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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았다

그런데 먼가... 알 수 없는... 먼가 내 능력으로는 온전히 해독할 수 없는 퍼즐같은 느낌이었다

역사라는 현실을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가져오면서도, 그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된 현실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알고 보니 이탈리아는 그 전에도 여러번 에티오피아를 쳐들어갔었는데 온전히 집어먹은 적이 없었다

적당히 영토를 할양받고 돌아가거나, 불의의 역습을 맞고 도망치거나 했다고 한다

비대한 자아를 품은 파시스트들은 자연스럽게 옛 역사의 설욕전을 나선 것이다

오합지졸로 유명한 이탈리아 군대였지만 근대화도 되지 않은 에티오피아 군대를 상대로 질 리는 없다. 이번에는 요행이 따르지 않아 황제의 군대는 속속 패배했고, 어쩔 수 없이 황제는 나라를 버리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런데 보라. 황제가 떠난 에티오피아의 산기슭에, 다시 황제가 나타났다. 황제는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떠난 적이 없었다.

물론 진짜 황제가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저 황제와 엄청나게 닮은 사람이 그럴듯하게 분장을 하여 백성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러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가 바로 거짓된 현실이다. 그런 역사는 없었다. 그런 가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고통받는 창작물 속 인물들은 많다

그런데 역사의 주요한 이벤트를 새로 만들어내어 이야기에 집어넣는 것은... 글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기로, 이런 행각은 오토픽션이라는 유행과 결을 같이하는 것 같다

현실을 마음대로 자르고 붙이는 행위... 없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여기는 걸 기억이라고 부르는...

가짜 황제가 그림자 왕이며 나아가 그와 함께 싸운 자들도 모두 그림자 왕이라고 하는데

죽은 자를 영면에 들게 하기 위해 모두가 아는 거짓말을 사실인 양 들먹여도 괜찮은 것인가? 모두가 그게 거짓말이란 걸 아니까? 이건 소설이니까?

이렇게 쓰고보니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문득 씹덕계의 초명작 괭이갈매기 울 적에가 생각난다

괭갈은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소설은...잘 모르겠다. 비슷한 주제라고는 생각하는데 말이다...

이 소설 안에서는 그게 현실인 것인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왕을 굳이 이야기에 넣은 이유를... 모르겠다. 비중도 크지 않고 분량도 많지 않고

전쟁에 희생된 잊혀진 망자들을 기리고 바르게 묻어주겠다는 주제에 꼭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고

여성 주동인물들은 그림자 왕의 호위병으로서 활동하는데 그 그림자 왕은 존재한 적이 없다면, 여성들이 활약한 게 맞냐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그림자 왕의 호위병 말고도 여러 방면에서 여성들이 활동하긴 하는데... 거참...

또 이 이야기가 ‘진짜 황제’를 긍정하는 건지 부정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정신분석적인 견지에서 남성적인 폭력을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아들을 요구하고, 부성애를 갈구하고, 근친상간적인 욕망을 아직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한 남성 캐릭터들이

강간하고, 파괴하고, 죽이고, 모욕한다

물론 여성 가해자도 남성 피해자도 나오지만, 근원적인 원인이 남성적인 욕망에 있다고 쓰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진짜 황제’ 역시 피해자면서 가해자다

그럼, 주인공인 여성들이 애국심을 불태우는 장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남성적 욕망이 원인이라면 국가도 역시 남성적 제도가 아닌가? 국가와 황제를 긍정할 수 있는가? 마지막의 황제 퇴위 시위는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일리아드, 아이다, 성경 등을 자주 인용하고 특히 아이다와 일리아드의 내러티브를 따라간다는 표시를 자주 내는데 나는 저것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므로,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이다

소설 안에서 적당히 설명해주긴 하는데 말이지.. 아이다는 적국의 수장을 사랑하게 된 에티오피아 공주이고, 아이다의 아버지와 진짜 황제가 동일시되고, 이탈리아 대령은 적들을 멤논이라고 부르고... 등등

어쨌든

이렇듯 그 구조를 거의 파악하지 못한 소설을 괜찮았다고 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에티오피아인들의 고통과 모욕과 분노는 정말로 현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이라고 쓰지 않았다. 이 부분은, 고통받은 자들은, 에티오피아인이지 여성만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나의 심금을 울렸다. 역사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전근대의 불합리한 신분제도와 최근의 침공당한 역사와 삶 속에 자리잡아 지울 수 없는 침공의 흔적들을 말한다)

또 번역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미문이 많아 좋았다. 공감각적 표현이라고 하나? 빛과 그림자를 마치 비단이나 칼처럼 쓴다. 바람을 물로, 고통을 어둠으로, 자아를 무의식으로 쓴다. 평소 이런 부분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 소설은 아주 좋았다

참. 이탈리아인도 한 명 고생을 하는데, 그는 사실 유대인으로 밝혀진다. 이건 정말 짜치긴 하지만 어쩔 수도 없다. 이탈리아인은 무조건 악이라고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가장 쉽고 대안이 없는 선택지를 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