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edf205bc8b1ef323ec8794459c7019be4f9ad1f51836cbb6225e32f60f6852d13ab77742a8045aeeae70ce65140dcfb90a26

7898867fc6f06ef523e8f7e0429c701e3c822904b3c25d039937c331c92ba40541759e93baae28b5929798af721d1ac84ee3f0822c

늦겨울과 봄을 지나 어느덧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달 만큼 많이 읽진 못했지만 이번달 동안 읽었던 책들이 모두 훌륭한 책들이라 한달 내내 알차고 즐겁게 독서했다. 또 개인적으로 이번달은 내게 굉장히 특별한데, 2022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책읽기를 시작하여 쌓인 권수가 드디어 100권을 돌파하여 뿌듯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 더 많은 책을 읽어가며 독서권수 200권을 달성할 수 있기를 기약하며 지난 한 달 동안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겠다.

1. 주기율표 (Il sistema periodico)

0fecf177bd826bf023ea84e4349c701e72633e8dcf48d11148ddc5037cafdf18bd0a0b617d62ba99803d51b0b28e0b505cc4e9e4

“인간의 고귀함, 수만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그 고귀함은 물질을 정복하는 데 있으며, 내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물질을 정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요 몇 주 동안 힘들게 풀이법을 배워온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 · 고등학교에서 소화해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 주기율표 中 -

토리노 태생의 유대계 이탈리아인 화학자이자 세계적인 작가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 - 1987)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주기율표를 읽어봤다. 내가 이책을 찾아 읽게 된데는 사소하면서도 우연한 계기가 있었는데, 좋은 책을 찾아 독갤 념글을 탐방하던 중 어떤 게시글에서 프리모 레비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고 본작인 주기율표를 꼽은 내용을 발견했다. 일단 작가의 특이한 이름이 뇌리에 박혔고, 이름보다 더 특이한 작가의 이력에 흥미가 생겨서 이책을 구해서 읽어봤다.

본작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기율표에 있는 원소와 관련이 있는 작가의 개인사나 일화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테면 활동량이 적으면서 수도 적은 비활성 기체 중에서도 유독 비중이 큰 원소인 아르곤이 작가의 민족인 유대인의 특성과 닮았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피에몬테에서 터잡고 살던 유대인 공동체의 풍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외에도 작가가 1920-30년대 이탈리아를 호령한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에 시달리며 방황했던 젊은 시절, 제2차 세계대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일, 화학자로서의 소명의식이 드러나는 명상록, 작가로서 작문해본 단편소설 등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들이 책에 엮여있다.

또 작가의 문체도 번역을 통해서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성이 잘 드러나있다. 프리모 레비 본인이 원체 다독가이기도 하고, 예술적인 감각도 있는 사람이다 보니 이공계 사람들은 글을 딱딱하게 쓰는 편이라는 편견을 확실히 깨줄 정도로 아름답고 은은한 감수성이 묻어난다. 또 학자답게 제법 현학적이면서도 긴 호흡에 문장을 구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도 다양한 독자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 모양인지 적당히 어렵지 않는 선에서 글을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엄연히 과학을 사랑하고 작가로 활동함과 동시에 화학 공장 감독을 맡았던 화학자니만큼, 여타 문학가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이과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담이나 사견들을 마치 실험을 하고 있는 과학자처럼 최대한 관찰자 입장의 시점에서 차분히 묘사하는 편이다. 그덕에 책을 읽으면서 막연히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소재를 이해하기 쉬우면서 깊이가 있고 글 전반에서 학구적인 인상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내 사견과 함께 책에 대한 총평을 남기자면, 이책은 단순한 자서전, 명상록을 넘어서 종합 예술에 가깝다. 이책을 통해 독자는 프리모 레비의 여러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항상 탐구심에 젖어 진리를 연구하는 화학자 레비, 단지 주류 이탈리아인과 다른 문화와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유대인 레비, 광기의 시대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던 역사의 피해자 레비, 기발한 상상력과 재기 넘치는 문장력, 그리고 심오한 사유를 할 줄 아는 작가 레비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사자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담담하면서도 총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 꽤나 감탄하였다. 작가가 화학자인 관계로 책의 상당수 내용이 화학 실험이라서 다소 생소할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게 담아낸 걸작인 만큼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2. 제5도살장 (Slaughterhouse-Five)

7aef8105c4f06df423ec8ee2349c706ef25c4679566c528143609cb4ac9497e22d630e8cdb54fdd6fef335867bae6e2ca132c8ce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중에서 빌리 필그림이 바꿀 수 없는 것으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었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always to tell the difference. Among the things Billy Pilgrim could not change were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ㅣ

- 제5도살장 中 -

미국의 소설가이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과 SF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1922 - 2007)의 대표작인 반전(反戰) 장편소설 제5도살장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원래 보니것이라는 작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독서 경력이 길어지면서 좋은 책을 찾던 중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독특한 외모만큼이나 작품 세계가 남다르다는 평가가 있어 호기심이 동했었는데, 어느날 서점 나들이를 하던 중 이책이 눈에 밟혀서 사놓고 책장에 묵혀두다가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이책은 빌리 필그림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검안사가 난데없이 시간여행도 하고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에 사는 외계인에게 납치됐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간여행이라고 하면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꾸는 류의 이야기가 보통 연상되지만, 본작에서 주인공이 겪는 시간여행은 결이 다르다. 본작에서 시간여행은 무작위로 단발적으로 이뤄지다보니 빌리 필그림은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느것도 바꾸지 못하고 극단적인 운명론자처럼 자신에게 다가올 일을 무력하게 관조하기만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3인칭 전지적 시점의 화자인 작가도 작중 사람이 죽을 때마다 '뭐 그런 거지.(So it goes.)'라며 시니컬하게 대꾸한다. 이처럼 작품 내내 스며들어 있는 냉소적인 분위기는 빌리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전쟁포로로 끌려가고, 드레스덴에 있던 포로수용소에서 괴멸적인 대공습을 목격했던 작가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의 영향이 지대하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점을 꼽자면 이야기 자체는 절망적이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문체나 분위기는 꽤나 유머러스하다. 작품 서두에 언급되듯 전쟁의 참혹함을 전달하는 반전(反戰)소설을 표방하면서 왜 안어울리게 유머 코드가 들어갔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작가는 유머 코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이야기가 너무 무겁지 않게 완급 조절을 하면서도 전쟁과 인생에서 마주하는 부조리함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영광스러운 위업으로 포장되곤 하는 전쟁의 섬뜩한 이면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이처럼 전장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며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토대로 작가는 자신의 재기 넘치는 유머 감각과 실험적인 문학 기법을 가미하여 문학사에 길이남을 걸작을 탄생시켰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상술했던 특징 덕분에 작품 자체가 맛이 좀 가있단 느낌이 좀 들었는데, 이렇게 광기 어린 작품이 마냥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니고 오히려 절망의 연속으로 가득찬 삶 속에서 희극은 정신줄을 부여잡게 만드는 훌륭한 방어기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던 것 같아 꽤나 만족스러웠다. 다만 무작위로 이뤄지는 시간여행을 다룬 이야기 만큼 서사가 난잡한 편이고 블랙 코미디풍의 분위기로 인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고 이야기 자체가 재밌는 만큼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3. 개인적인 체험 (個人的な体験)

7cea8172b08369f223e682e3309c701c63bc9152c3a17f18edace09d2bd9e221dba8b543dfb4e4c24eb3a0e8aff9df702518c297

“내 경험으로는 인간에 관한 한 완전히 불모인 고통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버드. (…) 그리고 힘든 동안에는 이렇게 불모의, 헛된 노이로제는 없으리라 생각했었고. 하지만 거기서 회복되고 나서는 역시 효과가 있더라고, 버드.”

- 개인적인 체험 中 -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고령의 나이까지도 반전(反戰), 반핵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본을 보였던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1934 - 2023)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장편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읽어봤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통해 일문학에 입문하고서부터 저는 줄곧 괜찮은 일문학 작가가 누가 있을지 찾아다녔었는데, 전후 일본 문단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대작가였던 오에가 가장 끌렸다. 다만 그가 구사하는 문장이 길고 난해하다는 평이 있어 도전을 주저하다가, 상대적으로 문장이 절제된 그의 초기작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본작을 입문작으로 삼아 읽어봤다. 

이책은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버드‘라는 별명의 강사가 결혼 이후 첫 아이로 덜컥 뇌 헤르니아 진단을 받은 기형아를 얻게 되면서 겪는 고뇌를 다루고 있다. 안 그래도 버드는 작중에서 부양할 처자식이 있으면서 아프리카로 덜컥 여행을 떠날 날을 꿈꾸는 현실도피적인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끔찍한 몰골을 한데다 장차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는다는 소견까지 받은 기형아를 아기를 받아 들면서 그는 술과 전 여자친구였던 히미코와의 정사에 푹빠져 현실은 외면한 채 아기가 쇠약해서 죽기만을 기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버드는 아무리 기형아로 태어났어도 아기를 죽일 궁리만 하는 자기자신에게 구역질을 느끼며 끝없이 번민한다. 

이렇게 충격적인 스토리라인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작가 본인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다. 오에도 장남인 히카리를 득남했을 때 뇌 헤르니아 진단을 받아서 두개골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영향으로 아들이 지적장애를 갖게 되어 아버지인 작가도 육아를 하며 적잖은 고생을 했다. 평생 장애를 이고 가게 되는 아들을 얻게 되면서 작가 본인이 느꼈던 절망감도 이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오에는 포기하지 않고 금지옥엽으로 히카리를 양육하며 그를 작곡가로서 자립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책은 그것보다 훨씬 오래전인 1964년에 출간되었지만 절망에 사로잡혀 현실도피만을 일삼던 버드가 점차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기만을 그만두게 된다는 점에서 이미 오에가 어떻게 일생의 난관을 극복해내었는지 그 실마리가 보였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점을 꼽자면 바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인 수치심이다. 작중에서 수치심은 구토, 구역질로 은유되기도 하는데, 버드가 암담한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할때마다 그에게 닥쳐오는 수치심은 끝없는 불안감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주인공이 생각에 끈을 놓지 않고 부단히 고찰하게 한다. 다소 비약적인 논리일 수도 있지만, 본작에서 엿보이는 수치심에 대한 시선을 통해 왜 오에 겐자부로가 광기와 살육으로 점철되었던 자국의 근현대사를 부끄러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일본 제국주의 피해국에게 사과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왔는지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끝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오에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평이 있어 어느 정도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책에 적힌 길고 복잡한 문장을 읽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경묘사와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현란하게 오가며 세심하고 아름답게 직조된 문장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고, 왜 오에가 전후 일본 최고의 문학가로 꼽히는지 알 수 있었다. 전술하였듯이 작품 자체가 난해한데다가 제법 외설적인 묘사도 있어 가볍게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난이도를 개의치 않고 최고의 작품을 찾아다니는 독자들에게는 이책을 한 번 읽어볼 것을 적극 권장한다.

4. 닫힌 방 · 악마와 선한 신 (Huis Clos · Le Diable et le Bon Dieu)

7de48170b78460f723eff2ec359c70195a338c59a7dd15743479b680461e29b08eea74094adb400636a96d3b127810c5eacf24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닫힌 방 中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평론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로 추앙받는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 - 1980)의 희곡인 닫힌 방과 악마와 선한 신을 읽어봤다. 내가 작가로서의 사르트르를 처음 접한 작품은 작년에 읽었던 장편소설 구토(La Nausée)였다. 사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던 책이다보니 읽는 게 쉽지 않았지만, 작가의 섬세한 필치와 통찰력을 엿볼 수 있던 책이었어서 그의 다른 저작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르트르의 철학책인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 도전해볼까 했다가 난이도도 그렇고 분량도 부담되서 대신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그의 대표 희곡선집을 읽어봤다.

첫번째 작품인 닫힌 방은 각자 다른 이유로 죽은 가르생, 이네스, 에스텔 세 사람이 프랑스 제2제정풍의 방의 모양을 한 기옥에 갇혀 영겁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옥에 와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통념대로 지옥불과 끔찍한 고문이 닥쳐올 거라 예상했지만 그냥 육중한 청동상이랑 소파 3개만 있는 광경을 보고 안심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각자가 부끄러운 과거사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고는 서로의 치부를 똑똑히 보려하고, 또 그 치부가 남들에게 보여지는 걸 의식하면서 끝없는 불안에 빠진다. 끊임없는 타자화의 굴레를 지옥으로 묘사하는 점에서 왜 사람들이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지 명쾌히 알 수 있었다.

두번째 작품인 악마와 선한 신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벌어졌던 독일 농민전쟁을 배경으로 활약헸던 허구의 장군인 괴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서자 출신의 제후로 절대 악을 실현하겠다는 집념에 빠져 이복 형인 콘라드를 배신했고, 점령하는 곳마다 학살을 일삼아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렇게 보름스라는 마을도 점령하고자 포위하던 중 그가 절대악을 향한 집념을 조롱하는 신부 하인리히와 가난한 사람들을 단결시켜 독일을 지배하는 귀족과 성직자 계급을 타도하려는 농민군 지도자 나스티를 만나면서 괴츠는 큰 심경에 변화를 겪게 되면서 반대로 절대 선을 실행해보려는 오기가 생겨 벌어지는 이야기가 본작의 주요 스토리라인이다. 작가는 절대악 또는 절대선 같이 극단적이면서도 완벽해보이는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허망함만을 느낀 채 방황하는 괴츠를 보여주며 일견 완벽해보이는 한가지 명제에만 사로잡혀 정체되는 게 얼마나 무용하고 비인간적인 일인지 역설한다. 작가의 철학적 저작에서 나오는 개념을 차용하자면 사물과 같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 정체된 본질만을 담고 있는 즉자적 존재보다도 경험을 통한 의식을 통해 본질을 바꿔가며 나아가는 대자적 존재가 더 인간적인 삶이라는 걸 강조한다.

끝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자면, 나는 여태까지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다소 고리타분한 사상가로서의 인식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철학자로서의 사르트르가 아닌 이야기꾼으로서의 사르트르를 보게 되었다. 물론 사르트르의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편이 작품을 더 깊게 감상할 수 있겠지만, 본 작품들은 그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서사 자체에 생동감이 있어서 꽤나 재밌게 읽었다. 특히 악마와 선한 신의 경우에는 각자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이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끌고 다녀서 매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빨려 들어 읽었던 것 같다. 사르트르라는 이름에서 너무 무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깊은 사유에 서사적인 재미까지 충분히 겸비하고 있는데다 책 말미에 친절한 해설까지 있으므로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