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췌한 책 제목: 필립 로스, 왜 쓰는가 )


이 인터뷰는 내가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 번역 원고를 읽은 뒤 그와 나눈 두 번의 대화를 압축한 것이다. 첫 대화는 그가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을 때였고, 두번째는 그가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의 출발지는 프랑스였다. 1975년 이래 쿤데라 부부는 프랑스 렌에서 망명자로 살면서 그곳 대학에서 가르치다 지금은 파리에 있다. 대화를 나눌 때 쿤데라는 가끔 프랑스어를 사용했지만 대부분 체코어를 썼고 부인인 베라가 우리 사이에서 통역 역할을 해주었다. 최종 체코어 텍스트는 피터 쿠시가 영어로 번역했다.



로스: 세상의 멸망이 곧 다가올 거라고 생각하나요?

쿤데라: 그건 끝이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로스: 내일 또는 모레

쿤데라: 세상이 멸망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로스: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걱정할게 없겠군요

쿤데라: 반대입니다. 오랜 세월 인간의 마음에 어떤 공포가 존재해왔다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뭔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로스: 어쨌든 이런 걱정이 선생님의 최신간에 담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명백히 유머러스한 성격의 이야기들을 포함해서요.

쿤데라: 만일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나에게 '언젠가 너희 나라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걸 터무니없다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자기 나라는 일종의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고 당연시하죠. 하지만 1963년 러시아 침공 뒤 체코인은 모두 자기 나라가 유럽에서 조용히 지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우크라이나인 사백만 명이 세상이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중에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또는 리투아니아인처럼. 17세기에 리투아니아가 유럽에서 강국이었다는 거 아세요? 그런데 오늘날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인을 마치 반쯤 사라진 부족처럼 은폐해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바깥세상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문객을 차단하고 있죠. 나는 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러시아가 이 나라를 해체해서 차츰 자기 문명으로 흡수해 들이려고 무슨 짓이든 할 거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들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러나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만으로도 삶에 대한 전체적인 감각이 변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나는 유럽조차 약하다고, 죽을 수 있다고 보고 있 습니다.

로스: 하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 아닐까요?

쿤데라: 문화사의 개념으로서 동유럽은 러시아이고, 아주 구체적인 역사는 비잔틴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동유럽의 한 부분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맨 처음부터 그들은 고딕, 르네상스, 종교개혁 등 서방 문명의 위대한 모험에 참여했습니다. 사실 바로 이 지역이 그런 운동의 요람이었죠. 바로 이곳에서, 중부 유럽에서, 근대 문화는 정신분석, 구조주의, 십이음음악, 바르톡의 음악, 카프카와 무질의 새로운 소설 미학 등 가장 큰 추동력을 발견했습니다. 전후 러시아 문명이 중부 유럽 (어쨌든 그 주요한 부분)을 합병함으로써 서방 문화는 중력의 핵심적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우리 세기의 서양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고, 우리는 중부 유럽의 종말이 유럽 전체 종말의 출발점이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로스: 프라하의 봄 동안 선생님의 소설 농담과 단편집 우스운사랑들은 십오만 부를 찍었습니다. 러시아 침공 뒤 선생님은 영화 아카데미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선생님 책은 공공도서관 서가에서 전부 치워졌습니다. 칠 년 뒤 선생님 부부는 차 뒷좌석에 책 몇 권과 옷가지 몇 벌을 던져넣고 프랑스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선생님은 가장 널리 읽히는 외국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망명자라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쿤데라: 작가로서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는 경험은 엄청난 혜택입니다. 여러 면에서 보아야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죠. 프랑스에서 나온 내 신작(웃음과 망각의 책)은 특별한 지리적 공간에서 전개됩니다. 프라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서유럽의 눈으로 보는 반면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은 프라하의 눈으로 봅니다. 두 세계의 만남이죠. 한쪽에는 내가 태어난 나라가 있습니다. 불과 반세기 동안 이 나라는 민주주의, 파시즘, 혁명, 스탈린주의의 공포만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의 해체, 독일과 러시아의 점령, 대량 이주, 또 자기 땅에서 서양이 죽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결과 역사의 무게에 눌려 밑으로 가라앉고 엄청나게 회의적인 태도로 세상을 봅니다. 다른 한쪽에는 프랑스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몇 세기 동안 세상의 중심이었고 지금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적 자세만 즐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어떤 위대한 행동을 할 거라는 서정적이고 신경증적인 기대지만 그것은 오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절대 오지 않을 겁니다.

로스: 선생님은 프랑스에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기에서 문화적으로 편안하다고 느낍니까?

쿤데라: 나는 프랑스 문화를 엄청나게 좋아하고 또 거기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특히 좀 오래된 문학에 나에게는 모든 작가 가운데 라블레가 소중합니다. 또 디드로도 나는 그의 운명론자 자크를 로런스 스턴 만큼이나 사랑합니다. 이들은 소설 형식에서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실험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험은 말하자면 재미있고,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데 이것은 지금 은 프랑스 문학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없으면 예술의 모든 게 의미를 잃죠. 스턴과 디드로는 소설이 위대한 게임이라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소설 형식의 유머를 발견했죠. 박식한 사람들이 소설의 가능성이 다 소진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을 들으면 나는 정반대의 느낌을 갖게 됩니다. 소설이 그 역사에서 많은 가능성을 놓쳤다는 것. 예를 들어 스턴과 디드로에게 감추어져 있던 소설 발전을 향한 충동은 어떤 계승자도 이어받지 못했습니다.

로스 : 웃음과 망각의 책을 소설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텍스트 안에서 선생님은 선언합니다. 이 책은 변주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그래서 이건 소설입니까 아닙니까?

쿤데라: 나 자신의 전적으로 개인적인 미학적 판단으로 보자면 이것은 사실 소설이지만 이런 의견을 누구에게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설 형식 안에는 엄청난 자유가 잠재해 있습니다. 고 정관념에 따른 어떤 구조가 소설의 침해할 수 없는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로스:  하지만 당연히 소설을 소설로 만드는 것이 있고 이것이 그 자유를 제한하지요.

쿤데라: 소설이란 만들어낸 인물들과 노는 것에 기초한 긴 종합적 산문입니다. 이게 유일한 제한이죠. 종합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모든 면에서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하게 주제를 파악하고자 하는 소설가의 욕망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이러니가 담긴 에세이, 소설적 서사, 자전적 단편, 역사적 사실, 환상의 나래. 소설의 종합적 능력은 이 모든 것을 결합하여 다성음악의 성부들처럼 통일된 전체를 만들 수 있죠. 어떤 책의 통일성은 플롯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제공할 수 있습니다. 내 최근 책에는 그런 주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웃음과 망각.

로스: 웃음은 늘 선생님한테 가까웠지요. 선생님 책들은 유머나 아이러니를 통해 웃음을 자극합니다. 선생님의 인물이 불행해지는 것은 유머 감각을 잃은 세계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쿤데라: 나는 스탈린 공포정치 시기에 유머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당시 나는 스무 살이었죠. 나는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면 늘 스탈린주의자가 아닌 사람, 내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유머 감각은 인정을 받는다는 믿을 만한 표시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유머 감각을 잃고 있는 세계에 공포를 느껴왔습니다.


로스: 하지만 웃음과 망각의 책에는 다른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짧은 우화에서 천사들의 웃음과 악마의 웃음을 비교합니다. 악마는 신의 세계가 자신에게 의미 없어 보이기 때문에 웃지요. 천사들은 신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뻐서 웃습니다.

쿤데라: 네, 인간은 동일한 생리학적 표현. 웃음으로 두 가지 서로 다른 형이상학적 태도를 표현합니다. 새로 판 무덤의 관에 누군가의 모자가 떨어질 때 장례식은 의미를 잃고 웃음이 태어납니다. 두 연인이 손을 잡고 웃음을 터뜨리며 초원을 달려갑니다. 그들의 웃음은 농담이나 유머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기쁨을 표현하는 천사들의 진지한 웃음입니다. 두 가지 웃음 모두 삶의 기쁨에 속하지만 극단으로 몰고 가면 이중의 묵시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천사-광신자의 열광적인 웃음으로, 이들은 자신이 있는 세계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쁨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목매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다른 웃음은 반대편에서 들려오는데,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고, 심지어 장례식도 우스꽝스럽고 집단 섹스도 단순한 희극적 팬터마임이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삶의 경계에는 두 개의 깊은 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쪽에 있는 틈은 광신이고, 반대편에 있는 틈은 절대적 회의주의입니다.

로스: 선생님이 지금 천사들의 웃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생님의 이전 소설들에서 "삶에 대한 서정적 태도"라고 부르던 것을 가리키는 새로운 표현입니다. 한 책에서 선생님은 스탈린주의 공포시대를 교수형 집행자와 시인의 치세라고 규정하고 있지요.

쿤데라: 전체주의는 지옥일 뿐 아니라 낙원의 꿈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 살고, 공통된 단일한 의지와 신앙으로 통일되어 있고, 서로 비밀이 없는 세계에 대한 오랜 꿈. 앙드레 브레통도 자신이 살고 싶다는 유리 집에 관해 말할 때 이런 낙원을 꿈꾸었죠. 만일 전체주의가, 특히 그게 등장한 초기 단계에 우리 모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고 또 모든 종교에 깊이 뿌리를 내린 이런 원형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낙원의 꿈이 현실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방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래서 낙원의 통치자들은 에덴 옆에 작은 굴라그를 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굴라그는 점점 커지고 완벽해지는 반면 그 옆의 낙원은 점점 작아지고 가난해집니다

로스: 선생님 책에서 위대한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는 낙원과 수용소 위로 솟구치며 노래를 부릅니다. 책에서 언급한 이 역사의 한 조각이 진짜입니까?

쿤데라: 전쟁이 끝난 뒤 폴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를 버리고 내가 "전체주의의 포에지"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의 가장 위대한 옹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형제애나 평화나 정의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래했고, 동지애를 지지하며 고립을 반대하여 노래했고, 기쁨을 지지하며 우울에 반대하여 노래했고, 순수를 지지하며 냉소주의에 반대하여 노래했습니다. 1950년 낙원의 통치자들이 엘뤼아르의 프라하 친구인 초현실주의자 자비스 칼란드라에게 교수형을 선고했을 때 엘뤼아르는 개인을 넘어서는 이상을 위하여 우정이라는 개인적 감정을 억누르고 자기 동지의 처형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교수형 집행자는 살인을 했고 시인은 노래를 했습니다.
단지 시인만이 아닙니다. 스탈린 공포정치의 시기 전체가 집단적인 서정적 망상의 시기였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 완전히 잊혔지만 이것이 사태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합니다. 혁명은 아름답다. 악한 것은 거기에서 일어나는 공포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악은 그 아름다운 것 안에 이미 존재하고 지옥은 낙원의 꿈 안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지옥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의 기원인 낙원의 본질을 검토해야 합니다. 강제수용소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낙원을 거쳐 강제수용소로 통하는 전체주의적 포에지를 거부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요즘 전세계 사람들은 굴라그라는 관념을 명백히 거부하지만 여전히 전체주의적 포에지의 최면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고 엘뤼아르가 수금을 타는 위대한 대천사처럼 프라하 위로 솟구칠 때 부르던 그 서정적인 노래의 곡조에 맞추어 새 굴라그로 행진해갑니다. 칼란드라의 몸을 태우는 연기가 화장터 굴뚝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는데도요.

로스: 선생님 산문의 중요한 특징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항상적 대립입니다. 하지만 사적인 이야기가 정치적 배경으로 벌어진다거나 정치적 사건이 사적인 삶을 잠식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오히려 선생님은 정치적 사건들이 사적인 사건들과 똑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그래서 선생님의 산문은 정치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석이 됩니다.

쿤데라: 인간의 형이상학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똑같습니다. 그 책의 다른 주제를 보자면, 그것은 망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커다란 사적 문제입니다. 자아의 상실이라는 의미의 죽음이죠. 하지만 이 자아란 뭘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것의 총합입니다. 따라서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의 상실이 아니라 과거의 상실입니다. 망각은 삶 안에 늘 존재하는 죽음의 한 형태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죽은 남편의 사라져가는 추억을 보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내 여주인공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망각은 또 정치의 큰 문제이기도 하죠. 작은 나라에서 민족의식을 박탈하고 싶을 때 강국은 조직화된 망각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지금 보헤미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지난 십이 년 동안 현대 체코 문학 가운데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것이 출판된 적은 없습니다. 죽은 카프카를 포함하여 체코 작가 이백 명이 판매 금지되었습니다. 체코 역사학자 백사십오 명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역사는 다시 쓰이고 기념물은 파괴되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의식을 잃는 나라는 점차 자아를 잃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상황이 우리가 늘, 매일,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마주하는 망각이라는 평범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잔인하게 드러내준 셈입니다. 정치는 사적인 삶의 형이상학의 가면을 벗기고, 사적인 삶은 정치의 형이상학의 가면을 벗깁니다.

로스: 변주들이 이어지는 선생님의 책 6부에서 주요 여주인공 타미나는 아이들만 있는 섬에 도착합니다. 결국 아이들이 이 여자를 쫓아다녀 죽음에 이르게 하지요. 이게 꿈입니까, 동화입니까, 알레고리입니까?

쿤데라: 나한테는 알레고리, 즉 어떤 주제를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만들어낸 이야기보다 이질적인 것이 없습니다. 사건은 현실이든 가상이든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야 하고 독자는 그 힘과 시에 순진하게 유혹되어야 합니다. 나는 늘 그 이미지에 쫓겨왔고 인생의 한 시기에는 그게 계속 꿈에 반복해서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이들의 세계에 들어가 있게 되는데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 모두 서정화하고 사모하는 유년은 순수한 공포로, 덫으로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내 책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 설명하고 밝혀주고 보완하는 다성음악이죠. 그 책의 기본적인 사건은 전체주의 이야기로, 이것은 사람들에게서 기억을 박탈하고 그 결과 사람들을 아이들의 나라로 다시 조직합니다. 모든 전체주의가 이렇게 하죠. 또 아마도 우리의 기술 시대 전체가 이렇게 할 겁니다. 미래 숭배로, 젊음과 유년 숭배로, 과거에 대한 무관심과 생각에 대한 불신으로 가차없이 어린 아이의 수준으로 획일화하는 사회의 한가운데 있는 기억과 아이러니를 갖춘 성인은 아이들의 섬에 있는 타미나 같은 기분이 됩니다.

로스: 선생님의 거의 모든 소설, 실제로 선생님이 새로 낸 책에서는 모든 개별적인 부분들이 굉장한 성교 장면에서 대단원을 맞이합니다. “어머니"라는 순수한 제목이 달린 부분조차 프롤로그 와 에필로그가 달린 삼자 간 섹스의 긴 장면에 불과합니다. 소설가로서 선생님에게 섹스란 어떤 의미입니까?

쿤데라: 섹슈얼리티가 더는 금기가 아닌 요즘 단순한 묘사, 단순한 성적 고백은 눈에 띄게 지루해졌습니다. 로런스는 얼마나 구식으로 보이는지. 심지어 외설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헨리 밀러 조차 그렇죠! 그럼에도 조르주 바타유의 어떤 에로틱한 구절들은 여전히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마도 서정적이 아니라 철학적이기 때문이겠죠. 나에게는 모든 게 대단히 에로틱한 장면에서 끝난다는 선생님 말은 맞습니다. 나에게는 신체적인 사랑의 장면이 매우 날카로운 빛을 만들어내 갑자기 인물의 정수를 드러내고 그들의 삶의 상황을 요약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위고는 타미나와 사랑을 나누고 그때 타미나는 죽은 남편과 잊어버린 휴가들을 필사적으로 생각하려 하죠. 에로틱한 장면은 이야기의 모든 주제가 수렴하고 가장 깊은 비밀이 자리잡은 중심입니다.

로스: 마지막 부분인 7부는 사실 오로지 섹슈얼리티만 다룹니다. 왜 여주인공이 죽는, 이보다 훨씬 극적인 6부나 다른 부분이 아니라 이 부분이 책의 마지막에 놓인 겁니까?


쿤데라: 타미나는 비유적으로 말해서 천사들의 웃음 속에서 죽습니다. 반면 책의 마지막 부분을 통하여 그와 반대되는 종류의 웃음, 사물이 의미를 잃을 때 들리는 웃음이 울려퍼집니다. 어떤 가상의 분리선이 있고 그것을 넘어가면 사물이 의미가 사라지면서 우스꽝스러워지는 듯합니다. 사람은 자문합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 아닐까? 출근하는 것이? 뭔가를 위 해 노력하는 것이? 내가 그런 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나라에 속한다는 것이? 사람은 이런 경계선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며 자기도 모르게 쉽게 건너편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그 경계선은 어디에나 존재하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심지어 모든 사람의 가장 깊고 가장 생물적인 것, 섹슈얼리티에도, 바로 그게 삶의 가장 깊은 영역이라는 점 때문에 섹슈얼리티에 제기되는 문제는 가장 깊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변주들이 이어지는 내 책이 이것을 제외한 어떤 변주도 없는 상태에서 끝날 수 있습니다.

로스: 그러면 이것이 선생님의 비관주의에서 가장 멀리 나아간 지점이라 할 수 있을까요?


쿤데라: 나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라는 말을 경계합니다. 소설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아요. 소설은 문제를 탐색하고 제기합니다. 나는 내 나라가 망할지 아닐지 모르고 내 인물 가운데 누가 옳은지 모릅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서로 맞서게 하고 이런 수단으로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모든 것에 답을 가지는 것에서 옵니다. 소설의 지혜는 모든 것에 질문을 가진 데서 오죠. 돈키호테가 세상 안으로 나섰을 때 그 세상은 그의 눈앞에서 수수께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첫 유럽 소설이 그 이후 소설 역사 전체에 준 유산입니다. 소설가는 독자에게 세상을 문제로 파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태도에는 지혜와 관용이 있죠. 신성불가침의 확실성에 기초한 세계에서 소설은 죽습니다. 전체주의 세계는 마르크스를 기초로 하든 이슬람을 기초로 하든 다른 어떤 것을 기초로 하든 질문이라기보다는 답의 세계입니다. 그곳에 소설의 자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요즘 전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해보다는 심판을, 묻기보다는 답하기를 좋아
하고 그래서 소설의 목소리는 인간 확실성의 시끄러운 어리석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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