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클레어 키건, 클레어 키건 그러던데 나는 뭐 평소 책을 잘 안 읽으니 읽어본 게 없었음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단편 하나를 읽게 됨.


아마 국내에선 아직 번역이 안 된 소설인 듯.

하지만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소설이라 원하면 바로 읽어볼 수 있음.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2/02/28/fiction-claire-keegan-so-late-in-the-day

영어로 읽기 귀찮다면 그냥 긁어서 클로드 같은 무료 AI에 붙이고 번역해달라고 하면 됨. 내가 알기로 Claude번역이 어쩌다가 불필요한 실수 할 수도 있지만 가독성은 상당히 뛰어남.


하여튼 단편인데다 소설 자체 워낙 일관된 방향성이라 스포일러고 뭐고 할 것도 없지만

일단 줄거리 언급하며 감상을 말하겠음.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남주'의 어느 평범한 하루를 들려주는데

사실 알고보니 평범한 하루가 아님. 왜냐면 얼마 전 '여주'와 결혼 직전까지 가서 그녀에게 차였거든.

그러니까 그 파탄의 직후, 남주가 일상을 보내며 어쩌다가 여주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는지 회상하는데, 이미 늦었다는 거임. 제목 그대로.

결론부터 말하면 남자가 잘못했다는 거임. 짧은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그 내용임.

뭘 잘못했냐면

일단 여주가 주말마다 남주 집 놀러와서 매번 자기 돈으로 장 봐서, 맛있는 거 해줬는데

어느날 여주 지갑 안 가지고 나와서 남주 돈으로 쇼핑했을 때 그가 뭔가 짜게 굴었다.

그리고 남주가 뜬금없이 그냥 우리 집 와서 같이 안 살래, 프로포즈했고 여주는 결국 받아들였고(아이는 원치 않지만 결혼은 하겠다)


그래서 같이 결혼준비하는데, 다이아 반지 맞췄더니 여주 손가락에 안 맞아서 리사이징했고 그 결과 비용이 너무 불어나서 환불하려고 했다.

그래서 여주가 화났는데, 결국 남주 집에 자기 짐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근데 그게 너무 많아서 남주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서 참다못한 여주가 남주 회사 여직원, 여자 청소부에게 들은 걸 털어놓는데

그 얘기에 따르면 남주는 여느 아일랜드 남성들과 다름 없이, 여자를 그냥 Cunt로 취급한다. 그리고 여자 청소부에게 한 번도 크리스마스 카드를 준 적이 없다.

그래서 여주가 말하길, 남주는 받기만 하고 줄 줄은 모르는, 미소지니스트다. 남주는 뭐라 반박할 수 없다, 듣고보니 맞는 말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준비는 계속했고 남주는 드레스며 식장이며 예약이며 많은 돈을 썼는데 결국 여주가 퇴짜놓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주가 아까워하는 건 다름아닌, 사라진 자신의 돈이다.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귀가한 남주는 역시 암컷 고양이를 거의 방치 학대하다시피 하며

아무생각 없이 자지모양 케잌을 먹으면서 다이애나 왕세자 비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그 스스로 생각해보니, 과거 자신의 아버지 자기 형 모두 자기랑 비슷했다. 즉, 자기 집에서 그 세 명의 남자들은 식탁에 가만히 앉아 엄마가 차려주는 밥만 받아먹는데

어느날 엄마가 자기 음식 가져와서 식탁에 앉으려고 할 때 형이 엄마 의자를 빼버렸다. 엄마는 자기 음식과 함께 엉덩방아 찧었고 그 모습을 보고 아빠와 형과 남주는 즐겁게 웃었다.

엄마는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줏어 일어나야 했다,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이제 남주는 귀찮은 암컷 고양이를 우리에 가두고 자러 올라간다. 문득 생각하니, 이런 자기 정체를 미리 폭로해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회사 여직원, 여자 청소부 죄다 Cunt고

당연히 여주도 Cunt고 암튼 여자들은 다 Cunt다. 이렇게 남주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반성도 성찰도 없이 그냥 여성을 혐오하는 결론밖에 못 내고

그러니까 이 하루와 마찬가지로 모든 건 이미 늦었다.

이렇게 결론이 나는 소설임.



읽고나서 든 생각은


여주가 1982년 생인가?

작가는 1968년 생이던데.

과연 이 소설에 나온 남주가 지금 현실의 아일랜드 남성들, 혹은 그밖에 가부장적인 남성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일까?

이 소설은 비판과 풍자를 넘어 거의 현실 고발적인 적극성마저 느껴지는데

문제는.

그 비판, 풍자, 고발의 타겟은 현실이나

그 근거는 말 그대로 소설 속 주인공,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임.

과연 소설은 허구의 캐릭터로 현실의 수많은 개별적인 존재들을 전형화하고 일반화해서 단정할 수 있나?

왜냐면 이 소설은 사실 그렇게 하거든. 그리고 사실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음.


그러니까 그 허구의 인물을 통해 현실 속 수많은 개별자들이 하나로 묶여져서 문제시되는데

딱히 그 문제를 더 이상 파고들지 않음. 정말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고민한다기보다 그냥 아빠, 형보고 보고 배운 것임

그리고 정작 고민해야 할 당사자는 남자인데, 그 남자는 고민을 회피하기만 함.

소설 속 남자는 거의 생각 자체를 잘 안하는 것 같고, 그냥 결혼 안했으니 변기 시트 내리고 오줌 쌀 수 있어서 행복해하는 남자임.



물론 이 소설은 내가 요약한 것보다 뭔가 절제된 듯한, 담담한 듯한, 세련된 듯한 문장으로 솜씨 좋게 표현되어 있음.

그런데 그 절제된 담담한 세련된 포장 속 내용물은 내가 요약한 것 이상으로 노골적이고 아주 단순함.

그래서 이걸 과연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적인 잣대만을 놓고 볼 때도 나는 의문이 생김. 


왜냐면 좋은 소설은 일견 피상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현실의 숨겨진 복잡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은 요즘 유행하는 많은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그런 반대로, 그 반대가 정상인 것처럼 뻔뻔하게 가고 있음.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거의 프로파간다처럼 굴어서라도 뭔가 현실적으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의문임. 정말 현실의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남성들이 이런 소설을 읽고 회개할 거라고는 쉽게 그려지지는 않고

이미 이 소설의 논조와 결을 함께하는 사람들만 고개 끄덕이며 박수치겠지. 결국 현실에서 맨날 하는 거, 여자들은 남자는 저래, 라는 식으로 단순화하고

남자들은 여자는 저래, 라고 단순화해서 서로 나는 복잡하게 착한데 너는 단순하게 나쁘다며 비난하는, 서로의 단순무식한 갈등만 깊어지는 거 아닐까?


클레이 키건의 다른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소설만 한정해서 볼 때, 작가는 적어도 이보다 더 높은 작가적 야심, 목표를 추구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