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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시리즈의 독서가 끝이 났다. 사실 최근에 번역된 5서가 남아있으니 끝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5서는 소설의 진위 논란이 있기에 아직은 읽어볼 생각이 없어 일부로 제외하였다. 훗날 기회가 될 때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소설 자체는 나온 지 상당히 시간이 지났기에 지금 읽기엔 낡은 구석이 여럿 존재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실소를 넘어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이나 대부분은 옛날이야기를 읽는 정도의 기분이 들게 한다. 물론 이 정도 생존한 소설이라면 그 존재성 자체가 주는 의미가 소중할 것이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2대에 걸친 거인족에 대한 소설이다. 1권은 거인족의 왕 가르강튀아에 대해, 2권부터는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에 대해 다룬다. 사실, 시리즈 대부분의 비중을 팡타그뤼엘이 차지하기에 이어지는 4개의 소설보다는 3개의 연작 소설과 하나의 외전처럼 느껴진다. 마치 호빗과 반지의 제왕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르강튀아보단 팡타그뤼엘이 나오는 부분이 더 재밌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문학사에서 볼 때 소설의 시초에 가까운 산문 문학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데카메론이라는 작품이 있으나 여기서부터 소설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모호하다. 단편 소설집 정도면 모를까 장편 소설을 통한 본격적인 소설사의 시작으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보통 소설의 시초라 하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록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이 돈키호테에 비해 덜 정돈되었고 날 것과 같은 상태의 작품이긴 하나 이때부터 소설사의 시작을 정의하여도 충분할 정도로 이 작품은 ‘소설스럽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 한다면 언어유희와 외설성이 아닐까 한다. 소설 속 대사 대부분은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하며 이를 설명해주는 각주만 한 챕터에 20개 가까이가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대화 도중 하나의 낱말을 쪼개 새로운 의미로 바꿔 말하는가 하면 비슷한 발음의 다른 단어를 통해 담화 전체를 우스꽝스럽게 바꾸어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한 챕터 전체를 언어유희 낱말들의 모음으로 만들어버려 소설보다는 단어장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서술에 의해 간혹 소설의 서사가 지연되어 세 챕터는 더 가야 스토리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소설은 또한 매우 외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기와 관련된 단어는 등장인물들에게 일상이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상대편의 이름은 물론 아침인사를 아예 성기로 치환하여 말하기도 한다. 주인공을 제외하고 가장 비중이 큰 파늬르주라는 인물은 거의 성에 미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화 주제의 대부분이 성관계 및 성기에 관한 것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시골의 수컷 개를 보는 기분이다. 앞서 언급한 언어유희와 외설성이 결합하게 되면 이런 내용의 담화가 쏟아져 나오면서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한다. 말 그대로 인류에게 너무 이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소설의 신비로움을 확인할 수 있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에서는 교훈은 물론 깊은 철학도, 메세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하나를 꼽자면 잘 먹고 잘 마시여 즐겁게 살자? 이러한 라블레의 행동은 마치 어떻게든 독자들이 이 소설이 깊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고뇌하는 현대 소설가들의 노력을 비웃는 듯하다. 그저 언어유희의 나열과 외설적인 담화를 통한 우스꽝스러움만이 부각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특징을 통해 이 소설을 비판할 것이다. “이딴게 무슨 소설이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보아라! 그들의 소설이 얼마나 깊은지, 통찰력이 뛰어난지 확인해라! 얼마나 아름다운 메시지를 주는가! 얼마나 깊은 철학을 보여주는가!”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소설 속의 메시지는 위키에 정리된 내용만 읽어도 파악이 가능한 요소들이다. 아니 아예 소설을 읽지 말고 관련 논문을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소설 자체를, 원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소설을 읽는다면 상상에서 창조된 텍스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것을 보기 위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텍스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현대의 독자들은 소설을 감상하면서 소설 자체보다는 그 이후의 것에 너무나도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을 읽고 남는 것, 얻는 것 등등 소설의 감상 도중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은 배제한 채 텍스트가 지나간 자취에 남은 먼지 속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 믿으며 돋보기를 들고 마구 헤집는다. 결국 소설을 감상한다는 행위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고 그저 뒤에 나오는 행동을 위한 징검다리가 되어버린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종교, 철학, 초인, 결혼 따위의 요소들은 잘만 찾아내면서 만연체 서술의 미학과 무의식의 탐구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물론 메시지를 알기 위한 소설의 해석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비평이 존재한다. 그러나 비평은 감상의 뒤에 위치한다. 감상이 선행되지 않는 비평 및 해석은 그저 자기위안을 위한 퍼즐 맞추기일 뿐이다. 나는 독자들이 더 이상 소설 속 메시지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자체의 묘사에, 문장의 전개에, 소설가가 어떤 부분을 선택하여 묘사하였고 어떤 부분을 생략하여 그려냈는지, 형식의 어떤 새로움을 보여주는지, 어떻게 표현했는지, 소설 그 자체를 먼저 보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메시지는 그 다음으로 미뤄도 충분하다.
소설사의 가장 앞에 위치한 순수한 소설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모습을 보아라. 그는 가르강튀아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웃음을 단 하나만을 위해 이 긴 연대기를 썼다. 그리고 가장 보잘 것 없는 그의 의도가 이후 500년 가까이 생존할 새로운 형식의 문학을 창조하였다. 아직 어떠한 고뇌도 하지 않는 소설의 가장 원초적이며 때 묻지 않은 모습을 가진 이 작품은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에서 영원히 낡지 않을 그것은 바로 라블레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소설 감상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다.
주딱님 잠은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나세여 늙어서 고생하게 됩니당
와! 구조주의! - dc App
정작 라블레 본인은 (의학박사이기도 했지만) 수도사이자 사제 신분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성직자였기 때문에,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하였고 그냥 독신으로 살았음. 심지어 말년에는 주교 서품까지 받았으나 (금지서적을 썼다는 이유로) 취임도 못하였고, 따라서 작가 본인이 정말로 누리고 싶었으나 누릴 수 없었던 세속적 욕망들을 작품 속에서 마음껏 펼쳤다고 생각되었음. 딴은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시리즈는 웃자고 놀자고 쓴 책인데, 그것을 가지고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그런 책이라고 생각함. 작가가 살아 있었던 당대에도 그러했고, 죽고 나서도 그런 것 같음. 진지하게 읽기보다는 그냥 이 책은 놀자판이구나 그러면서 읽는 게 더 나았음
쿤데라가 그랬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그러면서 파늬르주의 행동에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되는 날이 두렵다고 에세이에 썼었는데 참...... 모든 것에 진지빨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