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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갤을 보니 하루키 떡밥이 돌고 있는 것 같아서, 최근에 다시 읽은 '노르웨이의 숲' 과 하루키에 대해서 글을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노르웨이의 숲 이야기.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었던 건 군대에서였다. 당시 국문학과를 다니던 1살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한번 읽어보라며 건네준 책이었다. 군대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책 읽을 시간이 많고, 의지만 있다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건데(물론 부대 by 부대겠지만 우리 부대는 나름 한가한 편이었음) 당시에 나는 '그래도 국문학과 추천 픽인데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어떤 희망(으레 소설을 좋아하는 음침한 독붕이의 망상)을 가지고 열심히 읽었었다. 그 당시에 내가 읽었던 노르웨이의 숲은 엄청 야하다, 주인공이 쓸데없이 쿨하다, 특공대라는 친구에 관한 묘사가 재미있다(이걸로 자위도 해, 라니!), 엔딩이 인상 깊다, 정도. 그 당시에 이 책을 다 읽고 1살 많은 형과 책에 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형이 말하기를 하루키의 소설엔 항상 페니스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둘이 깔깔거렸던 기억도 난다. 그러게, 왜 페니스지? 성기도 아니고 고추도 아니고 말이다. 원문도 페니스라고 되어 있나? 아무튼...
그리고 또 하나 읽었던 건 색채가 없는 쓰쿠루와 뭐시기. 당시 읽을 땐 좋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하게 남는 건 여자 주인공이었나, 리스트의 르말 뒤 페이는 꼭 라자르 베르만으로 들어야 해, 라는 구절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그 곡은 잘 듣고 있다(고맙다 하루키!). 그 뒤로 읽었던 건 다른 생활관에 있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친구가 사온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책. 아, 이건 좀 별로였다. 너무 판타지 소설 같았달까. 아무튼. 그리고 전역 후에 읽었던 해변의 카프카. 음, 이것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것도 되게 환상 소설 같군, 하는 느낌과 근친상간에 대한 은유가 남아있었고... 뭐 아무튼.
자, 이제 책 이야기. 이번에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고 느낀 건 결국 이 책은 '삶의 지속으로써의 세계' 와 '소멸하는 죽음의 세계' 에서 방황하는 와타나베의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땐 방황하는 청춘 혹은 대학생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처음 읽었던 때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우선 전자로 대변되는 건 물론 미도리이고 후자는 나오코와 기즈키일 터(그러나 기즈키는 이미 죽었으니). 한 마디로 미도리와 나오코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미도리와는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 미도리와는 성관계를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건 왜일까? 나오코랑은 했으면서 말이다. 혹시 하루키는 죽음과 상실이 묘하게 에로틱하며 관능적인 이미지를 지녔다고 생각하는걸까? 실제로 책에서는 나오코를 매력적으로 묘사하긴 한다만... 물론 그렇다고 미도리가 매력적으로 묘사되지 않는 건 또 아니다. 둘 다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와타나베는 어째서 미도리와는 관계를 맺지 않은걸까. 혹 하루키는 죽음와 상실의 세계를 더 관능적이라 생각하고, 동경하는걸까?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몇 권의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작가에게 그닥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러나 최근에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면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우선은 내가 하루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 나에게는 하루키가 너무도 인간적이라 그렇다. 하루키에게 인간이란 하나의 생명이며 상처 받는 존재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 혹은 누군가를 위로해줄 수 있는 존재 혹은 희망을 가지고 노동하는 존재, 돈을 벌고 음식과 음악을 향유할 줄 알며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으며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줄 아는 그런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와타나베는 엄청나게 시니컬하며 비관적인 태도로 삶을 대하지 않던가. 좋게 말하면 이미 많은 걸 소유하고 있으며 다양하게 경험해본 재벌가 집안의 아들 같고, 나쁘게 말하면 쿨병 걸린 친구 없는 찐따 같고.
그러나 나는 이러한 와타나베의 태도가 '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묘하게 역설적인 느낌. 몸과 마음이 반대로 된 것 같달까. 마치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후회에 시달리지만 매일매일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난 언제나 일기를 쓰는 사람을 나르시스트로 여겨왔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하루를 너무도 사랑해서 글로써 기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기록하는거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면!
이제 마지막. 내가 하루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는 인간을 벌레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지 않아서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인간은 벌레보다 못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게 됐다고 생각하는데(카프카는 신이다!) 하루키는 그에 걸맞지 않게 그의 소설에서 인간 찬양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에는 어떠한 벌레성, 예컨대 의미와 목적 없는 섹스나 방황 혹은 대화, 사물과 존재가 무의미하고 공허하다는 깨달음에서 표현되는 묘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묘사에는 여전히 인간과 사물에 대한 찬양이 느껴진다. 그는 인간을 벌레로 보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는 인간을 격하시키는 어떠한 시선이나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난 그 점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위에 말한 와타나베의 태도 역시도, 마치 하루키가 삶을 대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을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은 체 하는. 누구보다 자신을 혐오하지만 일기는 매일 쓰는 사람.
그리고 최근에 읽은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처음엔 분량이 많아 걱정했는데 책이 술술 읽히는 기분이라 빨리빨리 읽을 수 있었다. 혹시 안 읽었다면 추천드린다. 진짜 재밌음.
경마장 가는 길과 노르웨이의 숲을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겠다만 내가 두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이나 평가가 상반되기 때문에 짧게나마 이야기하기로 하자. 내가 '경마장 가는 길'을 재밌게 읽은 이유는 여기 나오는 주인공 R과 A가 머저리처럼 보여서이다. R은 그의 가난한 집안과 상반되는 고학력을 가지고 있고 그에 걸맞지 않게 프랑스로 유학도 다녀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쓸모가 있으랴. 그는 돌아온 한국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절망한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R의 삶은 정말이지 지리멸렬하다. 단순한 묘사들로 표현되는 그의 삶처럼 소설 역시 고루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련! 그러니까 나는 이 소설이 왜 이토록 극도의 사실주의를 지닌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극도로 세련된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왜 하루키는 그닥 맘에 들지 않고 하일지는 이토록 마음에 드는지.
이제 끝. 난 하루키가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내가 그의 소설을 별로라 한 것은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일 수도, 책을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루키의 책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그 자신의 삶과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져서이다. 내가 하루키의 어떤 소설을 읽든 그러한 인간 찬양과 자기애의 흔적을 발견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아,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구절은 정말 훌륭하다. 어느 정도냐면 앞에 존재하는 400쪽 가량의 이야기를 다 지우고 이 엔딩만 남겨도 될 정도로.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 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진짜 진짜 마지막. 나는 하루키가 리얼리즘 소설을 써줬으면 한다. 하루키는 리얼리즘 소설을 정말 잘 쓰는 작가인데, 어째서 이상한 환상 소설이나 모더니즘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하루키가 훌륭한 모더니즘 소설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이는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하루키가 훌륭한 모더니즘 소설을 이미 써냈는데 내가 읽지 않을 걸 지도) 왜냐하면 그에게는 현대 사회의 어떤 절망감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아서이다. 예컨대 쿤데라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와 웃음이라는 은유라던지, 혹은 오에의 소설에서 과격하게 표현되는 그로테스크함이라던지, 아베 코보의 환상성과 인간이 벌레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 등등... 그리고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을 볼 때 느껴지는 삶과 인간과 역사에 대한 어떤 절망감을 하루키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물론 그럼에도 하루키는 훌륭한 작가이고 노르웨이의 숲은 훌륭한 소설이다. 다만 이것은 나의 취향 문제일 뿐이다. 독갤 글을 보니 모쏠아다들은 하루키를 싫어한다고들 하는데,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상실의 시대랑 다자키쓰쿠루는 잘 읽었는데 해변의카프카랑 기사단장 죽이기는 좀 소설이 어렵더라.. 메타포도 남발되는 느낌이고.. 일부러 노벨문학상 타려고 이렇게 만드나라는 생각도 들었음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