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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사족으로 최고의 작품은  「만년」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벚나무 동산」을 만들겠다는 다자이의 자신감은, 결과적으로는 체호프의 것과는 많이 다른 작품이 되기는 했지만, 쇠락이라는 어두운 주제를 체호프 못지않게 아름답게 그려냈으니 근거가 충분했다. 여러 번 읽었는데도 아직까지 작중의 표현들을 읽으며 감탄하게 된다.

이미 시대에 뒤처진 지는 오래고, 사실상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귀족들의 삶은 정말 쓸쓸하다. 체통을 지키기에는 현실적인 여건이 뒤떨어지고, 그렇다고 현실을 좇자니 오랫동안 누렸던 안락함이 심신을 유약하게 만들어서, 가즈코와 그녀의 가족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됐다. 이런 특수한 배경 때문에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도 섞이지 못한다. 평소에는 쇠락에 대한 인식을 억누르며 살지만,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쇠락이 체감되는 순간마다 뱀이 나타난다. 마당에서, 그리고 가즈코의 마음에서.

이럴 때일수록 억지로라도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가즈코는 자신을 둘러싼 제약들이 선명해질수록 오히려 그 너머에 있는 꿈을 선명하게 보게 된다.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가로막는 도덕을, 밀쳐 낼 수 없나요?" 가즈코는 바르게 처신하고 집안을 돌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즈코가 꿈꾸던 삶은 모범적인 삶이 아니라 불꽃같은 삶이었다.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애욕을 자유로이 발산하기를 내심 원해왔다. 그래서 가정의 해체는 오히려 가즈코가 울타리에서 나올 기회가 됐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가즈코는 마침내 도덕을 뛰어넘고 관념을 벗어나 꿈이었던 애욕을 성취한다.

사실 나는 가즈코의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다. 가즈코가 그간 해왔던 마음고생도 이해하고, 그래왔던만큼 앞으로는 자신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가즈코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침해함으로써 성취된다. 기존에 있던 관계가 진실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관계가 해체되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 여전히 의미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 의미를 침해하는 일은 가즈코의 권리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가즈코는 자식을 갈망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솔직히 좋게 보지는 않는다. 가즈코에게 자식은 일종의 징표다. 그렇게 꿈꾸던 '사랑과 혁명'을 성취하여 얻은 산물이 자식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은 동시에 개별적인 생명이다. 가즈코는 자식을 보고 자신의 이상이 초라하게나마 이뤄졌음을 확인하며 뿌듯해할 것이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태어나 보니 더 이상 귀족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출생도 천박하고 앞으로 살아갈 길도 막막한 부조리한 환경을 마주하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즈코를 응원하는 마음 또한 참기 어렵다. 머리로는 지지하지 못하는데, 가슴으로는 지지한다. 가즈코의 진지한 생각을 지켜봤기에 그녀에게 동정심이 정말 많이 든다. 그리고 가즈코의 심정에는 철저히 공감한다. "소나기가 지나간 맑은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는 이윽고 덧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내가 「사양」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꿈은, 그 내용이 현실적이든 그렇지 않든, 한 번 생기면 오랫동안 사람의 가슴에 깊이 박혀 두고두고 아픔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성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면서도 지난 일을 후회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망상을 품는다. 가즈코는 분명 합리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답다. 같은 인간으로서, 또 가슴에 무지개가 걸린 자로서, 불합리한 가즈코에게 나는 불합리한 공감을 품는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감정이다.

어쩌면 불합리한 인간의 내면과 합리적인 이성이 만드는 모순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이 철저히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양한 사상들을 설파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상을 설파하는 진정한 이유는 공감을 사고 이익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다가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공감과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를 감추려다가, 어느새 사상을 실천하는 것이 겉포장이 아니라 진짜 의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공허한 싸움판이 되고, 나오지는 이런 세상과 그 속에서 길을 잃은 자신에게 진저리가 나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보면, 체면을 지키려고 이성을 억지로 내세우는 것보다 차라리 공감을 원한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하면 정말로 사람들이 사랑해주는 그런 세상이라면 이런 고뇌에 잠기지 않아도 되는데 말하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어서 세상은 각박해진다. 어쩌면 내가 가즈코를 비판하는 것도 결국에는 극단적인 솔직함을 보이는 가즈코에게 '사상에 의거한', 혹은 '이성적인 척하며 불합리한' 나의 견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답은 가즈코를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지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양」은 이렇듯 무거운 작품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한 작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희망을 보이며 작품이 끝나지만, 그 희망이 일반적인 인식과는 너무도 달라서 오히려 독자의 수심을 깊게 만드는 작품이다. 혁명의 무지개를 가슴에 달고 새로 시작하는 가즈코를 지지하며 책을 덮을지, 꿈마저도 무책임한 가즈코의 불운을 예상하며 책을 덮을지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사양」에서 풍겨오는 고약하지만 솔직한 냄새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두 길을 사이에 두고 아직도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있다. 길을 고르지 못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가즈코를 기억하는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의 온도차로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사양」을 추천하고 싶다. 이 작품을 읽는다고 그 질병이 치유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당신 말고 더 있다는 사실, 어쩌면 솔직해질 수 없는 만인이 공유하는 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어쩌면 거기서 더 나아가 가즈코처럼 끝내 사랑과 혁명을 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