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개인주의는 벌써 시대에 뒤떨어진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사랑은 또다시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졌으며, 정화된 행동인의 영혼 속에 통속문화가 유입될 때 나타나는 대중적 효과의 건전함도 막 새롭게 발견되던 참이었다. 대중의 정체성은 유행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변한다. 어쩌면 유행에 민감한 패션계 사람들조차 이 '대중'의 근원적 비밀을 모를 것이다. 이런 주장에 반발하는 사람은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풍길 게 분명하다. 마치 전기치료 기계의 양극 사이에 앉아 자신의 적이 누군지 모른 채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고 실룩거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 적은 현재의 비즈니스 상황을 재빨리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이용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의 유동성과 불확실성, 무수한 영역들과의 합류, 무한한 연결 능력과 변신 능력 그 자체다. 거기다 받는 쪽 입장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일목요연한 원칙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점까지 더해진다.
이런 현상들의 변화 속에서 확고한 발판을 찾으려는 것은 분수 물줄기에 못을 박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럼에도 그 변화 속에는 늘 똑같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 예를 들어, 민첩한 종인 인간이 어떤 테니스 선수를 천재라 부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엔 무언가 생략되어 있다. 만일 한 경주마를 보고 천재라고 부른다면?
생략된 것은 더 많아진다. 축구선수를 보고 과학적이라고 하건, 펜싱 선수를 보고 지적이라고 하건, 권투선수의 패배를 보고 비극적이라고 하건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항상 남기 마련이다. 인간은 과장한다. 과장을 야기하는 건 부정확함이다. 소도시 사람들이 백화점 소유주의 아들이라면 세상물정에 밝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관념의 부정확함에 기인한다. 물론 거기에도 일말의 진실은 담겨 있다. 생각해보라. 왜 챔피언의 기가 막힌 전략을 보고 천재의 기발함을 떠올려서는 안 되고, 챔피언의 깊은 숙고를 보고 노련한 연구자의 숙고를 떠올려서는 안 되는가? 물론 그것에 맞지 않는 것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이 나머지는 결코 표출되지 않거나, 아니면 의도치 않게 느껴질 뿐이다. 이 나머지는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무시되거나 생략된다. 경주마나 테니스 선수를 보고 천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내재한 천재 개념을 뜻한다기보다 좀더 높은 모든 영역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을 담고 있을지 모른다.
글을 왜 저렇게 쓰나 어떻게 보면 모두 비문이다 말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