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별 기대 안하고 읽었느데 생각보다 괜찮았음
'서사'가 대체 무엇인지 좀 감을 잡을 수 있게 됨.

첫 부분에서 캐릭터가 '선다'는 말이 특히 인상깊었는데

'벌거벗은 미녀가 사람 가득한 긴자 밤거리를 뛰게 하라'는 말을 인용해서 설명함.

간단히 말하면 일상적이지 않은, '전이'가 발생할 때.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거임

그러니까 매력적인 캐릭터를 쓸려면, 최대한 이상한 일을 필두로 시작해야 한다는 거.

뇌의 작동 원리상, 외부에서 들어오는 미지의 사건을 먼저 감각했다면, 그 다음엔 이를 납득하려는 사고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됨.

앞선 예시를 끌고오면

그 벌거벗은 미녀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위험에 처해, 옷을 제대로 입고 도망칠 겨를이 없었던 거라고 납득시킬 수 있는거지.

그러니까 일단 일상적인 일을 뒤집는 '전이'를 만들고, 독자가 납득 가능하도록 배경을 깔고, 인물사를 까는거임.

근데 이게 정말 중요한 게
이런 '전이' 없이는 모든 인물은 그저 설정집에 머무르게 됨.

아무리 스펙타클한 삶을 살아도, 그 안에서 특별한 전이가 없다면. 그건 그냥 설정일 뿐인거지. 캐릭터가 아니야.

이 논의를 더 광범위하게 확장하면

서사에 대해서도 동일함.

어떤 서사가 모두 내 예측대로 흘러간다면 그건 서사가 아니라 그냥 확인에 불과한 거지.

그러니까 아이디어를 낼 때부터 이런 '전이'를 염두에 두고 그걸 위주로 주변 설정을 짜는 방식으로 간다면

서사 있는 글을 쓰기 훨씬 수월해짐

그러니까 완전히 일상적인 소재를 가져와도.
우리의 일반적 인식과 예측을 뒤집고 시작해버리면 창의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음

중요한 건, 독자에게 '전이'의 경험을 주는거지. 그게 매력적인 소재니 아니니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임.

신호등을 가져와서 해보자면,
단순한 상황 지시등이었던 기존 이미지를 뒤집어서
지 마음대로 지시등을 바꿔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고 모른척하는 살인 기계로 바꿀 수 있음

그런 살인 기계가 세팅되면, 그러니까 '전이'가 발생하면
뒤따라오는 이야기는 그에 따라 재편되고, 뭔가 가닥이 잡혀 있기 때문에 훨씬 짜기 수월해짐.

그래서 작가는 이 과정을 달걀프라이를 만드는 과정에 비유함

달걀을 준비
(매우 일상적이고 친숙한 상황으로 독자를 끌어들임)

달걀을 깸
(독자가 예측하기 힘든 '전이'를 보여줌, 이제 독자는 못 빠져나감)

달걀을 조리함
(납득가능한 설명을 붙이는 단계. 이제 독자는 더 읽을 지 말지 결정함)

이 세 과정이 끝난 다음에 좋은 이야기였느니 아니니가 나오는 거고

이걸 알고 나면, 서사 실험이라는 것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임.

지금까지 해왔던 전이 과정을 전부 무로 되돌리는 일, 이를테면 '아ㅅㅂ꿈'을 남발하는 것(베케트 작품에 실제로 등장함, 물론 그건 꿈이 아니라 상상이긴 한데)

갑작스런 '전이'를 사용하여 독자를 끌어들이기보다 묵묵히 사실과 허구를 섞어 서술하며 무게를 가중시키는 제발트의 소설 등등

'전이'의 경험을 먼저 디자인하고
그 이후 단계를 '전이'에 맞춰서 구상 후 이를 연결해
하나의 플롯을 만드는 과정이, 천재적인 스토리텔러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 아닌가 싶음.

특히 후지모토 타츠키 같은 작가들은 워낙 이런 거에 미쳐있는 듯

타츠키 작품으로 예시들고 싶은데 '전이'의 경험은 모든 작품의 축이라 스포같아서 관둠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