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에 올라온 백년의 고독 관련 글임. 댓글로도 쓴 내용이지만 페이지 넘어갔길래 따로 글 팠음.


소설 첫 부분 번역을 보면 이렇게 돼 있음.


문학사상사 안정효 역


그때 마콘도 마을에는, 유사 이전 공룡의 알처럼 거대하며 하얗고 매끈매끈한 돌이 깔린,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에 세운 스무 채 가량의 블록집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을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곳이 아직 많아서 어디를 알려주려면 손으로 일일이 가리켜야만 할 정도였다.


민음사 조구호 역


그 당시 마콘도는 선사시대의 알처럼 매끈하고, 하얗고, 거대한 돌들이 깔린 하상(河上)으로 투명한 물이 콸콸 흐르던 강가에 진흙과 갈대로 지은 집 스무채가 들어서 있는 마을이었다. 세상이 생긴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이 아직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지칭하려면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만 했다.



읽다보면 굵게 강조한 저 문장이 왜 있는 건지 의문이 생길 수 있음. 그런데 영역본이나 스페인어 원본을 보면 의미가 훨씬 명료하게 드러남.


영역본


At that time Macondo was a village of twenty adobe houses, built on the bank of a river of clear water that ran along a bed of polished stones, which were white and enormous, like prehistoric eggs. The world was so recent that many things lacked names, and in order to indicate them it was necessary to point.


스페인어 원본


Macondo era entonces una aldea de veinte casas de barro y cañabrava construidas a la orilla de un río de aguas diáfanas que se precipitaban por un lecho de piedras pulidas, blancas y enormes como huevos prehistóricos. El mundo era tan reciente, que muchas cosas carecían de nombre, y para mencionarlas había que señalarlas con el dedo.


그러니까 생긴지 얼마 안 된 세상이라는 표현이 받는 건 '선사시대'임. (선사시대엔) 세상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에 이름이 붙지 않았고, 그리하여 이를 지칭하려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했다, 는 뜻임. 이게 영문판이나 원판에서는 이 두 요소의 연결이 되게 명확함. 원본은 선사시대(prehistóricos) 바로 다음에 세상(El mondo)이 붙고, 영문판에는 사이에 egg만 끼어있으니까, 의미가 직접 전달이 됨. 그런데 국역본은 이 둘 사이의 거리가 멈. '선사시대'와 '세상' 사이에 거의 문장 하나가 통째로 끼어 있어서 의미 연결이 확실하지 않고 독자가 속으로 생각해서 연결을 시켜야 됨.


그렇다고 이게 역자의 문제도 아닌 게 한국어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음. 이걸 굳이 살려서 번역하려면


'당시 마콘도 마을의 투명히 흐르는 강가에는 스무 채의 토담집이 늘어섰는데, 매끈한 강바닥을 이루는 돌들은 하얗고 거대한 게 마치 선사시대의 알과 같았다. 세상이 생긴 지 너무 이른 시기라 많은 것들에 이름이 붙지 않았기에 그것들을 부르고자 하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만 했던.'


이렇게 해볼 수 있긴 한데 이것도 말맛이 죽는 문제가 있음. 영역본에서 느낄 수 있는 집 > 강물 > 매끈한 돌 > 선사시대의 알 > 세상이 차례대로 따박따박 연결되는 그 맛이 안남 ㅋㅋㅋ


결론은 완벽한 번역이란 불가능에 가깝고 결국엔 번역이란 작품을 깎아 내릴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아 그리고 안정효 역은 영역본에도 없는 오역을 한 게 세상을 마을로 잘못 번역하기도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