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숨가쁘게 흘러 2025년의 반환점을 앞두고 있다. 독서량은 저번 달과 얼추 비슷하게 읽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내 취향이었던 책을 읽었던 지난달과 달리 내 기준으로 그저 그랬던 책에서부터 인생책으로 꼽을 책까지 감상평이 제각각이었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앞으로 남은 반년동안도 좋은 책을 더 읽어볼 것을 다짐하며 지난 한 달 동안 읽었던 책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하이 피델리티 (High Fidelity)
“어쩌면 우리는 모두 너무 흥분이 고조된 채로 사는지 온종일 감정적인 것들을 빨아들이며 사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결코 단순한 것에 만족감을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하거나, 황홀경에 빠지거나, 아예 꼭지가 돌아버릴 만큼 행복해야 하는데, 안정적이고 견고한 관계를 맺은 채 살아가면서 이런 상태에 이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Maybe we all live life at too high a pitch, those of us who absorb emotional things all day, and as a consequence we can never feel merely content: we have to be unhappy, or ecstatically, head-over-heels happy, and those states are difficult to achieve within a stable, solid relationship.)”
- 하이 피델리티 中 -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닉 혼비(Nick Hornby, 1957 -)가 1995년에 출간한 소설이자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하이 피델리티를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한국에서 닉 혼비는 소설가보다도 그가 응원하는 잉글랜드 축구 구단인 아스날 FC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긴 회고록 피버 피치(Fever Pitch)의 작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미권에서는 히트작을 여럿 집필한 잘나가는 소설가로 꼽히고, 문학적인 성취도 거둬 E. M. 포스터 상도 수상하였다. 이토록 한국에서 생소해 보이는 작가의 책을 접하게 된 계기로는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지인 중에 닉 혼비라는 작가를 좋아해서 넌지시 추천을 해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가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우연히 들렀던 서점에서 이책을 꽤나 저렴한 가격에 판매를 하고 있는 걸 보고 냉큼 집어와서 책장에 묵혀두다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이책은 벌이가 영 시원치 않은 레코드 샵을 운영하고 있는 35세 남자 롭 플레밍의 연애사를 다루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먼저 주인공의 학창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그가 거쳐왔던 5명의 전 여자친구와의 부끄러운 연애사를 보여주고, 그 이후 그나마 관계가 오래 지속된 현재 여자친구인 로라와의 관계가 주인공의 외도로 인해 파탄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가고 있다. 본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꼽아보자면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주인공의 행적과 심상을 담백하면서도 사실적인 톤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롭 플레밍은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철부지에다가 경제적으로 곤궁한 자신의 처지에 비해 번듯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재정적인 여유를 갖춘 로라에게도 열등감을 줄곧 느끼고, 성욕도 왕성해서 여자친구를 두고 외도를 저지르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소위 말해 찌질한 구석이 있는 인물인데, 작가는 그의 찌질한 성정에 기반한 열등감 분출과 성적 판타지를 가감없으면서도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게 어찌나 가감없고 날 것 그대로인지 비속어도 종종 나오고 은근 외설적인 장면도 있는데, 그덕에 영국산 영문학은 고색창연하면서도 적당히 정제된 톤의 제품이 주류일 거야라는 내 편견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 인간의 부끄러운 면모를 사실적이로 그려내는 방식의 내러티브는 근대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에서부터 일본의 사소설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전통과 동서양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춘 방식인데, 이점이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 덕에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에 서사에 몰입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다만 작품의 배경이 90년대 북런던에 있는 레코드 샵인 까닭에 70년대에서 90년대에 유행했던 음악과 대중문화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로도 자주 언급되는 편인데, 옛날 영미권 대중문화에 어느 정도 이해를 갖춘 사람이라면 몰라도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인 나로서는 이질감만 들어서 그런지 작품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물론 상술하였듯이 롭 플레밍의 서사에서 느껴지는 보편성과 나보코프나 오스카 와일드 수준의 현란함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꽤나 센스있는 언어유희 덕에 마지막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완독하기는 했지만, 그시절 대중문화 레퍼런스에 적잖게 기댄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웠다. 그래도 작품의 고유한 매력은 확실히 갖춘 작품이니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한 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2. 코 · 초상화 (Нос · Портрет)
“어떤 사람은 훌륭한 요리사를 두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입이 짧아서 두 조각 이상은 넘기지 못한다. 반면 다른 사람은 참모부 아치만 한 입을 갖고 있으면서도, 슬프다! 감자로 된 독일식 점심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 운명은 얼마나 이상하게 우리를 희롱하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넵스키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오, 이 넵스키 거리를 믿지 마시기를! (…) 모든 것이 기만이고, 모든 것이 환상이고, 모든 것이 보이는 것과 다르다!”
- 넵스키 거리 中 -
우크라이나 동부 폴타바 태생의 소설가, 극작가, 시인이자 푸쉬킨, 레르몬토프와 함께 근대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추앙받는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Николай Гоголь, 1809 - 1852)의 단편집인 코 · 초상화를 읽어봤다. 내가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면서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고전 노문학에 푹 빠졌는데, 생각을 해보니 정작 근대 노문학의 시대를 연 1세대 작가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1세대 작가 중 누구의 작품을 먼저 읽어볼까 고심하다가, 내가 재밌게 읽은 작품의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와 불가코프가 고골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대표 단편선을 이번 기회에 도전해 봤다.
이 책은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총 5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상술하였듯이 고골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러시아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동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는데, 더 큰 포부를 안고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도에서 공부하고 작가로 활동하면서 겪었던 혹한과 서구를 본받아 발전을 이루려는 것을 넘어 서구의 문물이라면 무조건 맹종하려고 하는 분위기와 이런 기류의 편승한 귀족과 중류층이 드러내는 속물 근성과 빈민들에게 가혹하기 짝이 없던 열악한 거주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고골의 이러한 당혹감은 그의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가장 먼저 발표한 단편인 넵스키 거리(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는 처음에는 작가가 의뭉스럽게 펼쳐대는 넵스키 거리 찬양으로 시작하다가 피스카료프라는 얼치기 예술가와 피로고프 대위라는 속물적인 무관이 각자 다른 도시 여인에게 홀딱 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주며 페테르부르크에 만연한 부박함과 가식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그의 대표적인 단편으로 꼽히는 코(Нос)는 도시민들의 속물근성을 한 술 더 떠서 우스꽝스럽게 풍자하는데, 본작은 코발료프라고 8등관 문관이 보여주는 비속한 계급의식과 출세욕을 코에 빗대고, 이 코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 인간 행세를 하며 도시를 돌아다니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 노문학 사상 최고의 단편소설이라는 찬사를 받는 외투(Шинель)는 우화적인 성격이 더해진 작품으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바쉬마치킨이라는 가난한 9등관 문관이 어느날 자신의 외투가 넝마가 되도록 찢어진 걸 깨닫고는 새 외투를 얻기 위해 짠내나는 고생을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작중 외투라는 존재가 가난한 도시민 입장에서 그나마 고생해서라도 성취할 수 있는 소박한 꿈 같은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것마저도 가난과 사회적 냉대, 지나치게 관료적인 공권력에 치이면서 고통받는 바쉬마치킨의 모습은 2세기 뒤의 시대를 사는 도시민들에게도 연민과 공감을 일으킨다.
고골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그의 작품에서는 리얼하면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색채도 띄고 있고,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고 위트 넘치다가도 그 이면에는 씁쓸함과 섬뜩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광인 일기(Записки сумасшедшего)이라는 단편에서는 포프리신이라는 9등관 문관이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비관하면서 망상에 빠져 미쳐가는 과정을 일기의 형태로 풀어낸 이야기인데, 미쳐가는 과정이 꽤나 우스꽝스럽지만 상세한 심리 묘사를 겯들여 진데다 근본적으로 포프리신의 섬망이 그의 신세한탄에서 기인하였다 보니 소름끼치면서도 구슬픈 구석도 있다. 작품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단편인 초상화(Портрет)는 환상성이 더욱 부각되는 작품인데, 이 단편은 가난하지만 재능이 있던 차르크코프라는 화가가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초상화와 그 액자에 딸려 들어있던 1만 루블의 금화를 발견하게 되면서 변화를 겪게 되어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이야기와 악마적인 생동감을 형상을 캔버스에 재현해낸 뛰어난 화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까지만 이야기하면 평범한 판타지가 아닌가 싶지만, 고골은 리얼리즘의 틀 안에서 예술가의 고뇌와 예술을 창조하는 과정을 치열하게 묘파하면서 환상성과 사실성의 기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이렇게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감성은 앞서 언급한 세 단편에서도 옅은 색채로라도 공유를 하고 있다. 그래서 다섯 단편을 다 몰아서 읽는다면 마치 잘짜여지고 깊이 있는 도시괴담집을 읽은 것 같은 감상이 든다.
내 개인적인 감상을 남기며 마무리를 하자면, 나는 꽤나 많은 기대를 안고 이 책을 펼쳤었는데 그 기대를 훨씬 더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내 인생책을 만나게 된 것 같고, 고골이라는 작가를 이제서야 접하게 된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또 등장인물이 몇 없는 단편소설이어서 노문학 특유의 복잡한 이름으로 인한 진입장벽도 덜하고 이야기도 난해하지 않고 쉽고 재밌어서 노문학 입문작으로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이 책의 고골의 긴 호흡의 문장과 세밀한 묘사 때문에 조금 읽어나가기 벅차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이책은 이런 사소한 불편함을 충분히 덮고도 넘칠만큼 훌륭한 작품성을 가진 명작인 만큼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3. 로드 (The Road)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 로드 中 -
미국의 소설가, 극작가이자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인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 - 2023)의 장편소설 로드를 읽어봤다. 내가 이 책을 읽어보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자면 바야흐로 13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매카시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꼬마였었던 나는 언젠가 흥미삼아서 서점을 구경을 하다가 책띠에 적힌 ‘감히 성서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도발적인 홍보 문구에 혹해서 샀었지만 초반 몇 페이지를 읽다가 지루해서 책장에 처박아 두었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야 매카시에 대한 명성을 알게 되어서 그의 대표작인 핏빛 자오선(Blood Meridian)을 읽어보려 하다가 어렸을 적 책장에 유기했던 이책이 문득 생각이 나서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이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구가 황폐화되고 현대문명이 완전히 붕괴된 미국에서 혹독한 겨울을 피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한 남자와 그의 어린 아들의 대륙 횡단기를 다루고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는 본작이 출간된 2006년에도 진부할 정도로 많이 쓰였던 소재지만, 거장의 손길이 닿은 본작은 그간 많이 나왔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 우선, 본작은 어떻게 세계가 멸망하게 되었고 이후 어떤 세력이나 공동체가 생기는 과정도 조망하면서 독자들에게 장르적 재미를 주기 보다는 오롯이 두 부자의 힘겨운 생존기에만 초점을 맞춘다. 또 기본이 암담한 분위기를 깔고 들어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물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절망적인 분위기를 자랑한다. 원인미상의 이유로 황폐화된 작중의 지구는 햇빛조차 제대로 안 비치고, 삼림도 잿더미가 되가고, 시냇물도 케케묵은 색깔이 나는 등 칙칙하기 그지 없다. 매카시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미려한 문체가 한 몫해서 배경을 묘사할 때마다 스산하고 처연한 분위기가 배가된다. 처참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 가관인데, 최소한의 윤리 개념이 사라져 꺼리낌없이 타인을 약탈하고 죽이고 노예로 삼는 것은 예삿일이며, 당장의 생존을 위해 사람을 잡아다 사육시키며 잡아 먹고 갓난아기도 구워먹는 끔찍한 일을 자행하고 있다. 두 부자는 황량한 환경에서 굶주리는 게 일상다반사이고 산적과 식인귀의 위협 속에서 사선을 넘나드며 험난한 여정을 이어나간다. 이토록 전반적인 분위기가 절망에 절망을 거듭하다보니, 과장 좀 보태서 이책을 읽는 과정이 정서적 고문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책은 절망만으로 가득찬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 나가면서도 그들을 위협하는 치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굶주릴지언정 강도질을 하거나 식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매우 희미하고 자그맣지만 조금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부단히 움직이며 나아간다. 즉 두 부자의 여정은 생존을 위함 몸부림에 그치지 않고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한 숭고한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의 눈물나는 여정에 깃든 가치는 작중에서도 두 주인공의 입을 빌어 ‘불을 옮기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불은 선사시대 인류에게 몸을 덥히고 조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만들며 인류 문명의 시발점 역할을 하기도 했고, 이는 그리스 신화 중 불은 훔쳐다 인간에게 진보를 안겨준 프로메테우스의 일화처럼 신화속에도 은유되어 있다. 인간성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불을 계속 옮기고 계승해가는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 희망을 가지고 어떤 세상을 꾸려나가야 하는지도 성찰하게끔 만든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더 보태자면, 초반까지만 해도 이야기가 좀 지루한 편이라서 어렸을 적 왜 내가 금방 포기하고 책을 덮었는지 이해가 됐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끈기를 갖고 이책을 계속 읽어보면서 점점 이야기에 몰입하였다.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절박한 여정에서 감동을 느껴 가슴이 뭉클해졌고 아련한 감정을 간직한 채 책을 덮었다. 윗 문단에서도 지겹게 언급을 했듯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너무 절망적이고 지루한 구석도 있어 본작을 선뜻 추천하기는 꺼려지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깊이가 있고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명작인 만큼 어느정도 끈기를 갖춘 독자들에게는 일독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4. 새엄마 찬양 (Elogio de la madrastra)
“이타적인 감정, 형이상학과 역사, 중립적 추론, 선한 의지와 자선 행위, 인류를 위한 협동심, 시민 참여적 이상주의, 동료와의 교감 같은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요. 당신과 내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지워졌지요. 사랑의 시간처럼 최고의 이기주의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의 생각을 흐트러뜨리거나 메마르게 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어요. 여기서는 그 무엇도 우리에게 제동을 걸거나 우리를 억제시킬 수 없어요. 괴수나 신에게 그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 새엄마 찬양 中 -
201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소설가이자,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 붐 문학을 이끌었던 작가를 넘어 세계적인 작가까지 도약한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1936 - 2025)의 장편소설 새엄마 찬양을 읽어봤다. 사실 내가 바르가스 요사라는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라 이전에도 그의 장편소설을 3편 정도 읽었었다. 그래도 구미가 당기는 다른 책들이 많아서 바르가스 요사의 다른 작품들을 읽는 건 미뤄두고 있었는데, 최근 작가의 부고를 접하게 되었다. 비보를 접해듣고는 가능한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둘 걸 하는 후회감이 들어 이번 기회의 이책을 부랴부랴 주문해 읽어봤다.
이책은 마흔번째 생일을 맞았음에도 많은 이들을 홀리는 미모를 갖춘 여인 루크레시아와 그녀와 최근에 재혼을 한 부르주아 리고베르토, 그리고 천사에 비견되는 맑고 고운 외모를 지닌 소년이지만 약삭빠르고 음흉한 구석이 있는 리고베르토의 아들 알폰소 사이의 가정사를 다루고 있다. 플롯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 부부 사이에 알폰소가 새엄마에게 홀딱 반한다는 꽤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막장스러워 보이는 플롯만큼이나 문장도 매운 맛 묘사들로 들어차 있다. 본작이 에로틱 소설을 표방하는 만큼 묘사가 야시꾸리한 걸 넘어서 외설적인 수준이었다. 한 술 더떠서 작가가 육체의 모든 것을 농밀하게 담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작가가 집필에 임했는지 배변활동 마저 생생하게 그려냈다. 여기에 바르가스 요사 특유의 장황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까지 더해지다 보니 책에 적힌 문장들을 읽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오곤 했다.
하지만 이책은 단순히 외설적인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평범한 내러티브를 구사한 적이 없었던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답게,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뉜채 진행된다. 하나는 상술한 가족 3명의 현실세계에서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총 6점의 명화에서 이들의 처지와 생각이 투영된 코멘터리이다. 작품에 실린 그림은 르네상스 회화와 고전주의 명화에다 해체주의 추상화까지 다양한 편인데 그림에 대한 코멘터리는 작중 등장인물들이 품은 성적 판타지와 겹쳐져 보여진다. 이를 통해 성적인 코드가 단순 추잡해 보이는 음담패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명화에 까지 녹아들어 있는 보편적인 정서라는 점이 강조된다. 명화만큼이나 아름다운 성적 묘사를 통해 성이라는 게 마냥 터부시할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본작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이외에 작품 기법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는데, 본작은 감각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면모가 드러나는데 여지껏 정교한 내러티브로 서사적 재미를 선사해왔던 바르가스 요사의 다른 작품들과는 비교해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질적인 묘사들을 좀 뜯어보자면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작중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판타지를 그림에다가 종종 투영시키는데, 이점에서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자 학자로서도 연구 대상이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대표작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 에마가 자기의 불륜행각을 환상적인 것으로 윤색하여 황홀경에 빠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또 세 가족의 이야기에서든 그림에서든 공통적으로 누군가를 엿보고 관음하는 행위가 강조되는데 이점에서는 한때나마 바르가스 요사가 존경했던 장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이 연상되었다. 여러모로 본작이 작가의 미학관과 그간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작가 노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남기자면, 본작은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들이랑 달리 분량도 적은데다가 문장도 난해하지도 않아서 책 자체는 굉장히 술술 읽히는 편이다. 다만 소재도 소재거니와 작품의 분위기가 이질적이다 보니 바르가스 요사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기는 조금 꺼려진다. 물론 기존의 대중들이 에로 작품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보기좋게 깨주는 수작인 만큼 충분히 읽어볼만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바르가스 요사의 다른 작품을 먼저 읽어보고 마음에 들었던 독자들에게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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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골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dc App
개인적으론 강추합니다. 단편 하나하나가 버릴 게 없었네요.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