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누군가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으니까 말이다." 「심판」(범우사 판본의 제목으로, 원제는 「소송」이다)의 첫문장은 「변신」의 그것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죄가 없지만 소송을 당해 억압을 받아야만 하는 현실이 하루아침에 닥치다니?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요제프 K가 소송 과정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K의 죄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K가 피소됐다는 것만이 사실일 뿐이고, 그 사실에 따라 K를 대우할 뿐 소송의 내막은 관심 밖에 있다. K는 그렇게 공허한 법적 절차를 거치다가 변호사를 해약하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 죽음은 자포자기일까, 아니면 K 나름의 결단일까?


「심판」을 해석하는 가장 단순한 관점은 위계 질서에 대한 풍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판」 속에서 K의 처분을 결정하는 높은 사람들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예심 판사나 관리인은 말단일 뿐이다. 사실 K가 말단의 사람들만 만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권력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정점에 선 한 사람이 소수의 하급자를 감독하고, 그 하급자는 더 많은 하급자를 감독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소급된다. 높은 사람을 만날 확률보다 낮은 사람을 만날 확률이 훨씬 높으며, 결정권이 없어 위에서 보내는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하급자로서는 그밖의 사정은 알 바 아니며 정확히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변호사의 입지는 미묘한데, 그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하급자이므로 실질적으로 소송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변호사는 아무튼 소송을 좌우할 힘이 고객들보다는 높으므로, 계약을 맺으면 고객들보다는 상급자가 된다. 법조계의 커다란 피라미드에 대응하여 작은 피라미드가 생기는 셈이다. 훌트 박사가 블로크를 학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위계는 법조계를 떠나서도 발견할 수 있다. K도 결국 은행의 직원일 뿐이며, 은행 안에서도 차장에 의해 입지를 위협받는다. 피라미드에서 K보다 위에 서려는 차장의 음모는 보기만 해도 불쾌하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사회에 속한 사람은 누군가의 아래나 위에 서게 될 수밖에 없으며, 이 위계를 뿌리부터 뒤집을 수 없다면 평생 개인은 개인이 아니라 어딘가의 부품,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내가 살면서 해온 일 중에 내 의지가 아니라 상급자의 의지로 수행하는, 내가 보기에는 턱없이 공허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공무에 쓰이는 서류나 형식 중 의미가 없는 것들도 정말 많지 않던가. 일의 의미보다는 일의 체계가, 개인의 능력보다는 개인의 연줄이 일을 결정하는 체계. 이것이 우리 사회에 숨겨진 피라미드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생활 양식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해석은 이보다 조금 더 넓은 관점이다. 소송을 소송으로만 보지 않고 삶 자체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K는 소송을 당해 체포까지 됐지만 일상적인 활동을 계속 하도록 보장받는다. 이는 소송이라는 법적 절차 자체가 일상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심판」에는 K 외에도 소송으로 골머리를 앓는 자들이 나오기도 하고, 재판소 사무국과 재판소 직원들은 말그대로 모든 곳에 나타나 K를 괴롭힌다. 이는 K가 만나는 모든 존재들이 K를 주무르며, 소송이 K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을 사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K는 삶과 동일시된 소송을 처음에는 개의치 않으려 한다. 그러나 숙부의 강권과 변호사 계약을 기점으로 K는 소송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소송을 신경쓰는 것조차 K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조종된다. 위안조차 K 본인의 의지대로 얻을 수 없다. 엘자에게 다가갈수록 그녀는 오히려 멀어진다. 레니는 K에게 조종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K를 조종한다. 어떻게 보면 여자들에게는 K의 접근이 소송처럼 본인들의 의지에 거슬러 일어나는 사태였을지도 모른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 소송은 정말로 보편적인 사건인 것이다.


그러면 그놈의 소송은 대체 누가 제기한 것인가? 만일 개인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자원이 적당히 풍족하다면, 그 개인은 하고 싶은 일을 말그대로 마음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어딘가에 소속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의지와 부딪혀야 한다. 혹은 앞서 말했듯이 다른 의지의 명령에 따르며 생존해야 한다. 결국 소송이란 사람이 개인이 아닌 세인(世人)이기 때문에 마주칠 수밖에 없는 부자유의 은유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송은 끝날 수 없다. 운명의 신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소송을 최대한 지연시키거나 임시로 자유를 얻은 뒤에 또다시 부조리를 인식할 운명이다. 


그런데 K는 유독 피소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처럼 보인다. 소송으로 공허히 고생하는 사람, 착취당하는 사람은 나오지만 K처럼 처형당하는 사람이나 그런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 문제는 대단치 않은 것일수도 있는게, 어차피 「심판」은 K의 얘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결국 K의 노선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K만이 처형된 것이라면 K에게는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나는 변호사를 해약한 사례가 K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는 점에 주목하여, K가 끝까지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처형됐다고 주장해본다. K는 어떤 일에 처하든 그 일의 실질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건을 그대로 수용하고 자아를 묵살하는 일이 별로 없다. 변호사를 해약한 것도, K 자신은 비록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소송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기는 하지만, K 자신이 보기에 변호사는 무의미한 청원서를 무의미하게 고쳐쓰고 있을 뿐이었다. K는 청원서를 비롯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든 일에 자신의 의지가 개입해 효과를 발하기를 기대한다. 그 점이 바로 개인보다 세인을 중시하는 법의 체계에 위배되는 지점이요, K를 피소자로 만드는 죄라고 할 수 있다. 소송을 준비하며 다른 사람들은 착취와 무의미한 행동들을 반복한 끝에 블로크처럼 자아를 거세당한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얻게 된다. "단 하나 올바른 길은 현상(現狀)에 만족하는 일이다." 하지만 K는 그 부조리한 상황 안에서 스스로를 구할 방법들을 자신의 의지가 닿는대로 최선을 다해 실천해보려고 애쓴다.


그래서 나는 K의 죽음에 「이방인」의 뫼르소의 원형이 있다고 본다. K는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곧 처형인들을 이끌다시피 하며 형장으로 직접 향한다. 그간의 피곤하기 짝이 없는 공허한 일들에 진저리가 나서 도망치듯 처형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K가 변호사를 해약함으로써 스스로 불리한 입지에 섰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K는 무의미한 절차로 자아를 말살하는 세상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겠다고 결단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찾아올 죽음이라는 불이익은 변호사를 해약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부터 각오했을 것이다. K에게 처형인들이 언제 올 것이라는 통고가 없었음에도 K가 죽음을 직감한 것도 이 각오에서 기원한 것이리라. K는 아무튼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만큼은 스스로 결정한 셈이다. 다른 의지가 자기 삶의 모든 부분을 결정하는 것에서 최대한 저항하다가, 결국 자기 의지로 다가온 부정적인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다.


이 해석을 전제하면 나는 K가 그래도 멋진 주인공이었다고 생각한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주변의 소동으로부터 크게 동요했고, 그 자신도 여자들에게 위안을 강요하려다 실패한 추태를 보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자신의 행동에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투영됐는지를 늘 생각하며 의미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송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K는 그 부조리한 틀 안에서 가장 실존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하고 싶다. 물론 K의 죽음을 숭고하게 포장하기는 어렵다. 결국 자아가 없는 처형자들에게 '개처럼' 처형당했고, 이 수치심은 달랠 방법이 없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수치라면 차라리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덜 수치스러운 길일 것이다. 나는 기꺼이 K의 태도를 기꺼이 동경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밖에 「심판」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미스테리한 작품에 흔히 따라오는 정신분석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의미한 대안은 카프카 자신의 삶을 「심판」에 투영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에 어떻게든 자신을 투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이 해석을 시도하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여기서 나는 글을 마치려 한다. 책 뒷편의 해설에 짧게 실린 것 이상으로 카프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일은 계속할 생각이니, 언젠가는 그의 평전을 읽고 「심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글로 쓸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