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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근대라는 개념은 갑작스럽고도 강제적으로 삽입됐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탓에 이를 이끌어 가는 많은 근대인과, 그들이 구축한 근대사회에 대한 성찰도 자연히 부재했습니다. 서구 근대화 300년 투쟁에 비하면 우리의 근 50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죠. 그래서 한국 근대화에 대한 언어와 담론이 사라진 곳에 들어찬 것이 성찰 없는 열정과 무차별적인 헌신이 아닐까요. 여기에선 말과 말이 부딪혀 습합하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의 미래 비전에 대한 건설적인 담론 형성 역시 난망한 일이고요. 여기선 오로지 자신만 옳다는 신념윤리만이 돌출합니다. 이것이 이념갈등과 인정투쟁으로 갈기갈기 찢긴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사회학계 거장 막스 베버는 근대사회를 맞이하는 근대인의 시민윤리로써 책임윤리에 정초한 개인주의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자율적 결사체를 꿈꿨습니다. 그래야만 현대 문명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저는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신념윤리에 기초한 집단주의가 만연합니다. 한국의 산업화는 개인적 의견을 모두 집단의 논리 뒷전으로 돌렸고, 그렇게 개인을 지워갔습니다. 개인 역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 보다는 집단의 논리에 맞춰 자기 자신을 조정해갔습니다. 개인의 생활윤리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윤리를 창안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전대미문의 대참사가 발생합니다.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우리들 앞에 던져진 것입니다.


이에 집단들이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속한 단체가 내세우는 의견이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갔습니다. 신념윤리로 가득 찬 집단에게 외부의 의견이 성찰의 대상이 될 리 만무합니다. 침묵의 나선 효과가 발생합니다. 큰 목소리가 진리가 됩니다. 더 세게 말하는 것이 집단의 이름값을 드높이는 양 선전됩니다. 이 폐쇄적 공동체는 건강한 시민사회와 융화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가고, 그렇게 사회적 갈등은 자연스레 심화됩니다.


물론 저마다의 애국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뤄내는 각자의 방법 또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국은 정의할 수 없고, 외려 그것 때문에 더 가치 있는 개념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본래 시끄러움을 내장한 체제이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진전된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기컨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쇼비니즘의 창궐은 경제적 무력감과 열패감이 동반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도 혹시 그렇지는 않은가요?


2019년 한국사회를 바라보며 다시 베버를 떠올려봅니다. 100여 년 전 앞을 내다보며 제시했던 베버의 시민윤리 즉 책임있는 개인들의 자발적 결사체를 말입니다. 우리는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자신으로 바로 설 수 있습니까? 본인 스스로의 진지한 성찰에서 우러나온 미래 비전에 대한 의견이 아닌, 집단의 논리에 함몰된 신념의 덫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 이 정치적 소용돌이는 경제적 열패감의 또 다른 비정상적 표출은 아닐런지요?


성찰 없인 애국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