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은 시이고, 소설은 산문이라 할 수 있겠다. 세세한 사항들은 지워버리고, 그 둘을 나란히 놓고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각각이 하나의 전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각각의 각과 모서리들을 느껴보기로 하자. 그러면 즉시 가장 중요한 차이점들이 드러난다. 오랫동안 느긋하게 축적되어온 소설과, 이와 달리 약간 응축되어 있는 희곡. 소설에서는 감정이 모두 쪼개져 흩어졌다가 천천히 함께 엮여 한 덩어리로 모인다면, 희곡에서 감정은 응축되고 일반화되며 고양된다. 희곡은 그 얼마나 강력한 순간들을, 그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구절들을 우리를 향해 쏘아 대는가!


"오, 여러분,
저는 그저 광대짓을 하며 당신들의 눈을 속였을 따름입니다.
죽음, 그리고 죽음, 그리고 또 하나의 죽음의 소식이
연이어 도착하는데도 여전히 전 춤을 추며 나아갔으니!"


혹은,


"당신은 종종이 입술 때문에
계피향이나 봄 제비꽃이 내는 자연의 단맛마저 잊곤 했지요.
이 입술은 아직 그다지 시들지 않았답니다!"


안나 카레니나가 제아무리 강한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그녀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은 종종이 입술 때문에
계피향마저 잊곤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안나 카레니나는 인간적인 감정들 중 가장 심오한 어떤 감정의 깊이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열의 극치는 소설가의 것이 아니다. 의미와 소리의 완벽한 결혼도 그의 것이 못 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민첩함을 길들여 게으르게 만들고 두 눈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두어야만 하며, 환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묘사로써 암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소설가는,


"내 상여 위에 음울한 주목 화환을 놓아주오.
아가씨들이여, 버드나무 가지를 지니고서 나 진실이 죽었다 말해주오"


라고 읊조리는 대신, 무덤에서 시들어가는 국화와 콧소리를 내면서 사륜마차를 끄는 장의사들에 대해 늘어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 덜컹덜컹 꾸물대며 나아가는 예술을 시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소설가들이 모든 솜씨를 발휘하여 우리로 하여금 개별적인 것에 대해 알게 해주고 리얼리티를 인식하게 해 준다면, 극작가들은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것을 넘어 우리에게 사랑에 빠진 애너벨라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열차에 뛰어드는 안나카레니나가 아니라 파멸과 죽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건지 나도 모르는,
시커먼 폭풍우에 휩쓸린 배처럼 이끌려가는 영혼"



을 보여준다.
그러니 우리가 엘리자베스 시대 희곡을 덮으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를 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과 평화』를 덮으면서 우리는 무어라 외치게 될까? 실망의 외침은 아니다. 피상적이라고 한탄하거나 소설가의 기술은 하찮다고 욕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마르지 않는 풍요로운 인간의 감수성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다.

희곡에서는 보편을 의식하게 된다면 소설에서는 개별을 보게 된다. 우린 우리가 가진 온 에너지를 한 다발로 모은다. 사방에서 모여든 신중히 고안된 인상들과 축적된 메시지들을 늘이고 확장하며 그것들을 천천히 안으로 들인다. 마음은 감성으로 흠뻑 젖어 들고 언어는 그런 마음의 경험을 담기엔 너무 모자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느 한 문학 양식이 다른 문학 양식보다 열등하다고 단정하거나 아예 문학도 아니라고 실격시켜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문학 양식들이 아직도 소재의 풍요로움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불평하면서, 아직 표현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커다란 부담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무언가가 만들어지길 초조히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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