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한림원은 스페인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온 세상에서 세르반테스가 사용했던 아름다운 언어라는 명성을 획득할 정도로 풍요로운 우리 스페인어 스페인어가 지금처럼 생생하고 표현 능력이 뛰어난 어휘는 물론 매력적이면서도 다양한 색조와 함께 감미로우면서도 조화로운 리듬을 보존하기 위해 문법과 운율, 수사학이라는 세 가지 훌륭한 유산을 모두 일치시키기 바란다.”

이 단락에는 스페인어의 우수성이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유발함에도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옹색함부터, 문맥을 벗어나서 표현 능력이 뛰어난 어휘라고 말하는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궁색함이 차고 넘친다. (몇몇 파생어와 의성어를 제외한) 어휘들의 표현 능력에 감탄하는 것은 아레날레스 거리가 바로 아레날레스라고 불렸다고 감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나는 한림원의 자만에 찬 어구가 내포한 부수적인 면 보다는 본질적인 면, 즉 스페인어의 풍요로움에대한 고집스러운 단언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스페인어는 진짜로 그렇게 풍요로운가?

아르투로 코스타 알바레스(Arturo Costa Álvarez)는 우리의 언어(Nuestra lengua) 293쪽에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비교하기 위해 발렌시아 백작이 사용한 아주 단순한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그 백작이란 사람이 확인한 숫자에 의하면 스페인 한림원 사전에 등록된 어휘가 거의 6만 개에 이르는 반면 프 랑스어 사전에는 겨우 3만 1000개에 불과한 어휘만이 등록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사 결과를 통해 스페인어 사용자가 프랑스어 사용자보다 2만 9000개의 표현 수단을 더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추론대로라면 우리는 아주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휘의 단순한 수적 우위가 지적이거나 표현적인 우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우쭐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반면에 어휘의 수적 기준이 유효하다면 독일어나 영어로 사고하지 않는 모든 철학은 아주 빈곤할 수밖에 없다. 두 사전 모두 10만 개 정도의 어휘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페인어가 풍요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게으르게 보존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어휘가 완벽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나갈 것이다.

표면적으로 세상은 온갖 사고들이 뒤섞여 있는 아주 무질서한 곳이다. 하늘의 전망부터 시골에 만연한 체념과 같은 냄새,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담배의 떨떠름한 즐거움, 거리에 휘몰아치는 바람, 손가락에 걸려 있는 다루기 쉬운 지팡이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물이라도 우리의 의식에 갑작스럽게 떠오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세상의 다양한 수수께끼를 효과적으로 정리해 주는 것이 바로 언어, 즉 우리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명사이다. 둥그런 것을 만져 보고 새벽빛처럼 노란 빛을 바라보며 약간의 달콤함으로 입이 간지러울 때 우리는 이 세 가지 다른 것들을 하나로 합쳐 오렌지라고 허구화한다. 달 또한 허구이다. 여기서 다룰 필요가 없는 천문학적 영역을 제외하면 지금 레콜레타 담벼락 위로 솟아오르는 노란 동그라미와 예전에 5월 광장의 하늘에서 수없이 봤던 붉은 빛 조각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도 없다. 사실 모든 명사는 사물의 요약이다. 우리는 차갑고 날이 서 있으며 상처를 입히고 견고한 데다 번쩍번쩍 빛나고 끝이 뾰족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비수'라고 발음한다. 또한 태양이 멀어지고 그늘이 짙어진다고 하는 대신 '날이 저문다'고 말한다.내 생각에 중국어에 있는 등급 접두사는 형용사와 명사 사이의 형태적 탐색이다. 그것은 이름과 출처를 찾는 대신 사물을 스케치한다. 바라는 양사는 항상 손으로 만든 물건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며, 지시 대명사(또는 수사)와 사물의 명칭 사이에 삽입된다. 예를 들어 '이다오(칼 한 자루)'라고 말하는 대신 '이바다오(一把, 한 자루의 칼)'라고 말한다. 같은 방식으로 접두사 '취안'은 '둘러싸다'의 의미를 가지며, 마당이나 울타리를 친 땅(집)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다. 접두사 '장'은 '평평한 물건'을 의미하는데, 주로 문지방이나 벤치, 돗자리, 판자와 같은 단어들 앞에 사용된다. 그 밖의 문장의 부분들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단어의 유사한 분류는 문 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이 모든 것은 F. 그래브너의 『원시인의 세계(Das Weltbild der Primitiven)』 4장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오는 더글러스(Douglas)의 중국학 관련 부분을 참고했다.

나는 모든 언어에 존재하는 창조적 특징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언어란 실재성을 반영해서 건축하는 일이다. 지식을 얻기 위한 다양한 학문적 노력으로 고유의 세계가 건설되고, 그것을 구체화하기에 적합한 어휘들이 만들어졌다. 수학은 아라비아 숫자와 특정한 부호를 사용해 어떤 학문에도 뒤지지 않는 특별하고 세밀한 언어를 만들어 냈다. 형이상학과 자연 과학, 예술 또한 공통의 어휘들을 무수히 축적해 왔으며, 신학 역시 회개나 자존, 영원처럼 아주 중요한 어휘들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오직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어휘를 통해 상상력의 유희를 즐기는 예술이자 명확하게 구어적인 예술이라고 정의한) 시 만이 모든 어휘를 빌려서 사용한다. 시는 상이한 어휘들을 활용한다. 계율주의자들은 시어에 대해 설파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시어를 원할 때는 준마나 미풍, 자줏빛 등 공허한 어휘들만 건네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휘에서 어떤 시적 설득력을 찾을 수 있는가? 이것들이 어떤 시적 감성을 지닌단 말 인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산문으로는 견딜 수 없어서 운문으로 행하는 작업이 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일부 시어의 우연한 행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에스테반 마누엘 데 비예가스끄 덕분에 '호우가 내리다(diluviar)'라는 시 어를 갖게 됐으며, 후안 데 메나의 덕분에 '영광으로 가득 채우 다(congloriar)'와 '합류하다(confluir)'라는 단어를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당신이 장엄함을

미덕과 영광으로 가득 채우길 바랐던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본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신 삶의 모든 미덕과 현명함을."


하지만 의도적인 시어, 즉 일반적 어휘로 표현할 수 없어서 새로운 어휘를 만드는 행위는 아주 다른 일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아주 복잡한 세상을 표현할 때, 우리는 어휘들을 끝 없이 조합해서 사용할 수 있음에도 사실은 아주 일부분만 조합했다. 어느 날 오후에 저 멀리서 해가 지고 그때 워낭 소리가 집요하게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어휘를 만들지 않았는가? 왜 새벽 거리의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지 않았을까? 아직 밝은 오후임에도 첫 번째 가로등이 켜졌을 때 그 가로등의 완벽한 무능력에 감동한 마음을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를 왜 조합하지 않았을까? 비열함 뒤에 숨어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을 표현할 또 다른 단어는?

나는 내 생각이 몽상적이며 지적인 가능성과 실제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는 내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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