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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 책을 알게 되었는지는 까마득하다. 갖고 있는 책은 민음사 2019년 개정판 이전 인쇄본이니 한 육칠 년은 됐으리라. 그동안 네다섯 번 쯤은 도전했을 텐데, 그때마다 초입 장면을 채 넘기지 못했다. 나의 뫼르소는 언제나 어머니 장례식을 다녀와서 마리와 해수욕하고 있을 뿐이었다. 읽을 때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고, 과거에는 소설 읽는 재미를 위해 조금도 참을 줄 몰랐다.
시간이 흘러 삶과 그 의미에 대해서, 무신론 철학부터 성경까지 양극단을 더듬어보며 나름 깊게 사유하게 됐고, 이윽고 유튜브에서 카뮈의 이 책과 ‘부조리’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영상 몇을 접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읽을 욕심이 생겼는데, 실제로 읽게 된 것은 또 한참을 지나서였다.
이 책을 읽기까지의 나의 삶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나는 아무래도 삶의 무의미함과 의미를 추구하려는 나의 의지 사이의 긴장 속에서 퍽 힘들어했다. 그러다 기독교 신앙을 접했고, 그 속에서 어떤 빛을, 말하자면 일종의 救援을 보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 고뇌가 바로 카뮈가 말하는 일종의 부조리였다.
이렇듯 부조리에 대한 개념을 단순히 사변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내 삶에서 뼈에 사무치게 경험했고,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한 바, 이런 배경 속에서, 즉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어쩌면 일종의 우월감 속에서 이 책을 읽어 나갔다.
소설이라면 그저 추체험의 재미를 위해 쓰인 것들이 상당수지만 더러는 이 책처럼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는 이미 부조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이 부조리에 대해서 말할 것임을 이미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읽어보니 실제로 그랬다.
내가 이 책을 완독하기 전 수 차례 걸려 넘어졌던 주인공의 허무맹랑한 감정선과 대응들은 단순히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범주에 놓일 수 없었고, 온전히 부조리의 맥락 안에서 읽혀야 했다. 뫼르소에게는 삶이란 무의미함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도, 사랑도, 결혼도, 거짓 증언도, 그리고 살인마저도.
그러나 단 한 가지, 뫼르소가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 내면에 품고 있는 진실이 왜곡되는 것이었다. 사형 집행 전에 고해를 위하여 카톨릭 신부가 찾아왔으나 신 따위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러고 싶어하지 않았던 뫼르소는 만남을 한사코 거절했다. 끝내 뫼르소가 카톨릭 신부의 도움과 위로를 가장한 사상의 강요를 마주하게 되어 그가 자기의 깊은 곳에서 울분을 길어낼 때, 그 가상의 세계를 관조하고 있던 나에게도 잠시간 전율이 일어났다. 내 안에서도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왜 나는 그때 뫼르소와 함께 떨었을까? 뫼르소 자신의 감상으로 나열된 기나긴 심판의 과정 속에서 나는 뫼르소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뫼르소가 되지 못했다. 계속해서 한 가지 의아한 구석이 남았다. 뫼르소가 무의미함과 부조리 속을 유영하면서도 자기의 일신상의 안위를 위하여 어떤 거짓도 꾸며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단순히 무의미함으로 치부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무의미란, 그럴 이유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까.
뫼르소는 흐리멍텅하게 반복되는 감옥에서의 시간을 후회 대신에 욕정으로 채웠다.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을 무의미함으로 극복하는가 하면, 그 무의미함을 일관되게 직시하기 위하여 삶의 연속이 가져다주는 기쁨마저도 의연하게 부정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 이윽고 카톨릭 신부를 만난 것이다. 그리하여 켜켜이 쌓인 이야기 끝에 뫼르소의 영혼이 샘 솟듯 터져나왔던 것이다. 그 영혼은 곧 진실에의 결연한 의지였다.
이러한 메시지는 편지와 미국판 서문에서 작가 본인의 말을 통해서 확증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는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고자 했다고 한다. 인간이자 ‘신’으로서 진리를 위해 희생한 그리스도를 차마 모사할 수는 없다고 고백하는 인간으로서, 가장 진솔한 하나의 인간을 그려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가장 깊은 단계의 절망으로 묘사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절망에서도 수동적인 절망, 즉 고뇌를 자아화한 형태가 생각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장 깊은 절망은 신앙과 가장 멀지만 가장 가깝다. 나도 진실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빛으로 묘사된다. 더불어 ‘어둠이 두려움을 붙잡지 못한다.’라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은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인하여 자기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와 같은, 빛을 선으로, 어둠을 악으로 묘사하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상징은 우리에게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카뮈는 이것을 거스르려 했던 것이 아닐까.
부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명징하게 드러난 죽음이라는 가설 외에 다른 어떤 전제도, 당연히 도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믿음의 도약을 곧 철학적 自殺이라고 일컬은 것이리라. 이러한 믿음의 도약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윤리, 곧 도덕에 대한 전제로의 도약이기도 하다. 도덕의 부재는 곧 선악의 부재를 의미하고, 이는 선악으로서의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의 황혼을 의미한다.
카뮈는 이것을 인지하고, 뫼르소라는 부조리를 직시하는 인간을 그려내어 태양 때문에 사람을 쏜다는 그야말로 ‘부조리’한 행위를 통해 부조리란 무엇인지 부조리하지 않게, 즉 참으로 적절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부조리를 직시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하여
어떤 한 인간이 부조리를 직시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에 대한 존경이 솟구쳐 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의 의지라는 메시지가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가는 태도로서 온전하게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든다. 카뮈는 자신의 사상이 ‘실존주의’라는 틀로 묶이는 것을 거부했다고 들었다. 부조리 속에서의 실존의 가치를 ‘진리화’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카뮈의 사상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카뮈는 ‘진실에의 의지’ 또는 ‘부조리한 현실에서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분명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만약 이것을 한 사람의 단독자(單獨者)로서 취할 수 있는 여러 길중 하나가 아닌, 많은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높게 평가될 수있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보고 있다면 이는 내재적으로 진리화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점은 그야말로 부조리하다. 그러나 부조리하다는 점에서 일관적이므로 그런 점에서는 훌륭하다.
<이방인>을 제외하고 카뮈의 다른 어떤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서 더 쓰지 못하겠다. 어쩌면 이 감상도 부조리한 것인지 모르겠다.
한 줄 평: 부조리하지 못한 부조리 문학
그러니까 뫼르소, 더 나아가 그를 통해 카뮈가 주장하는 철학이 짜친다는 거지? 1. <시지프 신화>에서도 보이듯 작가는 진리를 만들고 거기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는데 정작 작가 본인도 자신의 사상을 진리처럼 여기는 경향을 보임 2. 카뮈가 이 문제에서 떳떳하기 위해서는 <이방인>, <시지프 신화>에서 자기 사상을 남들에게 소리 높여 주장해서는 안 됐음
넌 왠지 <이방인>에서 신부에게 분노를 퍼붓는 뫼르소를 보면서 간접적으로 '이거 좀 이상한데?' 하고 느끼고 <시지프 신화>에서 '이거 좀 이상하다' 하고 느꼈을 것 같음
네 맞아요. 제가 <시지프 신화>를 직접 완독하진 않고 발췌된 문장과 이차 자료들을 통해 받은 인상이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