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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창의적인 축에 속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한편의 디즈니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악마와 마녀의 신비로운 모습들, 그리고 이들이 벌이는 소동들이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특히 내가 읽은 판본을 비롯해 많은 판본들의 표지를 장식하는 베헤모트의 모습을 상상하며 읽으니 귀엽고 재밌었다. (원래 내가 읽은 열린책들 판본에는 된소리로 '베게모뜨'라고 표기돼있지만 나는 민음사 판본의 표기에 따라 베헤모트라고 부르고자 하는데, 딱히 합리적인 이유는 없고 된소리가 어딘가 어색하기 때문이다. 다른 인물에 대해서도 같은 표기법을 따를 것이다.) 단순히 웃기기만 한 이야기라면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인상적이기는 해도 평범한 소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각종 소재들을 다양하게 재해석한다. 성경, 당대의 소련, 인간의 심리를 마술적인 풍경으로 다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보여주는 일'에 충실할 뿐 독자에게 어떤 해석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재해석을 재해석하는 의무를 짊어진다. 그렇게 의무를 다하며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으면, 우스운 장면 뒤에 항상 뼈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발견으로부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이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으로 만든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많은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구조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두꺼운 이야기는 당대 소련에 대한 풍자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귀에 딱지가 들어앉도록 예수에 대해 말했건만, 혁명을 통해 새로이 거듭난 러시아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한 시대를 종결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으니 그 자신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며, 꼭 신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을 잃은 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서 오만함에 빠졌다. 자기 인생도 한 치 앞을 모르는 주제에 세계사의 흐름에 정답이 있으며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것이다. 물론 그 정답은 공산주의고,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세계사의 승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을 억압했다. 체제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자들은 뱉어내라는 강령은 예술가들의 창의성을 말살시켰고 모든 외국인들을 의심스러운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반동분자로 분류된 자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그들의 현관문은 조용히 봉인된다. "오늘은 비공식적인 인물이지만, 내일이면, 두고 보십시오, 공식적인 인물이 될 수도 있죠! 아니면 종종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고요." 소련은 이상향을 향해 자라나는 국가치고는 그다지 행복하다고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볼란드는 사탄으로서 이들을 심판한다. 사실 사탄이 심판을 한다는 말부터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악의 축인 사탄이 악한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한다니?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사탄이 심판자를 맡을 정도로 그 시절의 소련이 엉망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 사람들이 체제에 복종하며 저지르는 '소꿉놀이 수준의 악'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것인지 '진정한 악'이 폭로한다는 것이다. 베를리오즈가 죽는 부분, 그리고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흑마술 공연 부분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베를리오즈와 베즈돔니는 무신론자였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레 여기기까지 했다. 앞서 말했듯 이들은 인간의 질서는 인간 스스로가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다. 볼란드는 베를리오즈에게 직접 잔혹한 운명을 선사함으로써 이를 반증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뭔가를 조종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갑자기 나무로 된 상자에 꼼짝도 못하고 드러눕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가 스스로의 삶을 조종한다고 정말로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신에 의해 운명이 따로 정해져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도, 인간이 스스로 해내거나 스스로 피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다. 세계 전체에 비하면 인간은 점 하나에도 못 미치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존재들이 아무리 모여서 단결해 봤자, 늘 더 큰 존재가 존재한다. 결국 당대 소련인의 자신감은 이를 간과하고 품은 오만에 불과했던 것이다. 흑마술 공연에서 볼란드는 소련인들의 발전을 칭찬하면서도 날카로운 발전을 한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이 있지. 이 시민들이 내적으로도 변했을까?" 곧 볼란드는 돈을 뿌린다. 평등을 사랑하는 소련인들은 사유재산을 두고 앞다투어 멍청해진다. "저들은 사람들에 불과해, 돈을 좋아하지, 언제나 그래 왔어……. 인류는 돈을 좋아해,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가죽으로 만들어졌든, 동 혹은 금으로 만들어졌든……. 참 경박하지……. 어쩌겠나……. 때로 자비심이 저들의 마음을 때리기도 하는 것을……. 평범한 사람들이야……." 결국 소련인들은 혁명을 이루고 스스로 진보했다는 확신을 얻어 앞으로 어떤 악의 난관도 헤쳐나가리라 생각했지만, 인간은 영원히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인간 특유의 어리석음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아니,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만 할까?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다른 축은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다. 빌라도는 사실 굉장히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사실상 빌라도가 예수의 운명을 선고한 사자임에도 성경에서는 빌라도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빌라도가 선고를 내릴 때 보여준 특유의 미지근한 태도, 그리고 빌라도보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더 간절히 바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빌라도도 자아가 뚜렷한 인물로서 독자적인 견해를 가졌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와 그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랐을까?


불가코프가 재창조한 예수, 즉 '예슈아 하-노츠리'는 딱히 메시아도 아니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 예슈아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비범한 사상을 갖고 있다. 권위주의가 하늘을 찌르던 그 당시에 예슈아는 만민이 모두 선하며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세상에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 지성으로 그런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중략) 모든 권력은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고, 카이사르의 권력도, 또 그 어떠한 다른 권력도 사라질 날이 올 것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어떠한 권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진리와 정의의 왕국으로 옮겨 갈 것입니다." 로마인 총독으로서, 즉 체제의 충견으로서 빌라도는 예슈아의 사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예슈아 개인이 어떤 인간이든, 그의 사상을 계승한 자들이 체제를 전복시키고 평등을 실현하려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했다. 빌라도는 정치가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 하지만 빌라도는 필요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예슈아의 사상에 감화됐기 때문이다. 중간관리자로서 빌라도는 위에 치이고 아래에 치이는 형편이었다. 유대인들의 반기를 잠재워야했고, 이 평온함을 통해 위로 올라갈 기회를 노려야만 했다. 이런 복잡한 마음 없이, 예슈아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서로를 선한 존재로 믿고 기꺼이 기댈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예슈아를 제외하면 빌라도가 만난 모든 인간들은 철저히 인간일 따름이어서, 예슈아가 들려준 꿈은 빌라도에게 영영 머나먼 것이었다.


예슈아가 기둥에 매달린 뒤로 이천 년 가량이 지났지만 인간들의 내면은 제자리걸음이나 반복했을 뿐이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광야를 헤맸듯이, 사람들은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시험해 보았다. 하지만 원점과 달라 보이게 교묘하게 치장한 원점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는 나폴레옹 전쟁이었고, 러시아 혁명의 결과는 스탈린의 대숙청이었다. 작중 예슈아의 이야기는 이상향을 만드는 데 꼭 성스러운 힘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시아의 표식이 있어서 예르샬라임에 들어가기도 전에 알아볼 필요도 없고, 병든 사람을 신통력으로 고쳐줄 필요도 없다.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단지 마음뿐이다. 만인이 만인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그리고 끈질기게 만인을 억제하는 억압을 구색만 갖추지 말고 진정으로 해체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과 권력자를 끊임없이 숭배한다. 그런 마음이 남아있는 한 이상향은 올 수 없으며 소련은 더욱 망가질 뿐이라는 점을 불가코프는 예슈아와 빌라도의 이야기를 통해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희망은 없는 걸까? 불가코프는 창작 활동에 있어 많은 억압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그에게 불이익이 가해지기도 했고, 그를 공격하는 논설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왜인지 스탈린의 마음에 들어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는 있었지만, 아무튼 불가코프가 예술 탄압의 최전선에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남몰래 써왔다. 당장 부조리한 소련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더라도, 생각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해온 것이다. 예슈아는 "낡은 신장의 성전이 무너지면 진리의 새로운 성전이 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신은 불가코프의 정신을 요약한 것이며, 작품 내에서는 거장이 이 정신을 계승했다. 물론 거장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반체제적인 예술이기에 거장은 이름이 무색하게 고립되어 고사(枯死)할 운명이었다. 볼란드는 그런 거장에게 축복을 내린다. 사탄의 축복이 아니라, 누가 봐도 진정한 의미로 통할 축복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원고는 불타지 않소."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당장 보이는 희망이 눈곱만큼도 없더라도, 생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 생각을 알아봐 주는 여인과 악마가 나를 도와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술적인 존재들을 상상하고 그들의 행각에 통쾌해하는 것은 대리만족일 뿐이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면 사람은 자아를 잃고 체제의 노예가 된다. 우리는 남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을 스스로의 힘으로 쓰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 "작가는 신분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쓰는 것으로 결정되는 거예요!" 그렇게 불가코프는 세상과 인간을 한없이 조롱했지만 연민 섞인 희망을 보이며 작품을 마친다. 결말에서 거의 모든 주역들이 구1원받는다. 이는 불가코프가 이따위 세상에도 무언가 애착을 느꼈고 먼 후일에라도 예슈아의 정신이 실현되리라는 믿음을 품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놓고 보니 결국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강한 염원이 담긴 소설인 것 같다. 이상향을 만들려는 시도가 이상향과 턱없이 먼 괴상한 세계를 만들었다. 그 안에서 불가코프는 뒤집어엎을 힘은커녕 똑같이 억압받는 존재로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불가코프는 혁명에서 유래한 오만이 언젠가는 사라지고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그래서 불가코프는 거장을 창조한 뒤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작품을 만지며 거장의 행복을 완성하였다. 이미 믿음을 잃은 시대에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사람들에게 다시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성한 기적에 집착하지 않고 예수라는 존재가 갖는 함의를 기억함으로써 세계는 구1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글쎄, 아직까지도 불가코프의 염원이 이뤄지기엔 머나먼 것 같다. 요즘에는 오히려 예수(혹은 알라)를 너무 강하게 믿어서 문제가 많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치른 뒤에 얻은 앙심으로 기어이 블레셋과 이란을 지도에서 없앨 생각인 것 같다. 여전히 종교의 정신은 간과되고 종교의 명의로 된 승리만이 사람들의 목표로 남아있다. 다만 포화 속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선한 동료로 대하는 사람이 살아남아준다면, 그리고 그렇게 거듭된 비극 속에서 사람들이 천천히 무엇이 옳은지 배워갈 수 있다면, 언젠가는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예언서처럼 되어주지 않을까. 그럴 일을 내 생에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불가코프가 숙청과 탄압의 최전선에서 희망을 품었듯이 나도 희망을 품어보련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요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재밌는 책이었다. 작품의 신박한 전개로부터 큰 전율을 느꼈고, 그 이면에 깔린 성찰들을 곱씹으며 큰 여운을 느낀다. 솔직히 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이토록 좋아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리얼리즘에 익숙해서 오히려 위화감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내 뇌에 제대로 스며들었다. 당분간은 이렇게 자극적인 작품에 심취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그만큼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내게 소중한 체험이었다. 일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 이 작품을 창조해낸 불가코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