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 전 빅슬립과 기나긴 이별을 박현주 번역으로 읽었더랬음.
그리고 지난해 틈틈이 필립말로 시리즈 여섯 작품을 원서로 읽어 봤었는데.
(Big Sleep - Farewell My Love - High Window - The Lady in the Lake - The Little Sister - The Long Goodbye)
그래서 오늘 투표도 했겠다, 필립말로 시리즈에 대한 글을 끄적여 보려다가
아,
문학동네 번역도 있었지, 궁금해져서 미리보기 앞에 몇 장 훑어보니 뭔가 마음에 걸려서 일단 짚고 넘어가기로 함.
번역자가 김진준이던데, 내 기억에는 이 분 번역한 롤리타를 역시 오래 전 읽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 번역도 내가 비교해 본 건 아니지만
이 책 '빅슬립'은 확실히 좀 실망스럽더라.
일단 시작 세 문단만 짚어보면
원문은 이런데
< It was about eleven o’clock in the morning, mid October, with the sun not shining and a look of hard wet rain in the clearness of the foothills. I was wearing my powder-blue suit, with dark blue shirt, tie and display handkerchief, black brogues, black wool socks with dark blue clocks on them. I was neat, clean, shaved and sober, and I didn’t care who knew it. I was everything the well-dressed private detective ought to be. I was calling on four million dollars.
The main hallway of the Sternwood place was two stories high. Over the entrance doors, which would have let in a troop of Indian elephants, there was a broad stained-glass panel showing a knight in dark armor rescuing a lady who was tied to a tree and didn’t have any clothes on but some very long and convenient hair. The knight had pushed the vizor of his helmet back to be sociable, and he was fiddling with the knots on the ropes that tied the lady to the tree and not getting anywhere. I stood there and thought that if I lived in the house, I would sooner or later have to climb up there and help him. He didn’t seem to be really trying.
There were French doors at the back of the hall, beyond them a wide sweep of emerald grass to a white garage, in front of which a slim dark young chauffeur in shiny black leggings was dusting a maroon Packard convertible. Beyond the garage were some decorative trees trimmed as carefully as poodle dogs. Beyond them a large greenhouse with a domed roof. Then more trees and beyond everything the solid, uneven, comfortable line of the foothills. >
김진준은 이렇게 옮겼음
< 10월 중순 어느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흐려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석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 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립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스턴우드 저택의 정문 현관은 2층 높이였다. 인도코끼리 한 무리도 거뜬히 들어갈 만한 대문 위에 널찍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있는데,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무에 묶인 여인을 구출하는 장면이다. 여인은 아주 길어 편리한 머리카락 말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기사는 예절바르게 투구의 면갑을 올려 얼굴을 드러내고서 여인을 나무에 묶어놓은 밧줄의 매듭을 만지작거리지만 진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내가 만약 이 집에 살았다면 머잖아 저 위로 올라가 기사를 도와줘야 했겠다고 생각했다. 기사는 진심으로 노력하는 기색조차 없다.
현관 저 너머에 미닫이 유리문이 있고, 그 너머에 드넓은 에메랄드 빛 잔디밭이 있고, 또 그 너머에는 흰색 차고가 있다. 차고 앞에서는 젊고 호리호리하고 가무잡잡한 운전사가 반들반들한 검은색 각반을 찬 채로 적갈색 패커드 컨버터블에 묻은 먼지를 떨었다. 차고 너머에는 푸들강아지처럼 정성껏 다듬은 관상수 몇 그루가 있다. 그 너머에는 둥근 지붕을 얹은 대형 온실이 있다. 그다음은 다시 나무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로 들쑥날쑥하지만 끊어진 곳 없이 늘어선 언덕들이 보기 좋았다. >
밑밥부터 깔겠는데, 나 영어 잘 못함. 외국 나가본 적 없고, 외국인이랑 대화도 안 해봤고, 근데 순수한 독자 입장으로 볼 때
이 번역은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필립 말로의 개성이나 챈들러의 스타일을 느끼기도 어려울 것 같음.
첫 문단부터 오역이 나오는데 and I didn’t care who knew it. 이걸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사실 번역서들 보면 첫 페이지는 좀 꼼꼼하게 해놓고 일단 팔아먹은 다음 중간부분 가면 좀 대충해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처음부터.
딴에 의역한답시고 맥락을 놓친 건가? 아니면 내가 뭘 놓친 건가?
하여튼 내가 판단하기로 이 세 문단 안에도, 불필요한 의역이 너무 많고, 그렇게 의역을 했는데도 그 결과가 필립말로의 개성과 챈들러의 스타일을 절반 이상 놓친다고 봄.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문단의 의역들은 독자 입장에서 공간 파악 자체를 헷갈리거나 오해하도록 유도함.
즉 두번째 문단 첫문장에서 Main hallway를 그냥 현관으로 의역하고, 세번째 문단 첫문장에서 French doors를 미닫이문으로 의역해버림.
참고로 Hall이란 게 우리 감각으로는 대충 거실 같은 거고, 그러니까 Hallway하면 그 거실로 이어지는 짧은 통로임. 근데 Main hallway가 어차피 Main hall이랑 붙어 있으니 그게 2층 높이라고 하면, 대충 현관 들어섰는데 거실이 2층 높이로 뚫려 있다, 그럼 영화에서 보듯 거실에서 막 계단으로 올라가고 2층 실내 발코니 나오는 부잣집 저택 그런 느낌인 거임.
하지만 김진준은 대뜸 현관이 2층 높이라고 해버리니, 독자 입장에서 첫문단과 이어져서 아, 주인공이 이제 밖에서 저택 현관 앞에 와서 그 현관문이 2층에다가 그 위에 스테인글라스 그림이 건물 밖을 바라보고 있는건가, 이렇게 착각할 가능성이 농후해짐.
게다가 세번째 문단 첫줄에서 French doors를 미닫이문이라고 해버리니. 원래 프렌치도어는 바닥서 천장까지 이어진 긴 창문이고 그래서 지금 주인공은 실내에서 메인홀 건너 프렌치 도어 유리를 통해 건물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건데. 이 모든 공간적 맥락이 뒤엉켜버리게 됨.
사실 필립 말로 소설을 우리 독자가 읽으면 가장 까다로운 게 그 공간묘사고 건축양식임. 왜냐면 우리나라에는 잘 없는 것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정확하게, 쉽게, 필요하면 각주를 동원해서라도 옮겨야 하는데 이 번역은 그렇지 않음.
직역하다가 이렇게 되었으면 모르겠는데, 이 세 문단에는 김진준의 자의적 의역이 언급한 것 말고도 상당히 많고 그 의역의 결과가 주로 원문의 맥락과 느낌을 살리지 못하거나 어지럽힌다고 봄. 비교를 위해서 박현주 번역을 대조해보고 싶었는데, 미리보기를 못찾아서 대충 내가 번역한 걸로 대조해 보기로 함.
< 시월 중순, 오전 열 한시 무렵. 해는 빛나지 않고 선명한 언덕자락은 거센 비가 곧 쏟아질 듯 했다. 나는 파우더블루 수트에 다크블루 셔츠 차림에 타이를 메고 가슴에 손수건을 꽂고 검정 브로그 신에 암청색 무늬 검정 울 양말을 신었다. 단정하고 깨끗하고, 면도도 했고 맨정신이었다. 그리고 누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잘 차려 입은 사립탐정 그 자체였다. 바야흐로 4백만 달러를 방문 중이었다.
스턴우드 저택 메인홀은 천장이 2층 높이였다. 인도 코끼리 부대도 들어올 법한 현관문 위로 스테인글라스 장식이 보였다. 갑옷 입은 흑기사가 긴 머리로 중요부위를 가린 것 빼면 옷 한 조각 없이 나무에 묶여 있는 레이디를 구출 중이었다. 흑기사는 사교적으로 투구 면갑을 젖히고 레이디의 밧줄 매듭을 꼼지락대고 있었지만 진전이 없었다. 내가 이 집에 살게 되면 조만간 저기부터 기어 올라가 그를 도와줘야지 생각했다. 그는 좀 건성인 것 같았다.
메인홀 건너편을 돌아보면 프렌치 도어가 있었다. 프렌치 도어 너머로 에메랄드색 드넓은 잔디가 흰 차고까지 펼쳐졌고, 그 앞 거뭇하고 늘씬한, 검정 레깅스 차림 젊은 운전사가 적갈색 패커드 컨버터블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 차고 너머에는 푸들마냥 꼼꼼하게 손질한 관상수들. 그 너머에는 돔형 지붕 커다란 온실이 있었다. 그리고 또 나무들 그리고 그 모든 것 너머에는 단단하고 울퉁불퉁하고 아늑한 언덕자락 능선들. >
물론 나도 의역이 있고 타협한 데가 있음. 내가 꼭 더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더 쉽고 내가 생각하는 말로나 챈들러의 스타일에 더 닮아 있다고, 솔직히 나는 생각함. 뭐 읽어보고 판단하면 될 듯.
둘 중 김진중이 끌려서 골랐는데 지금 반납하러 감
https://literarytranslationinkorea.blogspot.com/2020/09/blog-post_8.html
북스피어도 개판이니 새번역 나오기나 기도하자
첫 문단부터 오역은 좀 너무한데... 그나마 대체제가 있어서 다행
그거 대체제 아냐. 똑같이 개판임
https://literarytranslationinkorea.blogspot.com/2020/09/blog-post_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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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그건 오역임. 그리고 네가 좀 더 문학적이고 설명적인 글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챈들러는 막 문학적으로 점잖게 구구절절 설명하려는 스타일이 아님. 그래서 나는 그런 점에서 차라리 내가 번역한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또 공간에 대한 혼란을 주는 김진준의 의역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함. 메인홀이나 프렌치 도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밑에 각주를 다는 게 나았을 거임. 보니까 사람들이 유명 번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게 느껴지긴 함.
어떤 부분에서 반감이 드는 거임? 오늘 기나긴 이별 번역한 것도 좀 봤는데(김진준) 내가 볼 때, 김진준의 번역은 챈들러도 말로도 거의 느껴지지 않음. 원래의 개성을 거의 지워버린 듯한 인상임. 그리고 공간감에 대해선, 김진준은 메인홀웨이를 굳이 현관으로 번역하고 이후 또 프렌치도어를 미닫이 문이라고 해서 이게 저택 안에서 보는 건지 밖에서 보는 건지 헷갈리게 한 게 사실임. 나는 그걸 그냥 원문대로 메인홀, 프렌치도어라고 쓴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메인홀 저택 내부에서 프렌치도어의 긴 유리창으로 저택 외부를 바라보는 게 확연해지니까. 그냥 원문대로 간 거임.
니가 링크한 것도 읽어봤는데, 저 비판도 합당한 게 있지만 좀 무리하게 오역이라고 확정지은 것도 있음. 그에 반해, 나는 오역 그거 하나보다는 번역 전체척인 방향성이 원래 작품이 가진 캐릭터와 스타일을 옮겨내는가에 주목한 것임. 그리고 그건 솔직히 말해 원서를 읽어보고 각자 느끼면서 비교해야 확인이 되는 것도 사실임.
그래서 글 제목도 그렇고, 본문 내용도 그렇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생각과 의견을 밝힌거고, 근데 내가 그걸 고수하는게 못마땅한건가?
@ㅇㅇ 그래. 마침 실시간으로 댓글 주고받을 수 있어서 반갑긴 한데. 내가 번역한 건, 나도 아마 내 입장에서 착각한 게 있는듯. 왜냐면 난 사실 빅슬립은 원서로 두 번 읽었고, 그래서 원서 기준 내가 설명한 걸로 김진준 번역의 아쉬움을 토로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지리라 여겼는데. 사람들 입장에선 그냥 내가 번역한 걸 기준해 비교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요즘 내가 원서만 읽어서 한국어 감각이 무뎌졌나 생각도 들었음, 근데 내가 번역한 건, 상대적으로 덜 번역한 거임. 그러다보니 내 번역을 떠나서, 김진준 번역에서 느껴지는 건 챈들러나 말로가 아니고 그냥 김진준인데, 사람들이 거기 익숙해진건가 생각이 들었던 거임.
@ㅇㅇ 난 솔직히 오역 할 수도 있다고 봄. 그 실수로 전체 번역을 평가할 순 없다고 보고. 그리고 박현주 번역 경우는 오래 전 번역이니, 오역이 더 많을 수도 있겠지. 그땐 구글 번역 같은 게 없었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AI도 있고, 문학번역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그 문학적인 분위기를 가져오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함.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나는 김진준 번역이 너무 구구절절 설명하고 의역하는데 그 결과가 딱히 쉬워지지도 않고 오히려 다른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무엇보다 원래 소설의 분위기가 지워진다는 거임. 그게 내 감상이었고, 난 딱히 번역비평까지 하려고 한 건 아닌데, 뭐 니가 그렇게 받아들이겠다면 그건 어쩔 수 없고.
미닫이 유리문이라고 번역한 건 나쁘지 않아보이는데 - dc App
위대한개츠비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나오기도 했고 - dc App
내용엔 공감함. 나도 읽을 때 '현관 2층'이 무슨 말인가 순간 헷갈렸거든. 'French doors'는 왜 미닫이문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네. 저 책이 언제 나왔는진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나라에 '프랑스식 창'으로 많이 번역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확실히 프로번역가가 잘하긴 하네
기나긴 이별 김진준꺼는 읽으면서 전혀 이상함 못느꼈는데 빅슬립은 좀 별로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