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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데커드는 외친다.

「오레와... 혼모노가 호시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이것은 그런 이야기다.


데미안, 니체와 함께 제목만은 끝없이 오마쥬되는 그 작품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이하 '전기양')을 읽었다.


좀 읽고나서 오마쥬 해라 이 놈들아.




SF 조상님인 이 소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기도 하다. (1982년 작)


사실 난 영화는 안봤다. 원작과는 내용이 꽤 다르다고 한다.



소설 장르는 SF배경의 하드보일드 형사물이다.


짱쎄고 짱똑똑한 하드보일드 주인공이 안드로이드(앤디)들을 죄다 처 죽여버리는 내용이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봐도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읽다보면 분명 후반부에 '이건 뭐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현학적인 장면이 나와서...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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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지구는 반쯤 망함.


대충 화성에 사람들이 이주함.


동물들도 다 멸종하고, 노예 안드로이드는 화성에서 탈출해서 지구로 돌아옴.


그리고 주인공은 그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외친다.


「오레와... 혼모노가 호시이!」


주인공에게는 가짜 양이 있다. 진짜 양과 똑같은 가짜 양이다.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의 기분마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분 조절기'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기술의 발전은 거의 완벽하게 동물과 사람을 복제한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짜' 동물, 즉 살아있는 생명체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해져, 진짜 동물을 소유하는 것이 부와 사회적 지위를 넘어 도덕성의 척도로까지 여겨진다.


생태학적 파괴로 인한 극도의 희소성과 인공물에 대한 반작용, 그리고 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을 인간성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강화시킨다.


동물 살해에 대한 극도의 민감성은 안드로이드를 판별하는 '공감 능력 테스트'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며,


이는 파괴된 세계에서 인간성을 확인하고 과거의 파괴에 대해 속죄하려는 집단적인 의식의 발현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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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초반. 이야기의 초반, 현상금 사냥꾼인 릭 데커드는 자신이 기르는 전기양에 만족하지 못하고 진짜 동물을 갈망한다.


그에게 전기 동물은 교감할 수 없는, 감정이 부재한 가짜일 뿐이며, 이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그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데커드에게 안드로이드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그것(it)'에 불과하며, 그는 안드로이드 제거 임무를 통해 얻는 현상금으로 진짜 동물을 사려는 목표 의식이 뚜렷하다.


이 시점에서 그는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데커드의 신념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매력적인 안드로이드 '레이철'과의 만남, 심지어 그녀와의 야스는 그에게 깊은 혼란을 야기한다.


오페라 가수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가 보여주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는지, 그들에게도 내면세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만든다.


또한 동료 현상금 사냥꾼인 필 레쉬(반쯤 싸패.)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 역시 안드로이드만큼이나 공감 능력이 결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하는 척도인 '공감'의 절대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안드로이드인지, 그 경계는 점차 모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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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 경계의 모호함은 주인공에게마저 적용된다.


(가짜)경찰서씬이 특히 그러하다.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는 설정.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안드로이드의 존재가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킨다.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는가?"


"만약 내가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면, 나는 인간이 아닌가?"



이런 질문들은 '인간다움'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도구화된 존재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쓸모가 없어지거나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폐기'된다.


이러한 폭력성과 비인간성은 안드로이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도 자행할 수 있는 것이라는 암시를 통해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는 더욱 흐려진다.


작가는 지능적으로 우월해 보이는 안드로이드가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조차 보이지 않는 반면, 사회적으로 '결함 있는' 존재로 취급받는 존 이지도어가 오히려 (때로는 과할 정도로) 인간적인 공감 능력을 보이는 아이러니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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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공감이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인간의 조건은 공감이다.


작품 속 '머서교'는 매우 독특한 종교 형태를 띤다.


신도들은 '공감 상자'라는 장치를 통해 윌버 머서라는 노인이 언덕을 오르다 돌을 맞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함께 체험하며 정서적 일체감을 느낀다.


이는 황폐해지고 개인이 극도로 고립된 소설 속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근본적인 외로움과 단절감을 해소하고, 타인과의 연결과 공감을 갈망하는 인간 본성을 상징한다.




초반 주인공은 이런 머서교에 큰 관심이 없다. 외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나가는 나이롱 신자다.


그에게 공감은 안드로이드를 판별하는 기준일 뿐이다.


안드로이드에게(혹은 안드로이드가) 공감을 느낀다고? 미친소리.


그는 그렇게 일축하며 안드로이드를 죽여나가지만, 야스를 한번 하고 난 후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조금 더 복잡하게 묘사되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자.)




특히 데커드가 큰돈을 들여 구매한 진짜 염소가 죽어버렸을 때. 그 혼란은 극에 달한다.


진짜 염소는 그에게 단순한 동물을 넘어 '진짜 생명'에 대한 갈망, 인간성 회복의 소망을 상징한다.


그는 진짜 생명과의 교감을 통해 직업적 스트레스와 안드로이드에 대한 내적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염소를 죽는다.


염소의 죽음은 너무나 간단하고 건조하게 묘사된다.


마치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토록 갈망하던 '진짜' 생명이 이토록 허무하고 취약하게 사라질 수 있다니?


데커드는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의 일시성과 불안정성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데커드는 머서와의 인생 처음으로의 교감을 통해 고통과 연대의 감정을 체험한다.


(특히 공감 기계가 있어야만 발휘할 수 있는 머서와의 교감을, 기계 없이도 해내버린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그가 느끼는 연민의 대상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안드로이드나 기계양에게도 공감할 수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 그가 우연히 발견한 두꺼비가 전기 두꺼비, 즉 가짜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담아 기르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그의 중요한 심경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대상에 애정을 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그 자체임을 깨달았음을 시사한다.


생명의 본질은 반드시 유기적인 '진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감정을 통해 창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편, 레이철이 자신과 똑같은 다른 모델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안드로이드임을 인정하게 되는 장면도, 정체성이란 타자와의 관계 및 사회적 비교를 통해 형성되는 상대적인 개념임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행동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온갖 똥꼬.쇼 끝에 깨달은 것. 기계에 대한 공감능력을, '닭대가리' 이지도어는 처음부터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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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다시 슈퍼스타의 짤로 돌아와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인간과 안드로이드, 진짜와 가짜, 생명과 무생물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물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한편으로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구분이 모호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 학대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하는 듯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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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안드로이드라는 개념을 구상할 때, 나치를 참조했다.


감정은 있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족한 안드로이드는 나치와 같다는 것이다.


그럼 의문이 하나 생긴다.


주인공은 나치에게도 공감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나치는 공감능력이 없는 인간들을 말한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하라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인가?


나는 이 부분이 모호하게 쓰여졌다고 느꼈다...



결국 작가는 답을 내리지 않은 것이다.


독자들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공감이란 과연 인간만의 특권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며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깊은 사유의 공간을 남긴다.


결국, 이 소설은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미래 사회를 통해 우리 시대의 인간성과 생명의 가치에 대해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세계에서 오히려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할 수 있는,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의 시초를 맛본 느낌을 받았다.


여러모로 흥미롭긴 한 책이었따따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