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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연인을 위해
물려받은 책임을 위해
마주한 진실을 위해
새로운 사랑을 위해
한 줄 요약
이도저도 아닌 현실을 감당하기
2024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수상작이다. 이걸로 리디 셀렉트에 올라온 2022~2024 한국과학문학상은 전부 클리어한 셈. 올해 올라올 2025만 학수고대하는 중이다.
도입부까지 쓴 시점에서 나름 각을 잡고 쓰려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재작년, 작년 수상작인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라스트 젤리 샷과 비교해서 분량이 상당히 짧다. 종이책 기준 236쪽이라는데, 작가노트와 심사평, 기타 제본을 제외하고 책 분량만 담백하게 보면 200쪽 살짝 안 되는 수준이다.(리디 셀렉으로 보면 판형 조절 때문에 거의 180쪽 안쪽이다)
사실 그래서 읽기 전에 불안했었다. '장편' 치고 이렇게 짧으면 이야기가 맥이 없진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맥이 없는 건 아니고...... 이 얘기는 조금 있다가 아쉬운 점을 풀면서 다루겠다. 하여튼 2022에서 최악을 맛보고 2023에서 익숙한 K-SF를 봤던 나로선 2024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그 예상만큼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평작이다. 물론 평작이라 함은 겉절이SF에서 엄청나게 뛰어난 작품이란 뜻이다. 대놓고 재밌는 김필산, 조서월, 최우준에 비하면 아쉽긴 해도, 그렇다고 최악의 라인업이나 평작이라고 불러주긴 힘든 아쉽고 안타까운 작품들에 비하면 김아인의 스파이라는 분명 내실이 있고 나름대로 단단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되지 못한 건 결국 짧은 분량이 원인으로, 혹은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에피네드라는 인간 정상화 전염병과 AE라는 인간 전산화 기업이 두 개의 큰 축으로 세워진 세계관이다. AE는 Artificial Eden(인공적인 에덴)의 줄임말로, 뇌와 척수를 분리해 매트릭스에 연결해주는 기업이다. 에피네드에 걸린 감염자들이 주로 이용하며, 이 매트릭스에선 매우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주인공 웨이쉬안은 AE에 근무하는 자로서, 하는 일은 뇌와 척수가 분리되고 남은 시신을 흔적 없이 제거하는 노동자다. 페이라는 능력있는 기자 여친을 두고 있었는데, 페이가 AE의 최초 전산화 실험자이자 테스트 서버를 뚫고 네트워크로 도망친 '신'과 만나 거래했고, 그 뒤로 에피네드에 감염되더니 그대로 AE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 AE의 뇌과학 연구1원인 하야바라시 가스미와 엮이면서 좌충우돌 끝에 AE의 숨겨진 목적과 진상을 모조리 밝혀내고, 빌런인 황 신부도 물리치면서 현실과 AE의 평화를 가져오는 게 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다.
장점은 대충 이러하다.
첫째, 세계 조형이 나쁘지 않게 잘 잡혔다.
정확히는 AE에 한정해서지만, 어쨌든 AE가 어떻게 굴러가고, 주인공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AE 건물에 잠입해서 원하는 목표를 찾고, AE가 숨겨왔던 신기술이 뭐고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AE가 구체적으로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이는 스파이라라는 제목의 의미와도 직결된다),...... AE와 연관된 설정들은 전부 설득력을 가지고, 소설 내에서 독자에게 잘 설명되고, 소개되고, 받아들여진다.
'작가가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아셈'이란 태도를 자주 취하는 K-SF의 눈물 겨운 서술을 보다가 이런 걸 보면 선녀가 정말 따로 없을 정도다. 물론 문제가 있다면 이런 설정이 '잘 작동한다'라고 느끼는 건 어디까지나 AE 관련 범주뿐이라는 점이다.
둘째, 전개를 빠르지만 합리적으로 잡았다.
진행하는 내내 급발진도 없고, 이해가 안 가서 뒤로 돌아가는 지점도 없었다. 주인공의 심경 변화와 그 변화를 위한 사건 역시 합리적으로(장면 자체는 감성적이지만) 제공되었고, 적절한 반전과 함께 악역이라 부를 만한 인물(황 신부)의 등장으로 긴장감까지 올렸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데엑마 느낌으로 상황이 거의 다 정리되고 결말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 처리들이 떠오르지만...... 뭐, 겉절이 SF에서 이정도면 제법 깔끔하게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전개에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전개의 문제와 별개로 결말 역시 조금은 게으르게 끝냈다는 인상인지라 그것도 단점에 서술함.
셋째, 악역이 나쁘지 않았다.
악역으로 나온 '황 신부'를 볼 때, 주인공과 충돌하는 장애물 역할로서 바라보면 황 신부는 상당히 적절하게 그려졌고, 작중에서 활약했다. 퇴장은 상당히 급작스럽게 이뤄지긴 했지만, 주인공의 포지션상 깔끔하게 치울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처리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등장부터 퇴장까지 겉절이 특유의 허접한 악역 조형에 비하면 황 신부는 나름대로 포스도 있고 보여줄 건 보여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게 전부였으면 '나쁘지 않았다'라고 말하진 않았지...
장점은 대충 이렇게 꼽는데, 단점은 아래와 같다.
첫째, 에피네드의 배경화
소...솔직히 말해서 에피네드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농담 아니라 작중에서 에피네드가 하는 역할이 없다. 배경으로 등장하고 배경으로 설명되고 배경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지만, 에피네드를 싹 빼버리고 그 자리를 적당히 작중 내에서 말 되게 묶어놓으면 애초에 있었는지조차 눈치 못 챌 수준이다. AE가 근로자들에게 주사하는 정체불명의 백신도 맥거핀 취급하기엔 솔직히 그냥 미회수떡밥인지라......
에피네드가 작중에서 제일 크게 작동하는 건 작중 분위기를 음울하게 까는 건데, 그 이상으로 뭘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냥 그렇다더라~ 수준에 불과하다. 인간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단 체감이 작중에선 전무하다. 물론 200쪽도 안 되는 장편에 AE 설정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분량이 벅찰 수 있다. 비단 에피네드 뿐만 아니라 AE를 제외한 주변부 설정이 좀 엉성하고 추상적으로 구성된 느낌이 강하다.
둘째, 기껏 잡아놓은 디테일을 뭉개는 기술 서술
결말부 로밍셀을 통한 디지털세카이 접속은 첫 번째 장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서술 자체를 까는 건 아니고, 여태 AE를 통해 잡아놓았던 초중반의 '사실감'이란 무게를 지니던 묘사가 결말부 로밍셀 접속부터 완전히 씻긴 듯 사라졌다. 결말부 묘사만 보면 이게 판타지 소설인지, 겜판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 아니, 사실 진짜로 읽는 내내 주술회전 결말부 이타도리 영역에서 대화하던 이타도리, 스쿠나나 소아온 1기에서 개발자랑 떠드는 주인공 생각 많이 났다. 당장 생각났던 게 이런 건데 실제로 일본 만화/애니를 접한 사람이라면 결말부 장면 구성이 기시감이 넘치다 못해서 SF로 승화를 못 시켰다는 생각이 많이 들 것이다.
차라리 에바 같은 작품이었으면 막판에 그런 뜬금없는 환상성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트릭스처럼 다뤘느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닌지라......
셋째, 이야기의 허리를 끊어먹는 전개
분량이 사실 장편이라고 하기엔 좀 짧다. 라노벨 1권 분량이나 다름없는 수준인데, 이 원인 중 하나가 전개를 자꾸 건너뛰어서 그렇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건물을 탈출해야 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탈출로를 안내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와 함께 다음날 아침으로 넘어간다. 주인공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탈출해 있고, 탈출에 대한 장면은 언급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다른 장면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악역의 부하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와 함께 납치되 어디론가 도착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중간 과정을 싸그리 날려버리는 게 세 번인가 네 번 정도 나온다.
좋게 말하면 콤팩트하고, 스피디하고,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장면만 빠르게 묘사하며, 불필요하게 분량 늘려쓰기보다 생략할 수 있는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전개를 빼겠다는 스킬로 읽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게 순문도 아니고 장르소설인데 이런 식으로 '대충 별 거 없으니까 스킵합니다'는 몰입에도 치명적이고, 이야기로서도 상당히 별로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탈출하는 순간의 긴장감이 휘발되어 이미 멀쩡히 탈출해버린 주인공을 보며 내가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며, 잡힐락말락 하는 주인공을 보며 긴장하려다가 이미 잡혀서 심문 당하는 주인공을 보며 내가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까?
그래서 작중에 긴장감이 형성되는 구간은 딱 한 군데밖에 없다. 주인공의 조력자가 납치되는 걸 막으려고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구간인데, 그때를 제외하면 긴박함... 따위는 없다고 보면 된다. 긴장감이 있으려고 해도 결말부에는 데엑마가 죄다 진상을 불어버리기 때문에 그마저 없는 편이고.
그러니까 이게 나쁘지 않게 썼는데 재미가 있냐고 하면 확실히 답하기 어려운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적어도 몰입하면서 읽진 않았다. 툭툭 끊어먹으니까 몰입할 수가 있어야지.
넷째, 수습하지 않은 열린 결말
이건 호불호의 영역이라고 생각은 한다. 대충 비유하면 주술회전에서 스쿠나랑 이타도리가 영역에서 실컷 떠들다가 이타도리가 영역을 해제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나버렸다. 가상 세계에서 해결할 사건 해결했으니 그 여파를 다루거나, 하다못해 현실세계에서의 어떤 마무리를 짓는 게 아니라 가상 세계에서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그래서 "여기서 끝?"이라는 반응이 제일 먼저 나왔다. 뭔가 더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하지 않나 싶은...... 세 번째 단점과 엮어서 생각해보면 작가가 노련한 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단단하게 짓기는 하는데, 설계부터 시공까지 찐빠를 자꾸 내는 느낌이랄까.
다섯째, 악역의 단순화
악역인 황 신부는 인간 전산화를 통해 제2의 영생을 제공하는 AE에 반대하는 종교측 인물로 나오면서, AE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삼합회 마피아스러운 행동력과 조직력을 갖춘 빌런이다. 사실 황 신부라고 하지만 마피아 보스스러운 모습만 많이 보여줬을 뿐이다.
악역으로서 황 신부가 가진 신념이나 기치, 논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악역의 기능인 '주인공 방해' 역할만 매우 충실하게 잘 이행한 수준이다. 이것만 해도 겉절이 SF 중에선 상대적 선녀라는 게 웃기지도 않는 현실이지만, 소레가 겐지츠.
심지어 작중 주제로 따지면 황 신부는 중간보스에 불과하며, 진짜 보스는 AE인데, AE야말로 더 얕게 다뤄지고 조형돼 데엑마에게 까이기만 하는 수준이다. 뭘 한 것도 거의 없음. 이미 해놓은 걸 주인공에 의해 저지당하는 수준이다.
AE가 악역이자 최종보스라는 복선 자체는 일찍이 깔렸고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서 '악역다운 포스'는 보여줬나? 라는 질문을 던지면 황 신부보다 못하단 결론만 나온다. AE가 최종적으로 꾸미는 일조차도 사실 원래대로라면 "럴수럴수이럴수가!" 라고 감탄해야 하는데, 거기에서 데엑마가 뜬금없이 "엣, 에덴이니 스파이라니, 너무 서양적인 것 아닌?www ae 개발진은 처음엔 다 동양인이었는데? 서양중심적 사고관이 너무 초웃긴www"이라고 떠드는 바람에 AE의 장엄한 계획은 유치뽕짝한 서양 중심 사고관 수준ww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폴 부제가 황 신부를 배신하고 주인공을 살리면서 희생할 때 드러난 탈종교적 휴머니즘조차도 데엑마를 통해 드러난 반서양적 태도랑 겹쳐지면 그냥 카톨릭을 위시한 서양 문화에 무슨 악감정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지점까지 추락할 수도 있다.
AE가 작중에서 계속 '기업 그 자체'로만 다뤄지는 것 역시 종교계 측 중심 인물이었던 '황 신부'라는 명확한 대표자에 비해 너무 부실하고 약한 게 문제기도 했다. AE의 설정 다른 건 다 좋았는데 '대표자'가 없어서 악역 조형에 실패한 게 좀 안타까웠음.
여섯째......까지 언급하면 평작이라고 했으면서 너무 까는 거 아니냔 소리 나오기 쉬우니 이쯤 해두자.
까고보면 이런데 어쨌든 이런데도 불구하고 여타 겉절이 SF보단 낫다는 게 내 감상이다. 단점보단 장점을 좀 더 봐주길 wind.
그리고 2024 한과상이다 보니까 당연하게도 구병모가 심사했는데, 이미 2024 한과상 단편들 리뷰하면서도 언급했었지만, 여기서도 구병모가 똑같이 언급하기에 아예 심사평 일부를 따옴.
‘과잉’ 혹은 ‘중독’이라는 말과 결부되어 부정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사회문제로 떠오른다. 세상 곳곳에 따 붙여진 숏폼short-form 영상과 같이 신속한 도파민을 분비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면 분명 시선을 잡아채는 후킹에는 성공하고 화제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적어도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면 도파민 생성에 온 역량을 기울이지 않기를 권하고 싶은데, 사실 텍스트로 이루어진 소설은 확실한 자극과 스피디한 파급력에 있어서 영상매체에 상대가 되지 못할 운명이다. 영상 감독은 대상을 화면에 무작정 찍어 바르는 게 아니라 카메라워크를 비롯한 연출 및 표현을 신경 쓰면서 대상을 ‘담아내는데’ 어째서 문학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모전에 응모를 하면서 스토리를 ‘담아내는’ 언어를 다루는 스킬에는 무관심한 걸까? 싶은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요즘 국문학 특: 장편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분량이 적음
사실 분량이 충분해도 억지로 늘려썼단 인상을 주기 쉽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