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우연히 알게된 프랑스 철학자
자크 엘릴이 무려 1994년에 죽은 사람인데
21세기 현 상황을 놀랄 만큼 잘 예측한 것 같은데 찾아보니 기술 관련 철학과 거리가 먼 신학자 같기도 하고 그냥 건드리는 족족 다 재능을 보인 르네상스맨 같은 천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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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엘륄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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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인이 쓴 책들을 읽어보고 싶은데
Q1: 난이도가 어떤지?
Q2: 한국서 출간된 책들 번역이 별로려나?
Q3: 21세기 미래 사회에 대한 예측은 놀랄만큼 적중했는데 왠지 자크 엘릴이 책에서 예측한 미래가 기술 자체가 인간의 의지와는 달리 결국 자기 스스로 진화, 발전 방향을 정할거다 이런 식 같은데 동시대 다른 학자들 책 영향을 받은 것임?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9433.html

기술 속 사상/③ 기술 시스템과 자율적 기술 - 쟈크 엘륄 인간복제나 생각하는 로봇의 생산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바램과 무관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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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나 생각하는 로봇의 생산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바램과 무관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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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같이 찬반이 분분한 기술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긍정인데, 그 가운데 묘한 체념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변화들은 ‘시대의 흐름’이고 거기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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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전이란 시대의 흐름 앞에 수동적이 되는 것은 과학자, 공학자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기술발전을 직접 이끌어가는 전문가들에게도 기술발전의 완급이나 방향을 조절한 권한은 없다. 자기의 전문 영역 외에는 잘 모를 뿐 아니라 자기가 개발하는 기술이 장차 어떻게 쓰일지도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살벌한 시장 경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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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라는 말이 좀 허탈하게 들린다.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학자 쟈크 엘룰(Jacques Ellul, 1912-1992)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상황을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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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많은 읽었던 책들의 저자로만 알려졌으나, 엘룰은 과격한 현대기술 비판론자로 더 유명하다. 1964년 미국에서 <기술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출판된 이래 엘룰은 ‘기술비관론자’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1954년에 나온 프랑스어판 <기술 혹은 우리 세기의 도박(내기)>(Technique ou l'enjeu du siecle)을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별로 빛을 못 보았지만 영문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제목의 번역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기술사회(technological society)’라는 말이 현대를 표현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후 출판된 <기술 시스템>(The Technological System)과 <기술담론의 허세>(The Technological Bluff)도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많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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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룰은 현대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전혀 다른 특징들을 가진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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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전통 기술은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다른 활동들 (예를 들어 종교적 활동)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또 기술의 제작에 있어서는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사용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와 지역의 문화와 상관없이 전지구적으로 사용가능한 보편성, 그리고 여러 기술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는 것도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시스템은 자연을 대상으로 했던 전통적인 기술의 영역을 넘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으로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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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은 철저히 관찰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관심은 추상적인 본질에 있지 않고 현실의 정확한 파악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기술사회의 현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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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통적 기술의 발전도 한 개인이나 집단이 완전히 통제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과거 기술의 발달은 매우 느렸고 공간적 제약이 많아서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억지로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현대 기술사회의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과 은행카드를 사용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바꿔야만 하고, 바꾸면서 나의 삶이 더욱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
(중략)
기술이 ‘자율적’이라는 표현은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거나 기계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기술발전이 기술 시스템의 관성에 의해 지속되고, 그 과정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술사회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인간들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발전한다.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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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빠른 컴퓨터와 더 얇은 핸드폰이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를 창출한다. 누가 지하철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가?
물론 기술 개발에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하고, 특정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기술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은 개별 사례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아가, 앞서 본 것과 같이 기술발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뿐 아니라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까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사회 전반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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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자율적이라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가? 엘룰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말년에는 “이제 기술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도 없고, 그 구성원은 이미 자유롭지도 못하다고 하니, 그를 따라다니는 ‘기술비관론’의 꼬리표는 거의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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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엘룰 자신은 비관론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비관론자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가 남긴 50여 권의 저서와 1000여 편의 논문은 자기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엘룰은 90 평생을 시골 목사, 레지스탕스, 보르도 대학 교수, 사회학자, 정치학자, 평신도 신학자, 보르도 시장, 청소년 운동가,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그야말로 불꽃같은 인생을
(중략)
학자로서 현대 기술사회 전체를 폭넓게 조망하고 분석한 결과 비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론 때문에 자기가 속한 삶의 터전에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보낸 고향 보르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동가의 삶을 살면서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기술사회가 확 변할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노력들을 통해 기술사회가 위협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개인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중략)
기술사회에 대항하는 개인적 노력이 신앙과 상관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엘룰의 저서를 읽고 평생을 자기 마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사람도 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25064.html
기술은 인류를 구출할 것인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 것인가? 기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시대에 ‘기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물음은 불가피
(중략)
서양 역사를 개관하면 네 가지 기술 이해 방식이 두드러진다.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아르스(ars), 근대 유럽의 테크닉(technic) 그리고 현대의 테크놀로지(technology)가 그것이다. 이 역사를 살피는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술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20세기 자크 엘륄과 질베르 시몽동의 기술문명 비판까지 주요한 사상가들의 기술 담론이 펼쳐진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933566.html

내가 보르도를 자주 찾는 이유는 포도주 때문이 아니다. 1990년대 초부터 몽테뉴의 성을 찾아, 몽테스키외의 생가와 그곳의 포도밭 들판을 여행했다. 그리고 고야가 망명하여 마지막 그림을 그린 집도 찾아갔다. 그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자크 엘륄이 근무한 보르도 대학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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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를 자주 찾는 이유는 포도주 때문이 아니다. 1990년대 초부터 몽테뉴의 성을 찾아, 몽테스키외의 생가와 그곳의 포도밭 들판을 여행했다. 그리고 고야가 망명하여 마지막 그림을 그린 집도 찾아갔다. 그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자크 엘륄이 근무한 보르도 대학교와 함께 그의 이름을 딴 중등학교도 찾아갔다. 그 학교 입구에서 만난 학생들이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자크 엘륄이라는 것을 몰라서 놀란 적이 있다. 더구나 몽테뉴나 몽테스키외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 더욱 놀랐다.
내가 더 좋아하는 엘륄의 말은 “한쪽만 보지 말고 양쪽을 보고 전체까지 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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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령 모두가 오로지 ‘자유’를 주장할 때 그것과 ‘책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기술을 숭배할 때 기술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
(중략)
“존재한다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저술의 주제는 자유를 위한 저항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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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신학, 법학, 사회학 등에 두루 통달한 20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인 그의 저서가 30권 이상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그에 대한 연구서도 많이 나왔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소수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뿐이고 철학이나 법학이나 사회학에서는 그를 철저히 무시해 유감이다. 한국의 왜곡된 전공주의가 낳은 폐단
(중략)
한국에서보다는 덜해도 그의 조국인 프랑스나 그의 책이 많이 번역되는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글이 기독교나 현대문명을 철저히 비판하는 저항적인 태도 탓
(중략)
1912년에 보르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994년에 보르도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엘륄은 거의 평생을 보르도에서 보냈고, 그 반 이상을 보르도 대학교에서 학생과 교수로 살았다. 한국 못지않게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에서 파리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특히 지식인에게 불리하지만, 그는 끝까지 지방을 버리지 않았다. 평생을 두고 세계적으로 생각하되 지역적으로 행동한다는 신념을 지킨 것이다. 제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반년간 보르도 부시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1944년부터 1980년 68살로 퇴직할 때까지 37년을 보르도 대학교 법학부에서 가르쳤다.
'인간의 의지와는 달리' 가 아니라, 정성적인 것이 아닌 수량에 중점을 두는 가치론(공리주의에서는 모든 효용이 대소비교가 가능한 수량으로 환원돼서 비교되지) 등과 기술 고유의 힘이 결합하며 기술 체제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그것이 인간 정신을 복속시킨다는 것임. 우리네 삶의 풍경에서 기술을 뺄 수 있나? 기술에 기반한 혹은 기술에 연관된 사고방식들을 우리로부터 분리할 수 있나? 없지. 효율성과 계량과 분절적 논리에 대한 추구, 그리고 그것이 합리적이며 타당할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는 인식 위에서 우리의 욕망이 배태되지. 그러한 맥락 하에서 우리의 의지가 기술과 기계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임.
옛날의 삶은 좀더 종합적이고 유기적이었지. 그러나 요즘 시대의 휴대폰은 반도체와 OLED와 수많은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 각개를 만드는 사람들은 딱 자신의 몫만을 맡고 그 몫들은 분절적이고 분리되어 있고. 그리고 그 분절/분리는 철저히 효율의 논리 하에서 작동하는데 이런 것들은 사실상 계량화된 가치판단의 내적 논리 하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되지.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이것이 옳다!"고 여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기술은 자기 자신을 더욱 강화하고 자기발전하며 성장한다는 거야. 그리고 기술은 다른 기술을 창조하고. 엘륄은 이게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고 보면서 양면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거야.
@Dd 기술엔 좋은 점도 있다. 그러나 나쁜 점도 있다. 왜 이 나쁜 점은 간과되거나 심지어 없는 것처럼, 혹은 '더 큰 진보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가? 무엇이 그 대가로 지불되는가? 더 나아가 이러한 기술 체제가 정치/미디어 등과 결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 즉 엘륄은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며 오직 도구라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서, 기술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 그리고 세계의 가치론/존재론적 구조에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권세(power)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임.
자끄 엘륄의 기술체제 분석은 기본적으로 그가 신학자이자 사회학자라는 데에 기반을 두고 있음. 신학이란 기본적으로 '신앙'과는 다른 지평에서, 신이라는 어떠한 절대적인 한 점 하에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또한 동시에 물질 현상 이면의 정신적/형이상학적 구조를 읽어내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신학은 필연적으로 인간학이자 사회학일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이런 시각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신학자이기 때문인데 뭐 기술체제 분석만 읽으려면 아주 필요한 이해는 아니긴 함.
대장간에서 번역 나온 거 <기술 체계> 읽으면 됨. 번역이 유려한 편은 아닌데 의미는 전달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