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한 국가나 몇몇 국가, 또는 오랜 세월이 그 책속에 담긴 것은 하나같이 사려 깊고, 운명적이며, 우주처럼 심오하고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읽기로 결정한 그런 책이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읽기로 결정한 책은 다양할 수 있다.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에게는 『파우스트』가 천재적인 작품이나 다른 이들에게는 밀턴의 「복락원」이나 라블레의 작품처럼 그저 진부한 책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욥기와 신곡, 맥베스 같은 작품들은(내 경우에는 북부의 몇몇 '사가'들도 그렇지만) 불멸을 약속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연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선호는 얼마든지 미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난 우상을 타파하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이 서른 무렵,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영향 아래서 미라는 것이 몇몇 소수 작가의 특권이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아름다움이 모두의 것이며 우연히 뒤적이던 책 어느 페이지나 길거리에서 나누는 대화 속에도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말레이시아어와 헝가리어를 전혀 모르지만, 만일 연구의 기회가 허락된다면 이 두 언어에서도 영혼이 희구하는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언어적 울타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서로 넘나든다. 번스는 스코틀랜드에서는 고전이지만, 트위드강 이남에서는 던바나 스티븐슨보다 인기가 못하다. 결국 한 시인의 영광은 적막한 도서관에서 그 책을 접하는 각 세대 익명의 독자들이 느끼는 감흥과 무감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문학이 야기하는 감정들은 아마도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점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해도 그 방법에 끝없이 변화가 가해져야 한다. 독자가 그 방법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 방법의 효과는 감소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고전 작품이 존재한다고 하거나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정의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예술과 자신의 작품들에 회의적 감정을 갖는다. 볼테르나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지속될 것임을 의심하는 일을 포기해 버린 나는 이제 (1965년 말의 어느 날 오후) 쇼펜하우어와 버클리의 명성이 지속될 것임도 믿는다.
(다시 말하거니와) 고전은 무슨 대단한 장점을 가진 책이 아니다. 그것은 각 세대의 사람들이 온갖 이유 때문에 넘치는 열의와 알 수 없는 공경심을 갖고 읽게 되는 그런 책이다
- dc official App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