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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4권에 거친 대장정이 끝났다. 이것으로 내가 읽은 소설 중 최고 분량을 경신했다. 완독 후에 느끼는 뿌듯함을 배제하더라도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사를 잘 모르는 내가 「전쟁과 평화」를 올바르게 해석했을지는 의심해봐야겠지만, 적어도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인생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얻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큰 소득을 거둔 것만 같다.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은 이미 3권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4권에서 톨스토이는 더욱 과감한 논조로 독자들을 가르친다. 톨스토이는 결국 세계사는 세계에(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초월적인 신에게) 달린 일이지 영웅이나 위인 개개인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나폴레옹이든 쿠투조프든 그들 각각의 의지가 전황을 바꿀 수는 없다. 결국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의 상황들이 겹쳐져야 하고, 명령을 따르는 자들의 상황들이 받쳐줘야 한다.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몇몇 위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편협하고 오만한 견해다. 당장 실제 전장에서 영웅이 명석한 판단만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마저도 명령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역사에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그 주인공으로 보이는 권력자들에게 걸려 있는 수많은 고리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운명이 고리처럼 얽혀 있는 것을 느꼈다. 한 달 전에 「전쟁과 평화」를 읽었더라면 나는 톨스토이의 훈계를 고리타분한 소리로 받아들이고 대충 읽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공교롭게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며 「전쟁과 평화」를 동시에 읽으니 톨스토이의 견해에 공감하게 됐다. 신과 세계에 관한 스피노자의 철학은 톨스토이의 역사 철학과 닮은 면이 있다. 특히 신 이외의 자유로운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둘의 차이 또한 크다. 사실 둘에게 있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 우리는 자유로운 의지로 행동을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맥락이 있다. 그리고 그 맥락은 무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한한 고리들을 몇몇 사건, 혹은 몇몇 사람으로 요약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이성에 한계 때문에 그런 편리한 실수를 피할 수는 없게 되지만. 결국 소설 속 주인공에게도 모든 것이 자기 의지대로 풀리는 행복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 의지를 발하기까지의 상황, 그리고 그 의지를 실현하는 과정, 그리고 그 의지와 얽힌 다른 의지들에 의해 세계는 한 사람이 감히 종잡을 수 없는 흐름으로 변화한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권력이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계의 정점에 서도 자신의 발밑에 흐르는 물의 흐름을 어쩔 수는 없는 법이다.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에 대한 감상은 마치고, 이제 줄거리에 대해 말할 차례다. 실제 역사대로 나폴레옹은 참패했다. 「전쟁과 평화」도 결국 픽션이기에 완전히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톨스토이가 집필을 위해 참고한 방대한 정보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객관적이라고 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평화」 속 군대들은 러시아군이건 프랑스군이건 말도 안 되는 오합지졸처럼 보인다. 나폴레옹은 자존감에 비해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고, 쿠투조프는 능력에 비해 희한하게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개인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생각났다). 애초부터 전쟁은 두 사람이 아니라, 그 아래의 사람들의 '의지의 총합'이 결정하도록 돼있었다. 국토를 수호하고자 하는 간절함과 더불어, 그 의지를 승기로 이어지게 만든 우연들의 조화가 승리를 필연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려는 소모적인 추격전은 간절함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의지들을 한곳으로 모아야 승리의 조건이 갖춰지지만, 그마저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의지들을 강제로 모아 무언가를 해내려는 사람이 아니라, 의지들이 모인 곳을 찾아 적절한 곳으로 옮겨내는 사람이다. 딱 하나, 1812년의 전쟁에서 쿠투조프가 나폴레옹보다 나은 점 딱 하나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곧 러시아에 손실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 역사로 치면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유일한 적수라 여기던 바그라티온이 전사했다. 픽션으로서는 안드레이와 페탸가 세상을 떠났다. 안드레이는 두 번이나 부활했건만 결국 꺾이고 말았다. 그래도 마지막에 나타샤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깨달음을 얻었던 점은 다행이다. "사랑은 죽음을 방해한다. 사랑은 생명이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사랑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은 신이고, 따라서 죽음은 사랑의 일부인 내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안드레이가 최후에 남긴 독백으로, 나는 마지막 문장을 제외하면 동의한다. 잔혹한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사람이 살아갈 이유를 제공한다. 인연이 있어 세상이 소중한 것이다. 단, 삶을 사랑하는 것과 죽음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안드레이의 말처럼 회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중한 인연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철학과 신앙으로 미화할 수 없는 슬픈 일이다. 인연이 이어지는 한, 어떻게든 세상사를 악착같이 버텨낼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안드레이가 정신력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페탸가 죽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사실 시작부터 불길하기는 했지만,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보면 가장 그럴듯한 죽음이기는 하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연명하는 안드레이의 경우가 오히려 특이한 편이다. 하지만 준비 없는 이별은 가능성과 별개로 늘 고통스럽다. 어떤 의도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든, 전쟁은 정말로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임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피예르는 「전쟁과 평화」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4권까지 읽고 나니 이 소설의 근본적인 분류는 역사 소설이겠지만 피예르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교양 소설로 봐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4권에서 그는 멘토를 만났다. 이름은 플라톤이지만 이미지는 묘하게 디오게네스가 떠오르게 만든다. 플라톤은 소박하고, 포로 생활에도 적응한 것을 넘어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플라톤에게 아무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름과 달리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두드러지려는 욕심 없이, 자신의 삶보다 더 큰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행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우리의 행복이란, 친구여, 그물 속 물 같은 거라서 잡아당길 때는 가득차 있지만, 올려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겁니다." 플라톤은 단지 하루하루를 소탈하게 살아간다. 행복한 삶을 목표로 두고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보고 그 안에서 행복을 뽑아내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는 전부 그 자신조차 알 수 없는 활동의 발로였고,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그의 삶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듯 하나의 독립된 삶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가 언제나 느끼고 있었듯 전체의 일부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마치 꽃에서 향기가 풍겨나듯 균일하고 필연적으로, 또한 직접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개별적으로 취해진 행위와 말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플라톤도 결국 피예르의 곁을 영영 떠나고 만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플라톤의 말을 듣고 인생을 돌아본다. 그는 평생 자유를 좇았지만 항상 내면에서 우러나는 한계를 느꼈다.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항상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피예르는 이제 그 이유를 안다. "인간이란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 행복은 자신 안에, 즉 자연스러운 인간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불행은 부족보다 과잉에서 생긴다는 것을 이성이 아닌 자기 전 존재, 자기 삶을 통해 깨달았다." 묘하게 쇼펜하우어가 떠오르는 문구다. 결국 어떤 것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때 사람은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 피예르는 행복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지만, 결국 행복을 탐했기 때문에 매번 잘못된 길로 새어나갔던 것이다. 행복해지자는 생각을 품고 삶을 잡아끄는 것보다, 무던히 삶의 흐름을 타고 표류하며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을 쏟아주는 일이 진정한 행복으로 향하는 왕도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어떤 영웅의 삶보다도 훌륭한 삶이다. 피예르는 이 깨달음과 함께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 독자로서도 뿌듯해지는 변화였다.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하지. 선을 사랑하는 자는 서로 손을 잡아라, 실천적인 선을 유일한 기치로 세워라. 나는 다만 위대한 결과를 낳는 사상은 모두 항상 단순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 내 사상의 요점은, 악한 인간들이 하나로 결합한다면 정직한 인간도 그와 똑같이 해야 한다는 거야. 참으로 단순하지." 피예르가 에필로그에서 남긴 말이다. 이 단순하지만 선명한 규칙을 나도 기억해두어야겠다.
니콜라이의 행로는 내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니콜라이가 내심 소냐와 이어지기를 바랐다. 「전쟁과 평화」 속 소냐는 「죄와 벌」 속 소냐처럼 성녀다. "나는 내가 큰 은혜를 입고 있는 가정의 슬픔과 불화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내 사랑의 목적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뿐이며, 그러니 니콜라, 부탁합니다. 부디 당신 자신을 자유로운 몸이라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의 소냐보다 더 열렬히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아,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편지다. 사랑하는 사람이 현실과 타협하도록, 자신의 사랑에서 해방되도록 희생하다니… 사실 내 감성으로는 너무 가혹한 처사로 보인다. 소냐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쇠락해가는 집안의 더부살이라는 처지가 갖는 무게감이란 열렬한 사랑으로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니콜라이가 마리야와 잘 지내기나 한다면 아쉽지도 않을 텐데, 집안을 바로세우느라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쳐도 마리야에게 너무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 같아서 더 안쓰러웠다. 그래도 자녀들에게 선함을 불어넣으려는 마리야의 노력이 니콜라이에게 닿은 것 같으니 굳이 그 이상으로 비관하지는 않으려 한다. 먼저 긍정적인 변화를 체험한 피예르가 니콜라이의 곁에 있으니, 그도 점점 닮아가리라 믿는다.
1812년의 전쟁은 끝났지만 사회의 격동은 멈추지 않는다. 너무 많은 것이 삽시간에 달라지는 사회에서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삶을 관통하는 가르침이 있으니, 무욕과 사랑이다. 탐욕보다는 만족을, 대가를 바라는 행동보다 대가 없이 베푸는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살면,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의 내면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단순함, 선함, 정의가 없는 곳에는 위대함도 있을 수 없다." 기나긴 「전쟁과 평화」를 마무리 짓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안드레이의 아들 니콜렌카다. 니콜렌카는 어른들의 선한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리라 맹세한다. 그의 앞길이 순탄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들을 뒤따라 걷는다면, 니콜렌카 또한 「전쟁과 평화」 속 다른 주역들만큼 여정을 멋지게 마무리 지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길을 걸으려 노력해야겠다. 우선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마음을 고쳐나가야겠다.
멋진 리뷰입니다! 혹시 어떤 역본으로 읽으셨는지요? - dc App
감사합니다. 문학동네(박형규 역) 판본으로 읽었습니다.
@루너 고맙습니다 이번 기회에 재독해봐야겠습니다. - dc App
에필로그2편 ㅈㄴ 어렵던데
3권 읽는중 존나 재밋게 일고 있음 - dc App
너 독후감 잘 쓰는구나? 다음 책 톨스토이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