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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저술한 존 러스킨은 본래 화가이자 예술 평론가였다. 당시에는 경제학자보다는 평론가로 더 유명했다. 그런 그가 경제학사에 그 이름을 남긴 것은 바로 이 저작을 통해서다. 아직 '정치경제학'일 시절의 경제학 서적들이 빈번히 그러하듯이, 이 저작도 경제학을 윤리학의 연장선에서 다룬다(근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 그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데이비드 리카도와 제임스 밀, 그리고 인구와 경제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토마스 멜서스 등등이 모두 그런 경향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정치학과 정치철학은 본래 윤리학의 분파에 있기 때문에 그와 분리되기 전의 경제학은 윤리와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이 점에서 '정치경제학'과 현대의 '경제학'의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정치학의 일부로서 '우리는 경제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해야한다'는 당위를 제시한다. 반면 후자는 사회과학으로서 그저 '이러한 측면에서 어떠한 경제적 현상은 이렇다'를 제시할 뿐이다. 우리 시대의 경제학은 윤리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당위적인 명령을 제시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하는 윤리학적 성격이란 꼭 "인간은 3주덕을 갖추어야 한다"와 같은 것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정부는 시장을 방임해야 한다" 역시 당위적이므로 윤리학적 주장이다. 상기한 문장은 정치철학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사실'이 그 자체로 '당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측면을 떠나서 시장을 자유 방임하는 편이 더 균형적인 희소가치의 배분이 가능하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그 자체로는 '사실'–기술적•설명적 서술–일 뿐이다. 그러한 '사실'을 논거로 활용하여 '당위'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판단이 있어야 한다. 위의 예시 같은 경우 "균형적인 희소가치의 배분이 우리 사회에 유용하다"와 같은 식이 될 수 있겠다.)
러스킨은 서문에서 이 저작의 전반에 대해 먼저 소개를 하며 시작한다. 이『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그가 이전에 잡지에 개재한 논문 4편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논문에서 다루는 주제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먼저 경제의 기반이 곧 '정직'이라고 증명해보이겠다고 밝힌다. 이후 '부'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잇고, 마지막으로는 구체적인 개혁적 측면을 다루겠다고 말한다.
비록 그가 구체적인 방법론은 말미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개혁에 관한 단상은 서문에서 미리 등장시킨다. 그가 이 지점에서 말하는 개선책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정부가 국비로 직업훈련 기관을 전국에 설립하는 것이다.
둘째는 상기 기관들과 연계된 공기업을 조성하는 것이다.
셋째는 일정 연령 이상의 무직자들을 강제로 직업훈련 기관에 등록시키는 것이다.
넷째는 노인과 장애인들에게 기본적인 경제적 안전망을 확충해주는 것이다.
1~3번까지는 전부 당대 노동시장과 연관된 정책임을 알 수 있다. 러스킨의 말에 따르면 그 세 가지 정책은 모두 연계되어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는 다소 놀랄 만한 부분도 있다. 세번째 정책에 대해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엘리자베스 구빈법이 떠오른다. 물론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를 숭고한 원천으로 본 그가 무직자들을 문제시 한 것이 의외는 아니다. 다만 거의 구빈법과 비교될 정도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을 들고 왔다는 점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말할 뿐이다.
뒤에서는 각 논문들에 관한 감상을 적을 생각이다. 그 제목의 경우 그의 저작에서 제시되는 논문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나는 최대한 충실히 이 책의 내용에 주목하려고 힘썼다. 그렇다고 해도 이 감상문이 모든 부분을 포괄하지는 못할 것이다. 더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담으로『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은『신약성경』중『마태오서』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태오서』의 제20장 13-14절.)
이 구절은 특히 뒤에 이야기할 러스킨의 정의관과 연결될 수 있다.

1. 제1편-명예의 근원
그는 이 첫번째 논문에서 가장 먼저 "인간은 합리적인 경제 주체"라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을 공격한다. 사실 이 가정은 어느 정도는 현대 경제학에서도 통용되고 있다(흔히 'Homo Economicus'라고 부르는 가정이다. 정량적 모델들에서는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러스킨이 제시한 것과 같은 인간 행위의 예측불가능성 역시 받아들여진 상태이다. 확실히 인간 일반이 어느 정도는 경제활동에 있어 합리적인 경향을 보인다. 다만 어떠한 상황에서든 일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러스킨의 이 비판은 타당하다.
또 러스킨은 '인간은 득실의 균형은 완벽히 예측할 수 없으나, 정의의 균형은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의'란 인간이 타인에게 가지는 애정을 포함한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주인과 하인의 예시를 들어,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곧 사회 전반의 이익'이라는 경제학의 또 다른 기본적 가정 역시 공격한다. 만일 주인이 하인에게 그만두지 않을 선에서 최소한의 여건을 제공(지금으로 치면 합법적인 선에서 최소한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한다면 그 주인의 행태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주인과 하인은 서로 합법적인 계약을 한 것이며, 주인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권리를 구사할 뿐이다. 하인은 계약이 끝난다면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려고 시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 상황에서 시장 질서를 통해 하인의 일에서 최대한의 효율이 발생하고, 이는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어 하인에게도 돌아올 것이라고 보는 게 당대 경제학의 관점이었다(사실 가정의 문제이지 시장의 기본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통용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이 완벽히 일천적이려면 하인과 주인의 사적인 관계성은 전부 제거되는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 어떤 주인과 하인은 그러한 균형 상황을 도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러스킨은 그렇지 않은 상황들도 다수 제시했으나, 보지 않아도 추론할 수 있는 상황들이므로 생략한다(요컨대 서로의 '태도'에 대한 가정들이다. 사적인 관계성이라는 요소를 투입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그러한 다양한 변수들에 의해서 예측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기에, 결국 사용자가 노동자를 '정의롭게', 혹은 '덕스럽게' 대할 때 가장 예측가능한 이익이 산출된다는 것이다. 정의롭게 대해도 전혀 호의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냐는 반론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분명히 그런 상황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정의롭게 대한다면 당신은 그에게서 입을 뻔한 해악을 방지한 셈이다. 정의로운 주인에게도 뻔뻔한 하인이라면 난폭한 주인에게는 강한 앙심을 품지 않겠는가?'
그는 한편으로 노동자와 공장주의 관계는 다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그는 도시 노동자들 역시 이러한 원리에 편입시키고자 두 가지 제안을 한다.
첫번째는 노동자의 임금이 시장 수요 이전에 고정된 전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정 노동자들보다 단기 계약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더 높아야 적절하다고 본다. 이유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생계에 대한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단기 계약직들에게 고임금을 주어야 한다면 고용자들은 고정 노동자들을 고용하고자 할 것이므로, 사회의 고용 안정성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상인, 공장주 등의 유산자들이 그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약을 지키고 사기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부터, 고용자들은 노동자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해야한다는 등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의 내용은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도무지 납득할 사람이 없을 듯하다. 예컨대 상인은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장 수요가 높은 시장에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상품을 제공하고자 해야한다는 내용이 그러하다. 공급 대비 수요가 폭발적인 상황에서 어떤 상인이 그렇게 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는 이 논문에서 내내 작금의 정치경제학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해온 바 있다. 상인들이 사회적 존중을 받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한다는 성격이 '이익 추구'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본인의 논변 역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첫번째 부분에서의 임금 논의 역시 그러하다. 꽤나 이른 시기에 최저임금제에 대한 논의를 도입한 점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러스킨의 원리 자체는 업종에 따라 차별적으로 작동할 여지가 매우 크다. 그가 살던 시대의 제조업도 물론 이미 산업혁명으로 상당히 기계화 되어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비하면 여전히 노동집약적이고 인건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산업이었다. 비숙련공과 숙련공의 임금 차이는 엄밀히 말하면 숙련공을 양성하는 데에 투입되는 교육 비용과 시간 때문도 있다. 숙련공은 나름 희소한 인재이고 경력직이기 때문에 임금조건이 더 훌륭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고려되지 않은 채로 단순히 비숙련공 쪽의 임금만 상승한다면 결국 고용 자체가 감소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많은 비숙련공을 당장 숙련공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산업 구조상 숙련공은 희소하기에 결국 더 많은 수를 확보해야 하는 것은 비숙련공이다. 대형 공장들이야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중소 규모의 공장들은 인건비 때문에 경영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 설령 대형 공장들이라고 해도 결국 오른 인건비를 소비자 가격에 전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비록 그가 이 대목에서 다시 그것을 언급한 것은 아니나, 이미 서문에서 연계될 수 있는 일련의 개혁 정책들을 제시한 바 있다. 그가 서문에서 말한 정부 주도의 대규모 직업교육과 함께한다면 사기업들의 기회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비숙련공의 임금이 오른다면 그들에 대한 고용이 줄게 될 것은 아마 러스킨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문의 것과 연계해서 이 정책을 펴는 동시에, 숙련공을 양성해내어 그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 본래 의도였을 것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비판점이 없지는 않다. 러스킨이 말한 것처럼 모든 비숙련 노동자들과 무직자들이 직업교육을 이수해서 숙련도를 갖추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라면 숙련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점은 무엇이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공장 측이 그들에게 안정적인 고용과 비교적 고율인 임금을 보장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 것인가? 모두가 숙련 노동자라면 애초에 '숙련'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지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 경우에 공장 측은 어떠한 행태를 보일 것인가? 모든 노동자들의 상황이 러스킨 시대의 비숙련 노동자들처럼 될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이 일정 이상의 능력을 갖춘 셈인데, 공장 입장에서는 고율 임금과 고용 안정성을 유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소위 '숙련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너무도 흔해졌기에 모든 노동자들은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톱니바퀴와 다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당대의 비숙련 노동자들의 상황 아닌가? 러스킨의 정책은 오히려 노동자 전반의 여건을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2. 제2편-부의 광맥
이 논문의 서두에서 러스킨은 상거래와 부의 축적에만 집중하는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을 비판한다. 그는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며 '부'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그리고 보편적으로 모두가 알고 있듯) 한 사회에서 희소가치의 양은 한정된다. 그 말인 즉슨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을 때 누군가 부유하다면, 누군가는 가난하기 마련이다. 러스킨은 여기에 집중한다. 그는 소위 '개인이 부자가 되는 법'이란 다른 개인을 빈자로 만드는 법이라고 말한다(또 그의 말에 의하면 당대의 경제학자들은 '원리에 따른다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심심치 않게 선전하고 다닌 듯하다.)
그러고는 그런 방법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정치경제학자로서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러스킨도 언급하듯이 'Political Economy'는 '국가경제학', '국민경제학'이라는 맥락으로도 쓰인다. 흔히 한국어로는 '정치경제학'으로 직역되지만, 사실은 그 자체로 국가와 국민적 관점에서 경제를 연구한다는 의미가 있는 셈이다.
그는 이를 근거로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 사용되는 경제학이란 '상업경제학'일 뿐이라며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위의 사항과 연결하여 '화폐가 곧 부의 척도'라는 인식에 대해 반박을 펼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화폐의 보유량이 곧 부의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교환이 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이다. 물적 자원들을 화폐로 교환할 때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은 변수가 끼어든다. 예컨대 시간성이나 정보 비대칭성 등이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반면 화폐는 그 자체로 교환을 위해 약속된 권위이다. 교환할 상품에 상응하는 정도의 구매력을 갖추었다면 화폐->상품으로의 교환에서는 일반적으로 별다른 장애물이 없다. 여기까지가 상기한 인식이 보편적인 경제 상식으로 기능해온 이유에 관한 러스킨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한들 '국가경제학'의 관점에서 '화폐가 곧 부의 척도'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를 전환한다. 그는 두 가지 예시를 들어 노동 청구권의 속성을 가진 개인의 부가 사회 전체의 물적 재산은 오히려 감소시킴을 역설한다. 두번째 예시가 설명에 가장 적합한 듯 싶다.
러스킨이 제시한 예시는 다음과 같다. 갑, 을, 병의 3인이 작은 공화국을 설립했다. 본래는 서로 공평하게 땅을 나누어 가지고 경영했으나, 어느날 상황이 변한다. 좀 더 효율적인 자원의 운송을 위해 갑과 병의 중앙에 있었던 을이 중개업을 시작한 것이다. 을은 운송의 대가로 갑과 병의 영토에서 생산된 산물 일부를 자신이 수수한다. 이내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원활하게 공급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을은 스스로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낸다. 공급을 의도적으로 조정해서 나머지 두 명이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고 서로의 산물을 가져가게 만드는 것이다. 을 본인은 계속 높여 받은 대가를 축적해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를 달성한다. 그는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둘의 영토를 매입한다. 이제 지주였던 갑과 병은 을의 일꾼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증가한 것은 을의 재산 뿐이고 자원의 총 생산은 감소하지 않았는가? 을은 운송을 위해 자신의 영토를 경작하는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이것이 부의 집중으로 인한 전체 생산량 감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국가경제학적 관점에서 진정한 부를 판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러스킨은 이어서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부의 도덕적 기호 역시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스킨에 의하면 상기 예시에서 늘어난 을의 재산은 그가 양심적으로 행동하여 갑과 을의 자원과 균형을 형성할 때의 것보다 좋지 않은 도덕적 기호를 가지고 있다('양심적'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러스킨은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맥락을 보건대, 상행위에 있어서 그것이 발생시킬 부차적인 효과를 충분히 상기하고 행동하라는 의미에 가까운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성원 일반의 후생을 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이것은 그의 설명을 내 나름 대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러스킨이 '도덕적 기호'를 이야기하는 대목은 다소 난해하며, 내 정리처럼 공리주의적 관점과 가까운지도 불분명하다. 그가 단순히 '합법적이기만 한' 거래를 모두 긍정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어떠한 경제적 현상에서 드러나는 실정법 이전의 내재적 규범 관점에서의 통찰–그러니까 도덕적 기호–을 경제학이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의 내재적 규범에 대한 관점 자체가 이 저작만 읽은 입장에서 다소 불확실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나의 이 정리는 단순 대강 정도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의 예시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설명은 가정에 성실히 따를 때는 문제 없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현실적인 비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 저작 전반에서 일관적으로 "작금의 정치경제학은 스스로의 그릇된 전제에만 의존할 뿐이다. 그 이론들을 현실에 비추어보면 너무도 비현실적이다."라는 비평과 함께 의견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누군가의 부가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가난으로 이어지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스킨보다 이전 시대에 활동한) 리카도가 주장하여 지금까지 통용되는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각 경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재화를 '특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 거래가 이루어질 때 모든 주체가 이득을 볼 수 있다(여기서 특화란 상대적으로 기회비용 측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산업을 중심 육성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한 국가가 아무런 원천 자원이 없고 지극히 가난한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자. 아마도 그들은 원자재를 수입하여 이를 가공하는 산업을 특화할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교우위는 제조업에서의 인건비인 것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가공되었기 때문에 해당 상품은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무역 상대국의 딜러들은 이를 수입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수익이 국내에서 다시 소비·투자·임금 지급 등에 사용되어 다른 산업과 가계에 혜택을 주기도 한다. 어떤 주체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꼭 다른 주체가 무한히 가난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 셈이다.
확실히 러스킨의 말 대로 한 사회가 가진 물적 자원은 제한 되어있다. 그러나 비교우위를 바탕으로 한 세계적 교역이 이루어진다면 타국의 상품이 수입됨으로써 해당 자원의 공급이 늘어날 여지가 있다. 공급이 늘어난다면 가격은 더 저렴해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민 일반의 후생에 기여하지 못 할 것도 없다. 거래한 외국인들이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꼭 영국이 손해를 본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지금도('종전까지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국제무역의 기본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는 국제무역의 전성기 중 하나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기에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그가 4편에서 리카도의 경제학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몰랐을 리도 없다.
다음으로 그가 '개인적 부의 추구는 국가 경제에 타격을 준다'는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들었던 예시를 살펴보자. 상술한 대로 그의 예시는 스스로의 전제 안에서는 잘 작동한다. 다만 그 전제라는 것에는 그가 제1편에서 당대의 경제학을 비판할 때 사용한 수사와 같은 표현으로 답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전제는 현실의 시장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그 문제적 전제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경제 주체가 오직 셋 뿐이라는 것이다. 러스킨은 중개업이 본래 거래비용을 절감하고, 비대칭성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다는 점 자체는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러나 을이 바로 공급을 조작하고 막대한 초과이윤을 축적한다는 결론은 그가 시장을 지배하는 위치에 섰기 때문에 도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단일 중개자에게 시장 전체가 휘둘릴 정도로 독점이 일어나는 경우가 흔한가? 현실에는 수많은 생산자들 만큼이나 중개자들 역시 다수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생산자들이 서로의 점유율을 위해 경쟁하듯이 중개자들도 경쟁하지 않는가? 그러한 현실적 상황들을 염두에 둔다면 상기 예시를 통해 "공동체 일반을 생각하지 않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불러오는 결과란 흔히 이렇다"와 같은 주장을 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심각한 독점 상태에 놓인 산업들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말이다.

3. 제3편-지상의 통치자들이여
이 논문에서는 꽤나 참신한 방법론을 보여준다. 러스킨은 이 논문의 초반부에서『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잠언들을 당대의 경제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의 해석 속에서 "약하다고 하여 가난한 자를 탈취하지 말며, 약하다고 하여 곤고한 자를 시장 입구에서 압제하지 말라. 지존자께서 약한 자들을 노략하는 자들의 생명을 취하시리라."(『잠언』중 22:16.)는 부를 독점한 이들이 노동자 계층의 절대적 필요를 이용해서 그들을 착취하는 상황과,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와 만나거니와 그들 모두의 빛은 지존자 주님이시라."(『잠언』중 29:13.)는 부자와 빈자가 본질적으로 신의 피조물이라는 측면에서 평등하다는 전제와 연관되고 있다. 그후 '지존자 주님이신 빛'이라는 표현은 솔로몬이『말라키서』에서 언급한 '공의로운 태양'과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고 해석한다. 그에게 '공의로운 태양'이 지칭하는 것이란 바로 '정의'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내재적 규범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장을 통틀어 계속해서 성경의 구절이 언급되고 그것이 그의 내재적 규범에 따른 판단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의 내재적 규범을 지닌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체계를 완벽히 파악하는 데에는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말하는 '정의'란 무엇이고, 어떠한 일관적 기능을 하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내재적 규범관과 가까운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성경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재창조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저작만 읽어서는 정확히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어서 그는 1편에서 이야기한 '상업경제학'에 대한 비평을 계속한다. 그에 따르면 상업경제학은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정당함'이라는 것이 어떻게 판단되어야 하는 것인가? 러스킨은 그것이 법학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그다지 없을 듯 싶다. 대부분의 경제학은 법치 질서가 온전하게 서있는 상황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다음부터 이어지는 생각이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다. 러스킨은 여기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그 법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법도가 아니라 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근거로 단테의 저작이 인용되고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솔직히 말하면 무신론자이고, 200년 뒤의 독자인 나로서는 경제학에 대고 갑자기 신학적인 전제가 도입된다는 점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게 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보다 옳고 그름에 앞선 판단을 한다' 자체는 맞는 말이다. '옳고 그름'이라 함은 법률과 그 이전의 내재적 규범을 말하는 것일테다. 실제로 우리 정부는 오직 합법적인 선에서의 경제 활동만을 옹호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법률과 기반이 되는 내재적 규범이 신학적 전제라는 데에는 많은 독자들이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반박이라기보다도 불신이나 불승인에 가까운 것이다.
(중간에 1편에 대한 당대 경제학자들의 반박에 러스킨이 재반론을 제시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현대의 독자가 그의 견해에 주로 반박하는 지점은 그것이 아니므로 생략하겠다. 내가 제1편에 대해 썼던 감상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내용이다.)
상술한 원리를 바탕으로 러스킨은 1편에서 언급한 임금 관련 논의를 잇는다. 노동자에게 수요와 공급의 원칙 이전에 최저임금을 보장하자는 그의 논의는 1편에 대한 감상에서 다룬 바가 있다. 최저임금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른 하나의 대안이 더 제안되고 있다. 그 제안이란 바로 임금계약에서 일종의 이자율과 같은 요소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 골자는 노동자가 투입한 노동 자체가 가지는 가치 이외에도 그것이 생산하는 상품에 대한 이익을 그에게 추가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 자체는 의외로 허황된 것은 아니다. 현시점의 기업들도 이와 유사한 성과급 제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과학적 관리론'에서의 인센티브 방법론을 응용한 것이고, 러스킨이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도 그와 유사하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반드시 이행되는 '계약'으로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는 이 지점에 있다. 만약 범정임금 이외에도 추가로 상업 이익에 대한 인센티브를 매번 지급해야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항상 기업들의 수익이 일정하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업의 재정적 상황은 거시적 경기나 원자재 가격 변화 등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순이익이 적은 분기에는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것만으로 경영난이 초래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적자가 발생했을 때이다. 만일 적자 분기가 있다면 그때의 인센티브 지급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가? 기준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x퍼센트가 되어 오히려 합법적으로 노동자 임금을 차감할 수 있는 근거로 기능할 것이다.
제3편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는 거의 끝낸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러스킨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자신의 경제학이 많은 독자들의 오해와 다르게 사회주의와 다르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절대적 평등이 가능하다고 상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사회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단순히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지배층이라면 때로는 피지배층에게 강제력을 구사하는 것마저 권장한다. 또한 그는 사유재산권의 폐지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확대되기를 원한다. 다만 일부 부호들 뿐만이 아니라 구성원 일반의 사유재산이 점진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러스킨은 상기 논변을 통해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님을 밝힌 뒤 이 논문을 끝맺는다.
("여기서 나는 사회주의자들이 흔히 외치는 재산의 공동 분배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 사상을 조금의 지지도 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이다. 재산 분배란 곧 재산의 종말이자, 모든 희망과 노력과 정직의 종말일 뿐이다. 그것은 혼돈일 뿐이다(...)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붙들고 놓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를 천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치는 이유는 힘센 사람이 자신의 힘을 절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을 악용하기 때문이다(...)사회주의자는 '저 힘센 자의 팔을 부러뜨리자' 할 것이나, 나는 '저 힘센 자가 그 팔을 좋은 일에 사용하도록 가르치자' 할 것이다. 부를 얻도록 인간에게 불굴의 의지와 지혜를 주신 신의 뜻은 획득한 부를 낭비하고 남에게 다 주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부를 가지고 인류에게 봉사하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아니라 제4편의 후반에 등장하는 말이긴 하나,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견해를 파악하기에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첨부한다.)

4. 제4편-가치에 따라서
이 논문의 제목인 '가치에 따라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정치경제학 원리』중 한 장의 제목을 따온 것이다. 그 당시 밀의 이 저서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재로 쓰일 정도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당대 주류 경제학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밀만큼 그가 비판하기 적당했던 인물은 없을 것이다(밀은 생전에는 오히려 철학자보다 경제학자로 더 유명했다. 지금은 그의 철학과 다르게 보통 고전학파 경제학들이 그렇듯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가 이 논문에서 주로 비판하는 것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당대 정치경제학에서의 가치론이다. 당대 경제학에서 가치론이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그리고 밀 부자와 같은 고전학파들의 것이다. 즉, 노동가치론이다. 경제학에서 '가치'란 흔히 교환가치를 의미한다. 즉,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기제이다. 리카도의『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그리고 그를 이어받은 밀의『정치경제학 원리』에서는 두 가지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 투입된 노동 시간이 같다면 교환가치 또한 같게 설정된다고 전제한다. 즉, 노동 시간이 길게 투자되어야 하는 상품일 수록 그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스킨의 비판처럼 이는 시장의 실정과는 다르다. 그는 교환가치는 노동 시간이 아니라 소비자가 그것에 대해 가지는 유용성과 선호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밀은 교환가치가 유용성에 좌우된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의 기준은 소비자가 아니라 상품 자체에만 국한된다(다만 밀의『정치경제학 원리』를 직접 읽어보았을 때, 이 비판에서 러스킨이 그의 가치론을 다소 단정적으로 다루었다는 감상이 들기도 한다. 밀은 노동가치론을 이어받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소비자 효용적인 측면을 배격한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의 경제학은 그의 철학처럼 '절충적'이다.) 그러나 러스킨의 기준에서 유용성과 선호도는 모두 소비자의 숫자, 성향, 그리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대상 소비자들의 역량에 좌우된다(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노래 한 곡의 가격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흘린 땀보다는 그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머리 수에 달려있다.") 이것은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주관적 효용 평가가 실제 가격 결정 매커니즘에서 중요하다는 효용가치론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따라서 그의 분석은 노동가치론이 득세하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상당히 선구적인 셈이다(그는 이 대목에서 당대의 경제학자들이 '수요'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당대 경제학자들은 수요를 '판매된 물건의 양'을 통해 사후 파악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물건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이 지닌 실현가능한 구매욕'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수요'라는 변수가 현실에서 둘 중 어떤 의미에 가까운가? 후자가 아닌가? 이 지점에서도 러스킨의 분석은 정확하다.)
이어서, 위의 노동가치론 관점에서 파생되는 밀의 '소유'에 대한 관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신이 어떠한 물건을 쥐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그의 소유로 판단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망한 사람에게는 재산권이 없기 때문이다(물론 상속을 통해 그의 유족이 이어받을 수는 있다. 다만 상속 받지 않을 경우 재산과 더불어 채무 또한 소멸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망한 사람에게는 재산권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채무를 청구하는 것 역시 불가능 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 중인 동안은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그 말인 즉슨 재산이든 채무든 그에 대한 어떠한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라는 개념은 러스킨의 기준에서는 재산을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간의 역량까지 포함되어야 완전하다. 하지만 밀은 그것을 엄밀히 정의하지 않았다. 이 점이 바로 러스킨이 그의 소유 개념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가격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심화하면서 러스킨은 본인이 반박한 노동가치론을 신기한 형태로 다시 세우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상품의 가격은 '그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들인 노동의 양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기존 노동가치론에서 주체만 바뀐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노동이라는 것에도 등급이 있는데, '생명의 요소'가 더 많이 포함 되어있을 수록 고급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역시 굉장히 난해하기 그지없다. 제2편에서 이야기한 '도덕적 기호'처럼 이 '생명'이라는 것 역시 소수의 부호가 아니라 국민 일반의 관점에서 유용한 일이 더 권장될 만한 노동이라는 관점을 함의한 듯하다. 이 저작의 내용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건 그 즈음에서 그치는 듯 싶다. 이 부분은 여러모로 설명의 모호함이 문제가 되므로, 다음 지점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그는 드디어 서문에서 이야기한 경제 활동의 대원칙을 제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품을 구매할 때 이 구매 활동이 생산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유념할 것
둘째, 시장 가격이 생산자의 생명이 투입된 가치에 합당한지, 그리고 그 가치만큼의 이윤이 그에게 분배될지 유념할 것
셋째, 해당 상품이 음식, 지식, 만족감과 같은 생명에 유용한 것들을 위해 얼마나 긍정적으로 소용될 것인가를 유념할 것
넷째, 상품이 어떠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분배되는지를 유념할 것
다섯째, 모든 상거래와 계약은 항상 투명해야 함을 유념할 것]
이러한 다섯 가지 대원칙을 통해 우리는 그가 말하는 '정의'에 기반한 경제 활동의 구체적인 면면들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그의 원칙들을 통틀어 정리한 것처럼, '국민 일반의 효용 추구'에 가까운 경향들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실은 이 마지막 장의 시사점은 위 논의와는 다소 별론인 부분에도 있다. 그것은 바로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다. 그는 이 논문에서 공업의 폭발적 확대로 인한 환경 오염을 염려하고 있는데, 시기가 19세기 중반 즈음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선구적이다. 특히나 인류가 그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그 자신의 입지 본위와 관련이 있음을 잘 짚어낸 부분이 그러하다. 현대인인 우리는 잘 알다시피, 환경 문제는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 경관의 소실'과 같은 다소 낭만적인 이유 때문에 염려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왜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환경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면, 인류를 비롯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동식물들의 생존에 위협적인 상황이 조성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무려 200년 전에 그것을 언급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