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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서사라는 것이 정보를 감추고, 속이고, 반만 드러냄으로써 작품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베니스의 상인"에 있어서는 꼭 집고 넘어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품의 시작부터 안토니오는 알 수 없는 우울감을 밝히는데, 반면 그 원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안토니오가 전반적으로 과묵한 인물이기는 합니다만, 2막 후반부 스스로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애절했던 안토니오와 밧사니오의 이별 장면마저 대충 조연의 입을 빌려 서술되는 것에만 미칩니다. 여기서 혹자는 안토니오가 사실은 동성애자였니 하는 해석을 늘어놓습니다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성적 기호가 아닌, 바로 그가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이, 작품의 제목부터 "베니스의 상인"이면서 안토니오의 등장은 너무 드뭅니다. 되려, 밧사니오와 포오샤가 진주인공의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아우르는 핵심 소재가 '사랑'임에도 안토니오는 그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모두가 사랑을 위해 벨몬트로 떠나고 자신은 혼자 베니스의 남은 채, 본인의 최후를 그저 체념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납니다. 이런 모습은 또 다른 아웃사이더, 샤일록과 너무나도 공명합니다. 안토니오가 선인의 겉모습 아래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다면, 샤일록은 악인의 겉모습 아래 불타는 분노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안토니오가 체념의 정서를 보여준다면, 샤일록은 투쟁의 정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둘 모두 너무나 고독합니다. 그저 안토니오는 말 없는 외톨이이고, 샤일록은 말 많은 외톨이일 뿐입니다.
샤일록의 이런 특징은 이미 첫 등장에서부터 드러납니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1막 3장, 샤일록의 대사는 끊임없는 반복입니다. (샤일록이라는 캐릭터가 가장 빛나는 3막 1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점은, 말 많은 샤일록은 결국 말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포오샤에게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4막 샤일록과 포오샤의 대담은 딱딱한 말투와 재치 있는 말투의 맞부딪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샤일록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비단 작품 전체에 뚜렷한 반유대 정서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에게는 오히려 말 많은 기독교인, 그라치아노의 으스댐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패배한 샤일록의 옆에 계속해서 악담을 퍼붓는 모습은 마치 자기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주변사람 능력만 믿고 우쭐거리는 행태를 보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그라치아노의 대사는 거의 의도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재치가 모자랍니다.) 뒤이어 5막, 작품의 맨 마지막에서 계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승리를 얻은 주인공들이 자기들끼리의 계약은 대충 융통성 있게 넘어가는 모습은 상당한 불편함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해야 할 인물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말 없는 유대인, 제시카입니다. 사실상 여성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꽉 쥐고 있다 해도 무방한 이 작품에서 제시카는 (마치 안토니오처럼) 말이 너무도 없고 등장이 너무도 드뭅니다. 본디 로렌조와 제시카는 기독인과 유대인의 화합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한 쪽이 다른 쪽으로 개종을 함으로써 합쳐졌고, 그럼에도 다른 이들은 제시카를 여전히 이교도라고 부릅니다. 5막에서 이 둘은 굉장히 로맨틱한 장면을 보여주지만, 이마저도 다른 주연들이 다시 등장하자 어찌저찌 흐지부지된 채로 끝납니다. 단순히 텍스트만 봤을 때 이 작품의 마무리는 한여름 밤의 섹스 코미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대 위 그저 말없이 서있을 뿐인 제시카의 모습을 눈치챌 때, 이 작품은 그 무게를 다시 드러냅니다.
로렌조: 그러나 이 썩어가는 진흙투성이 의상이 / 천박하게 영혼을 가두는 동안, 우리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없죠.
[...]
제시카: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면 전 왠지 유쾌하지가 않아요. (*제시카의 마지막 대사)
저는 희곡을 텍스트로만 읽는 것은 작품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무대 영상이나 영화판을 항상 함께 틀어놓습니다. 이번에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샤일록으로 출연한 영화판을 함께 봤는데, 전체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해석을 보여줘 재밌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표정으로 은근 슬쩍 밧사니오에게 힌트를 주는 포오샤, 정말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퇴장하는 샤일록, 그리고 대사 한마디 추가하지 않고 오직 결말의 지연만을 통해 얻어낸 새로운 무게감 등... 얻어간 것이 정말 많은 영화였습니다.
이번 셰익스피어 작품도 아침이슬 김정환 역으로 읽었는데, 앞으로는 다른 역본을 써야겠습니다. 파편적으로는 뛰어난 부분이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좀 별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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