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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패 서사와 자아 투쟁

- 실패 서사

첫 글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이 단편집은 하나의 거대한 연작으로,
크게 세 가지 테마를 가지고 있다.

‘자아’, ‘소녀’, ‘해방’ 인데
단편집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어느정도 직감하고 있겠지만.

카프카는 자아를 찾다가 결국엔 좌절하고, 소녀를 관찰하는 일을 그만두며, 모든 것에서 해방되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 글에선 그 첫 부분, 자아를 찾다가 결국엔 좌절하는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앞서 나는 카프카적 주체가 카프카의 정신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다.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는 그런 카프카적 주체가 변용된 두가지 대표적 양상이다.

내적 자아는 저번에 다뤘던, 어쩌면 카프카의 본 모습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자아이다.
크게 몇 가지 성질을 가지는데

1. 타인과의 거리감
2. 고독의 불안
3. 소속의 자아 소실
4. 투쟁

이 정도가 되겠다.

반대로
외적 자아는 카프카가 사회와 가족에 의해 억압받아 형성된 거짓된 자아이다.
크게 몇 가지 성질을 지니는데

1. 타인을 마음대로 규정
2. 계급의식 
3. 감정 억압
4. 순종

보면 알겠지만, 내적 자아랑 완전히 대비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 거리감을 갖는 대신에, 타인을 마음대로 규정하며.
고독에서 불안을 느끼는 대신에, 자신의 계급을 생각하며 편안을 느낀다.
소속의 자아 소실에서 오는 불안 대신에, 감정을 일부러 억누르며 타인과의 마찰을 없앤다.

결과적으로 투쟁 대신 순종만이 남게 된다.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부터 <결심>까지 네 편을 이런 틀에 맞추어 바라보면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간의 투쟁으로 바라볼 수 있다.

-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자아‘ 파트의 첫 소설에서 카프카는 외적 자아에 가까운 화자를 설정한다.

앞서 말했던 외적 자아의 특징 2가지를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자.


1. 타인을 마음대로 규정


드디어 밤 열 시쯤 나는 내가 초대받은 어떤 모임이 열리고 있는 고급 주택 앞에 도착했다.
나는 예전부터 그저 겉으로만 알고 지냈던 한 남자랑 함께 왔는데, 
뜻밖에 그는 이번에 다시 나에게 접근하여 두 시간 동안이나 나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자!”하고 나는 말하고는 꼭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표시로 손뼉을 쳤다.
(중략)
그리고 내 동반자는—한 번 미소를 짓고 나서는—자신과 나의 뜻에 따랐다. 
그는 벽을 따라 오른쪽 팔을 내뻗어 눈을 감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그 팔에 기댔다. 
물론 이 미소를 나는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갑자기 어떤 수치심이 내 몸을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미소에서 처음으로 그가 시골 사람들을 속여먹는 사기꾼이라는 것,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다 알았어요!“라고 나는 말하고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중


작품에서 화자는 초대받은 고급 주택에 들어가고 싶으나, 한 남자가 그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닌다.
화자는 헤어지겠다는 표시를 내보이고, 그는 벽에 기대며 자리를 비켜준다.

여기서 화자는 그의 웃음을 보고, 그가 사기꾼이라며 그의 존재를 완전히 규정짓는다.

그러나 사기꾼의 존재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단순히 말 많은 친구라면 어떻게 할 건가?

불확실한 가능성 따윈 염두하지 않고, 상대를 자신의 생각으로 마음대로 규정짓는.
외적 자아로서의 카프카적 주체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2. 계급의식

나는 초대를 받았지 않은가, 나는 곧바로 그 점을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몹시 가 있고 싶은 곳으로 올라오도록 초대를 받은 것이지, 
여기 아래 집 문 앞에 서서 상대방의 양쪽 귓가 저편을 바라보고 있으라고 초대받은 것은 아니었다.
(중략)
위층 대기실에 있는 하인들의 이유 없이 충직한 얼굴들은 마치 하나의 멋지고 놀라운 일처럼 나를 기쁘게 했다.
그들이 나의 외투를 벗기고 부츠의 먼지를 터는 동안, 
나는 그들 모두를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중

초대 받았다는 권리를 내세우고, 그를 방해하는 타인을 깔보며
‘하인들의 이유 없이 충직한 얼굴‘ 이 기쁘다고 말하는 건

앞선 소설에서 봤던 내적 자아의 모습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카프카의 외적 자아의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 이 소설은 끝나지 않았다.

과연 사기꾼은 누구인가?
왜 화자의 앞에 그렇게 계속 나타나는가?
그리고 하나 더, 왜 내적 자아는 갑자기 소실된 것처럼 보이는가?



- 사기꾼은 과연 누구일까

소설에서 등장하는 사기꾼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존재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수개월 동안 이 도시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사기꾼들을 철저하게 알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들은 밤이면 옆 골목에서 마치 여관 주인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우리를 향해 걸어왔고,
우리가 서 있는 광고 기둥 주위를 슬금슬금 돌아다니며,
(사기꾼의 행적 나열)
(중략)
그들은 우리들 앞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우리들이 가려고 애쓰는 곳으로부터 우리들을 돌려 놓으려고 노력했으며, 
그 대신 우리들에게 그들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던 방 하나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쌓인 감정이 우리들 마음속에 마침내 우뚝 일어나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포옹으로 받아들여 그 안에 먼저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던져오는 것이었다.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중


사기꾼들은 갑작스럽게 어디서든 나타나며, 목표를 방해하고, 그 대신 방을 마련해주며, 쌓인 감정이 일어나면 포옹으로 받아들이며 몸을 던져온다.

분명 뭔가 수상한 행동이긴 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기꾼’이란 단어를 쓸 정도로 지탄받을 만한 행동인가?

아니, 애초에 그런 존재가 어떻게 현실에서 성립할 수 있는가?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시간을 버리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만족한다고?

여기서 우리는 사기꾼이라는 존재는 현실에 실존하지 않고,
사기꾼은 외적 자아와 대립하는 존재, 즉 내적 자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옆 골목‘에서 나타난다거나, ‘광고 기둥 사이’에서 나타나는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건,
사기꾼이 외부 세계에서 실존하지 않고, 내면 세계에 있는 내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여러 근거가 더 있다.



나는 물론 그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여러 작은 여관에서 알게 된 최초의 도시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덕택에 처음으로 어떤 불굴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며, 
이제는 그것을 내 자신 속에서 느끼기 시작할 정도로 이 지구상에 그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아직도 다른 사람과 마주 서 있을 수 있는가! 
사람들이 이미 그들로부터 떠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 주저앉지 않는가.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멀리서이긴 하지만, 설득하는 눈빛으로 사람을 바라보는가!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중



‘여관에서 알게 된 최초의 도시 사람’이란 진술은 아마 여관을 전전하면서, 외적 자아를 드러낼 때 이를 억압하려는 내적 자아가 발현한 것을 도시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어떤 불굴의 모습’을 보고 ’내 자신 속에서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것이 자신의 몸 속에 있는 내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만큼 내적 자아는 본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람들이 떠나버렸’고,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는데도 사기꾼들이 ‘아직도 다른 사람과 마주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내적 자아라서이다.

요약하자면 이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이용해,
자신의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갈등을 동시에 나타낸 작품이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화자의 관점에서 소설을 적는 특성상, 대개의 경우는 화자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나. 화자가 윤리적 결함이 있거나, 지식이 부족하거나 해서. 화자의 말을 신뢰하기 힘들어지는 경우에 발생한다. 관련 이론도 있고, 창작된 소설도 많으니 몰랐다면 찾아보길 바란다.)

이 해석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제목인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는 카프카적 메타 텍스트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작품에서 카프카는 외적 자아 시점에서 서술을 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론 초대받은 자신을 방해하는 사기꾼의 탈을 벗기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론 내적 자아가 독자들에게 외적 자아의 끔찍한 모습을 폭로하여 그 탈을 벗기는 이야기인 것이다.



- <갑작스러운 산책>
내용은 밤 늦게 외출하고 싶다는 상상을 하는 것으로,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에서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를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이용해 동시에 다뤘다면,
이번에는 내적 자아 입장으로 돌아와 고찰하는 이야기이다.



(쉼표 전 내용 생략),
골목길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자유에 특별히 민첩하게 답하고 있는 온몸으로
—그는 온몸에 이 자유를 마련해준 것이다—깨어난다면, 
(중략), 
그리고 그 긴 골목길을 걸어 나간다면—
그렇다면 그는 이날 저녁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가족은 흔들거리며 비실체 속으로 떨어지게 되며, 
반면에 그는 스스로, 아주 확고하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향해 허벅지 뒤를 치면서 아찔할 정도로 일어서게 된다.
<갑작스러운 산책> 중




‘집’과 ‘가족’, 이전 소설에선 ‘홀’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억압의 환경에서 벗어나(‘비실체’속으로 떨어지는 가족) 내적 자아(‘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겠다는 선언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시도에 그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만약 ~하다면의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 내면 세계에서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줄의 내용도 이러한 사실을 더욱 비관적인 방법으로 재확인시켜준다.




만약 이 늦은 밤 시간에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기 위해서 그를 방문한다면, 
이 모든 것은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갑작스러운 산책> 중



사회적 관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출한 것이, 오히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친구’의 ‘방문’) 강렬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내적 자아의 반란이 외적 환경에 종속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 <결심>


내적 자아의 <갑작스러운 산책>이 끝나고, 이번에는 외적 자아 입장에서 진행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심>에서 외적 자아의 세번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3. 감정의 억압



나는 모든 감정을 억제할 것이다.
A가 지금 온다면 그에게 열렬하게 인사하고, 내 방에서는 B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할 것이며, 
C의 집에서는 고통스럽고 수고스럽더라도 숨을 길게 내쉬면서 거기서 이야기되는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삼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꼭 생기게 마련인 실수로 인하여 이 모두가,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중단될 것이고, 
결국 나는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이란 스스로 둔중한 덩어리처럼 행동하고, 
그래도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는 불필요한 걸음은 한 발자국도 때지 말며, 
요컨대 인생에서 아직 유령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억눌러버릴 것이며, 
다시 말해서 무덤속의 최후의 안식을 더욱 늘리고, 그 이외에는 어느 것도 더 이상 존속시키지 않는 것뿐이다.
<결심> 중




화자는 감정을 억눌러 원활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해도 결국엔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며
그렇기에 최대한 둔중한 덩어리처럼, 굳건하게 평정 상태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한다.

‘유령과 같은 존재’를 억누르며 ‘최후의 안식‘을 늘리는,
생기 없이 죽어 있는 존재로서의 외적 자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또한 <갑작스러운 산책>과 공통된 구조를 띄고 있다.
공통된 구조란, 마지막 줄에서 그 전까지의 모든 내용을 비관하고 전복시키는 듯한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의 특징적인 행동은, 새끼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쓰다듬는 것이다.
<결심> 중



‘그런 상태의 특징적인 행동’이라며 지금까지 쌓아왔던 서사를 끌고 와서, 고작 ‘새끼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쓰다듬는’ 하찮아보이는 행동을 보여주어 모든 것을 박살낸다.

이는 외적 자아는 겨우 그 따위 행동만 가능한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감정을 표현하는 눈썹이란 부위를 ‘새끼손가락’같은 물리적인 동작으로 조작하는 것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 <산으로의 소풍>과 <독신자의 불행>


내적 자아의 한계를 <갑작스러운 산책>에서, 외적 자아의 한계를 <결심>에서 확인한 후.
<산으로의 소풍>과 <독신자의 불행>은 그 결과를, 즉 두 자아 모두에게 암울한 미래를 선고하는 작품이다.

<산으로의 소풍>에서는 앞선 내용들 탓에,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산으로의 소풍> 중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둘 다 그렇게 나쁜 자아는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산책>과 <결심>에서 보았듯 두 자아 모두는 고립되고 만다.

그래서 카프카는 일종의 언어유희적 상상력을 동원해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그렇지 않다면 착한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는 전혀 아무도 아닌 무리와 함께 기꺼이—소풍을 갈 것이다.
<산으로의 소풍> 중



이 소설에서 ‘아무’는 일종의 사회적 역할이다.

카프카는 내적 자아든 외적 자아든 고립되고 마는 이유는
모두가 사회적 역할 안에 종속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아닌 무리’와 함께 소풍을 간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아무도 아닌 무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그럭저럭 걸어가고 있고, 바람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사지가 비워둔 틈새를 지나간다. 
산에서는 목이 확 트인다! 우리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다.
<산으로의 소풍> 중



그들은 아무도 아니기에,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참고로 카프카의 ‘노래’는 첫 소설인 <국도의 아이들>에서도 나오듯이 집단적 행동을 뜻한다.

‘아무도 아닌 무리’가 어떻게 집단적 행동을 하겠는가?
결국 모든 건 상상 속의 일이라는 걸 재확인할 뿐이다.

그 다음 소설인 <독신자의 불행>은 지금까지 무거웠던 텍스트에 비해 좀 더 가벼우나,
결혼과 연애에 대한 좌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소녀‘를 좇게 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서는 뭐 특별한 해설을 하기가 애매하다.
말 그대로 <독신자의 불행>을 매우 쓰라리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오늘날이나 후에는 실제로 하나의 육신과 하나의 진짜 머리, 
그러니까 손으로 치기 위한 이마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서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독신자의 불행> 중



미래의 자신이 가질 후회를 재치 있게 표현하며, <독신자의 불행>은 끝을 맺는다.


- <상인>의 카프카




몇몇 사람들이 나를 동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다.
(중략)
이내 나는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들어선다.
<상인> 중



<상인>이란 작품은 <독신자의 불행>에 등장한 독신자로서의 자신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미래를 형상화한 소설인 것이다.

근거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첫 문장이 이전 소설에 드러난 쓸쓸한 분위기와 잘 맞물린다는 것
2. 집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
3. 독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첫 근거는 위 인용문의 시작 부분을 직접 읽어보는 걸로 설명을 대신하고,
두번째와 세번째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2. 집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
당시 프라하에는 가정집에 엘리베이터가 보급되지 않았고,
물론 카프카 자신의 생가에도 엘리베이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들어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카프카가 미래, 자신의 집에 엘리베이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밖에 안된다.

그래서 카프카는 이런 서술도 추가한다.


이제 그리고 갑자기 나는 내가 홀로라는 것을 깨닫는다. 
층계를 올라가야 하는 다른 사람들은 이윽고 약간 피로해져서, 
급한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열러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분노와 조급함에 대한 이유를 갖게 된다. 
현관에 들어가서 모자를 걸고, 그러고는 복도를 통과하여 몇 개의 유리문 옆을 지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들은 혼자가 된다.
<상인> 중


분명 여기서 말하는 건 ‘층계를 올라가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더 빨리 혼자가 된다는 진술이지만,
이 상황이 미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현실에서 층계를 올라가야 하는 건 카프카이며, 카프카는 들어가자마자 혼자가 될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원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건 당시 독자라면 미래 모습이라는 걸 바로 캐치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엘리베이터 공급이 이제 와서는 너무 보편화되어서 그런거지… 카프카는 엘리베이터에 마음을 뺏겼는지, <실종자>의 옥시덴털 호텔에서는 아예 주인공인 요제프k가 엘리베이터 보이를 맡게 된다.)


3. 독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독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근거는 일단 배우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양손의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를 내면서 마주 오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나 길은 너무 짧다. 이내 나는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들어선다.
<상인> 중


그리고 일이 끝난 다음 갈을 걸어가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길이 짧은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장면 등을 보면 그가 독신 생활을 한다는 것을 더 확신할 수 있다.



- 상점과 노동보험공단

‘상점’은 아마 카프카가 당시 근무하던 노동 보험 공단을 우회적으로 나타낸 것 같다.



그리고 한 계절에 벌써 다음 계절의 유행을 생각해내야만 하는데,
그것도 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될 것이 아니고, 
가까이하기 힘든 시골 주민들의 유행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상인> 중



주위 사람이 아니고, ‘시골 주민들의 유행’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 일단 가장 큰 이유이다.

카프카는 도시에서 최소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과 동떨어진 공장 노동자나 광부들이 ’시골 주민’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 다음 구절들도 그의 ‘상점’이 노동 보험 공단이라는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나의 돈은 낯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형편을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당할지도 모르는 불행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그들은 낭비가 심해 어느 음식점에서 향연을 베풀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미국으로 도피하는 길에 잠깐 이 향연에 머무를지도 모를 일이다.
<상인> 중



자신의 돈이 ‘낯선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은 
보험 시스템의 특성을 명확히 짚고 있으며
(세금이나 보험료 등 시민들의 돈을 다루기 때문)

‘미국으로 도피하는 길’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실제 당시 체코에서 미국 이민 붐이 있었다고 한다. 

Another large wave of Bohemians migration to America occurred in the late 1800s and early 1900s, when Midwestern farmland was widely available at low prices. Most came from Bohemia and Moravia, and were called "Bohemians" in the early part of the 20th century.
(체코슬라바키아 계보학회)

증거는 더 있는데



왜냐하면 나의 얼굴과 손은 더럽고 땀으로 젖어 있으며,
옷은 얼룩지고 먼지투성이이며, 머리에는 작업모를 쓰고 
궤짝 못에 찢긴 장화를 신고 있기 때문이다. 
<상인> 중



카프카는 목재 작업 중 손가락 절단 사례를 조사해서 보고서를 만드는 등
실제 현장에 나가는 일도 꽤나 비일비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작업모를 쓰고, 궤짝 못에 찢긴 장화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고된 업무를 뜻하는 것 같다.

카프카는 <관찰> 단편집을 낼 당시에도 노동 보험 공단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참 뒤에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서,
짧은 근무 시간 덕에 노동 보험 공단의 일을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는 게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굳이 ‘상인’으로서 실제 자기가 하고 싶어 했던 노동 보험 공단 일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건
상인을 직업으로 했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중기 작업물들에서 더 알아보도록 하고, 이제 소설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보자.
 


- 열망과 좌절



이제 어느 평일 날 저녁 가게 문이 닫히고, 
갑자기 내 눈앞에 내 가게의 끊임없는 용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시간들을 보게 될 때면, 
아침에 멀리 보내버렸던 흥분이 마치 되돌아오는 밀물처럼 내 마음 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서 참지 못하고, 아무런 목표도 없이 내 마음을 휩쓸어간다.
<상인> 중



카프카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가게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내일의 가게 일을 생각하며 절망할 정도로.

집으로 돌아온 카프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곧바로 혼자가 되어, 
무릎에 의지해서 좁은 거울을 들여다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조용히 해요. 물러서요. 당신들은 나무 그늘로 가고 싶소? 창문의 주름진 커튼 뒤로, 아치모양의 정자로?”
나는 화가 나서 이를 갈며 이야기하고, 계단의 난간은 우윳빛 유리창을 마치 추락하는 물처럼 미끄러져 내려간다.
<상인> 중



카프카는 이때까지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던 자신(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과 현실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던 미래의 자신을 포함해서 ’당신들’이라고 말하며 불러세운다.

그러고는 ‘나무 그늘‘과 ‘주름진 커튼 뒤’ ‘아치모양의 정자‘로 가고 싶냐고 하는데.
여기서 제시된 세 공간은 각각 빛, 가족,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피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잠깐의 안식 따위를 원하냐고, 푸념을 늘어놓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날아가시오. 내가 결코 본 적이 없는 당신들의 날개는 당신들을 시골의 골짜기로 데려다줄지도,
또는 당신들이 파리로 가고 싶어 한다면 그리로 데려다줄지도 모르오.

그렇지만 행렬들이 세 갈래 길에서 모두 나와, 서로 피하지 않고 뒤엉켜서 간다면,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줄 사이에 다시 자유로운 공간이 생기게 된다면, 창문의 전경을 즐기시오.

손수건을 흔들고, 놀라워하고, 감격하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찬양하시오.
시냇물 위의 나무다리를 건너가고, 멱을 감고 있는 아이들에게 머리를 끄덕여주시오 
그리고 멀리 철갑함 위에 있는 수천명의 선원들의 환호성에 놀라보시오.
<상인> 중



잠깐의 도망을 갈 바에, 아예 날아가라고 말하며
인적 드문 ‘시골의 골짜기’나 에술의 성지인 ’파리‘로 가라고 말한다.
(카프카 평전에 따르면 실제로 카프카는 파리로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본 적이 없는 당신들의 날개’라는 점에서
실제 그 곳에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인식, 혹은 카프카 자신의 용기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줄부터 제시되는 상황은 ‘그렇지만’이라는 역접에서 알 수 있듯
카프카 자신이 열망하는 상황이다.

세 갈래 길은 아무래도 프라하의 복잡한 민족구성(체코인, 독일인, 유대인)을 나태낸 것 같고,
이들이 ‘서로 피하지 않고 뒤엉켜서’ 간다면, 즉 모두가 민족을 뛰어넘어 서로 화합하게 된다면,
자신의 처지(체코에 사는 독일어 작가인 유대인)도 이해될 수 있고, 어딘가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유로운 공간이 생긴다면’, 즉 화합과 함께 카프카 자신의 휴식시간이 찾아온다면,
‘손수건을 흔들고, 놀라워하고, 감격’하며, ‘여인들을 찬양’할 정도로 기쁘게 지내도 될 것 같다는 말이다.

이후 구절은 시냇물 위의 나무다리를 건너고, 아이들에게 머리를 끄덕여주고, 내륙이라 들리지도 않을 선원들의 환호성을 들을 정도로 기쁘게 지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밑바닥부터 파괴되고 만다는 것을 카프카는 알고 있었다.



오직 초라한 남자를 뒤따라가시오. 그리고 당신이 그를 출입구로 몰아넣었다면, 그를 강탈하고, 
모두들 각자 자신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그가 자기가 갈 길의 잘못된 골목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바라보시오.

여기저기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경찰들이 말을 제어하며 당신들을 밀어낼 것이오. 
그들을 내버려두시오. 텅 빈 거리는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소. 
벌써 그들은 짝을 지어 말을 타고 떠나가오. 천천히 길모퉁이를 돌아, 날아가듯 광장을 넘어서.”

이제 나는 내려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아래로 내려보내고 문의 초인종을 누른다. 
<상인> 중


외톨이로서의 카프카, 초라한 ‘내적 자아’는 결국 그런 상황에서 모든 걸 다 뺏기고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경찰들, 아마 내면의 양심같은 존재들은 이를 제어하려고 해보겠지만, 초라한 남자를 벗기는 것 말곤 평화로운 거리. 결국 경찰들은 불행해지게 되고, 양심은 거두어져, 어쩌면 카프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미래의 씁쓸한 자신의 모습을 비추며, 그 상황을 타개할 방법들을 고민하지만
결국 결말은 그리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시한 카프카

손익을 명확하게 따지는 상인처럼, 카프카는 결국 멈춰서고야 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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