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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딜 가나 그에 관한 비판이 '빽빽'하게 쌓여 있다. 그에 관해 품었던 존경심으로도 도무지 감출 수 없을 만큼 큰 실책들이 많았다. 일방적으로 품었던 옛정이 있지만 이제 모든 감정을 거둘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진저리가 난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어서만은 아니다. 그 사람과 그다지 상관이 없는 곳에서도 댓글들은 그 사람을 소환해서 린치를 가한다. 폭락한 주식을 붙들고 괜히 역정을 내는 투자자들을 보는 기분이다. 그리고 비판자들의 풍부했던 논거들도 점점 빈약해지고 있어서, 이제는 그 사람의 책임으로 볼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비판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살해당한 사람이 극단적인 마음을 품고 자기 몸을 살해하거나 자기 자식의 살해를 지켜봐야 하는 꼴을 볼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여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어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었다.
읽는 내내 참담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시종일관 불쾌하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살해당하는 모습, 그리고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진짜 살해가 벌어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차이퉁」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 사건을 계속 추적, 보도한다!" 언론사의 선전 문구이자 가장 역겨운 문구다. 자기들도 관찰자에 불과한 주제에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으스대는 태도, 그리고 그들의 과장에 홀려 갑작스레 정의로워진 사람들. 누가 린치와 연좌제가 예전에 사라진 모습이라고 했던가? 펜은 칼보다 강하므로 린치도 연좌제도 칼보다 은밀하게 집행할 수 있다!
카타리나가 정말 결백하냐고 물으면, 솔직히 말해 그건 아니다. 카타리나가 괴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고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와는 별개로, 사회의 평온을 위해서는 사회에 협력하는 것이 옳았다. 사회의 혼란은 자신의 혼란으로 되돌아온다. 다만 카타리나는 마땅히 짊어져야 할 몫 이상을 짊어졌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진실들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으나 거기에 덧씌워진 거짓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의무가 없다. 거짓을 정정하기도 어렵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들은 얘기, 자신의 신념이 만들어낸 빈약한 연역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신부가 근거 없이 공산주의자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성도를 비난해도, 반공 체제에서 신부는 여전히 성스러운 이미지를 보장받는다. 이 얘기는 픽션에서나 일어날 이야기가 아니다. 매카시즘의 광풍은 채 백 년도 되지 않은 이야기다.
더 추악한 사실이 있다. 사람들은 '정의 자체'를 위해 정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집행하는 자신의 멋짐'을 위해 정의로워진다. 여론은 누구나 때릴 수 있는 합법적인 샌드백을 대중에게 제공한다. 카타리나가 받은 수많은 우편물들과 더러운 말들은 단순히 오해의 대가라기에는 너무 비싸다. 도파민 급식소가 열렸으니 사람들은 악령 들린 돼지떼처럼 뛰어든다. 개중에는 심지어 정의에는 관심조차 없는 작자도 있다. 혼란을 틈타 가스라이팅으로 성욕을 채우려는 작자도 있다. 하지만 그 음험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으면 그는 '악녀를 폭로하는 기자'로서 영웅이 된다.
이렇듯 카타리나는 명예를 잃어버리고 가족도 잃고, 그 대가로 복수를 감행했다. 언뜻 보면 차라리 그나마 속 시원한 이야기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자체가 완전히 믿을만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카타리나의 필체로 쓰인 것이 아니라, 그녀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여 서술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구성돼있다. 카타리나 본인의 목소리는 인용문 외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정보, 그리고 여기서 유추된 분석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카타리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마저 작중 『자이퉁』지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설계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의심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결국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결론은 이 문장으로 요약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배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판단을 내린다. 그에 따라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물론 이 과정은 자유롭게 일어나야 한다. 사회는 때때로 정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결과만을 접한다. 동기, 과정, 원인은 언론을 통해 객관적으로 접하기가 정말 어렵다. 특히 정의를 표방하며 다른 생각을 품는 자들이 언론에 들끓는 한 더욱이 그렇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의 뒤에 있는 책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칼로 살인한 자를 말로 살해하는 똑같은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정보를 누구나 접하고 만들 수 있어서 좋은 시대이자, 정보를 누구나 접하고 만들 수 있어서 나쁜 시대다. 이런 시대에 절실한 교훈을 얻었다. 정의로운 자신에 도취되지 말고, 진실을 알기까지 신중하자. 진실을 끝내 알 수 없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각자의 견해를 길러나가야 한다. 하지만 거짓에서 피어난 견해는 거짓 자체보다 더 추악해질 수 있다. 우매하게 정의를 좇는 것보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며 신중한 사람이 되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그래야 소위 말하는 2차 가해를 예방하고, 폭력이 폭력을 낳는 사태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첫머리에서 말한 댓글을 쓴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겠다. 일단 그들의 수가 너무 많고, 비판받는 사람이 명백히 잘못한 것도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게 그 정도의 용기는 없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뵐도 반공주의가 한창이던 당시에 소신껏 마녀사냥을 경고했다가 역풍을 세게 맞았다고 한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고서야 발언권을 얻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써서 자신에게 가해진 공격에 반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신에는 정말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일화다. 나도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까지는 요원한 일이다. 다만 그 용기가 생기기까지 생각을 와인처럼 숙성시키며 나를 완성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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