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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카이계' 라는 장르가 오타쿠 문화를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 장르를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개인의 운명이 곧 세계 전체의 운명과 연결되는 작품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신세기 에반게리온」 처럼 어둡고 사변적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처럼 밝고 유쾌한 작품도 일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조어들이 그렇듯, '무엇이 세카이계인가?' 라고 진지하게 따지기 시작하면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분위기나 전개가 완전히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같은 세카이계로 묶입니다. 이렇듯 세카이계는 장르로서 상당히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었고, 그 탓에 서브컬처 판에 자리잡지 못한 채 열풍이 사그러지고 말았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는 세카이계 작품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극장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나 비주얼 노벨 브랜드 Key 의 시나리오 라이터 마에다 준과 같이 여러 서브컬처 인사들이 이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죠. 여러모로 새삼 하루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각 장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됩니다. 홀수장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파트, 짝수장은 <세계의 끝> 파트로 이루어져 있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하드보일드 느낌이 물씬 나는 SF 첩보물입니다. 8년 전 이혼하고 '계산사' 로 활동하는 주인공이 어느 천재 노과학자의 의뢰를 수락하며 생겨난 음모와 사랑(?)에 휩쓸리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시니컬한 분위기의 일상에서 연달아 펼쳐지는 비일상적인 사건들 아주 흥미진진하게 느껴져 재밌게 읽은 파트입니다.

반면 <세계의 끝> 파트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비하면 재미가 떨어진다고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마을'로 들어오며 자신의 그림자와 헤어지게 된 주인공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바라본 풍경과 고뇌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가 일상 속의 비일상을 묘사한 느낌이라면, 「세계의 끝」 은 반대로 비일상 속의 일상을 묘사한 듯한 느낌입니다. 작중 나오는 마을과 주민들의 모습은 환상적이고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묘하게 친숙한 인상을 독자에게 안깁니다. 전체적으로 후반부를 제외하면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가는 탓에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보단 흥미가 떨어지는 편입니다.

언뜻 전혀 연관이 없어보이던 두 이야기는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에서 노과학자가 주인공을 이용해 의식을 개조하는 실험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로 인해 주인공의 의식이 '세계의 끝'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즉, <세계의 끝> 파트 속 세계는 주인공이 지닌 의식의 풍경인 셈이죠. 연관 없어보이는 두 이야기를 솜씨 좋게 엮어낸 하루키의 실력이 감탄스러웠습니다.

이 작품의 한 가지 특징은 개념들이 굉장히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우선 등장인물들 중 이름이 밝혀진 경우가 없습니다. 나, 그녀, 소녀, 노인 등 대명사로만 지칭될 뿐이죠. 또한 '조직'이나 '공장', '야미쿠로'나 의식 속 마을 주민들의 정체 등 작중 내의 설정들 역시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나게 되죠.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덕분에 마지막까지 환상적이고 오컬틱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의 끝> 마지막 장면도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습니다. 죽을 운명인 그림자와 함께 탈출을 계획하던 주인공이 돌연 마음을 바꾸고 마을에 남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마을에서 만난 도서관 사서와 함께하기 위해서 말이죠. 만약 그림자가 죽지 않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주인공은 마음을 가진 채 마을에서 쫒겨나 위험한 숲에서 살아가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에서도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사서가 등장하는데, 아마 의식 속에서 재현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녀를 위해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의식 세계에 남기로 결심한 주인공의 태도가 참으로 '세카이계' 답다고 생각되네요.

여러 장르적 요소를 환상적으로 얽혀내 풍부한 이야기를 만든 하루키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제 인생작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 앞으로도 계속 기억에 남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