대부분을 바틀비를 합리화를 하는 데 있다. 그는 불쌍한 인간이라느니, 고독한 인간이라느니 독자를 바틀비에게 공감시키려 한다. 자신의 시선 속에 담긴 바틀비에 주석을 늘어놓는 형태다. 이는 독자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감정에 매몰되어 그를 불쌍한 인간으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사실 바틀비의 행동은 기이하기 짝이 없음에도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으로 만든다(물론, 우체부에서 짤렸다는 얘기도 추가로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신뢰가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바틀비는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한다. 무언가를 하는 것에 있어 거부하나, 그 명확한 답안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쫓겨난 그와 화자의 대화에서 보인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부류다. 나는 이것에 이리 생각한다. 그는 개인성을 보이고 있다. 정확히는 자신이라는 개인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해석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가족을 얘기하거나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그는 그것에 거부한다. 우리는 흔히 남을 바라볼 때 하나의 관념에 사로잡혀 바라본다. 그 사람이 무슨 직업인지, 무슨 과거를 지녔는지, 무슨 성향인지 말이다. 그 사람이 무어라 대답하면 이에 맞춰 우리는 인물을 그린다. 그렇기에 후에 이야기가 나오면 실망을 한다던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바틀비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의문만을 해소했을 뿐이다. 그가 왜 모든 것을 거절하는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가 사무실에서 떠나지 않은 이유나 죽음을 택한 이유 등은 말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자.

 바틀비는 처음엔 일을 하다가 후엔 하지 않으면서 사무실에 죽치고 눌러앉는다. 어째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는가? 이는 그의 인정욕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그는 자신의 개인성을 보이려고 한다 했다. 자신에 대한 관념은 거부하며. 그렇다면 왜 보이려는 것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무언가로서의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신을. 포르투갈의 목동 하나, 혹은 여럿이 부른 시에서 그 자체로 사랑한다 하였듯, 그 자체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리 생각하면 후의 행동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가 점차 업무를 줄인 것은 자신의 축소화 과정이다. 자신 개인을 보이기 위한.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게 아닌 그와 다르게 보인다. 그의 존재는 부정당했다. 그가 화자의 제안도 거절한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그는 결국 이해를 받지 못하고 죽는다. 

 이것이 만족스런 답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챘을 것이다. 그건 이 소설의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터키와 니퍼스는 하루에 번갈아가며 성질이 뒤바낀다. 이는 작가의 대표작 모비딕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에이헤브는 스타벅과 스터브를 설명하며 동전의 양면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관계도 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이를 넘어간다 해도 바틀비에게 의문이 또 있다. 바틀비는 어떻게 사무실의 열쇠를 갖고 있었는가? 그는 거기서 무엇을 하길래 화자에게 감춘 것일까? 화자 또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이다. 그리고 내 논의에 대해서도 이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화자가 자신의 뒤틀린 시선으로 바틀비를 보고 있는 것에 비판했는데 이 해석도 자신만의 뒤틀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고. 어쩌면 이 기이한 몽상 같은 책을 해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무한한 답이 숨겨져 있고 이를 찾는 것이랴. 




월간 독갤에 실리는 거 ㄱㄴ? 이번엔 좀 애매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