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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의 저자가 쓴 또 다른 글이다. 지난번 글에 이어서 다시 존 러스킨의 저작에 대한 감상문을 남기게 되었다. 러스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때 올린 글에서 다뤘으니 이야기할 것이 없다.
그의 대중 강연을 옮겨적은 이 책의 주제는 말 그대로 '책'이다. 러스킨은 이 저작에서 책을 쓰고 읽는다는 것, 그리고 책이라는 물건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더 나아가 이를 통한 교육이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봤을 때는 1부에서는 당대의 독서 및 교육 관행에 대한 비판, 2부에서는 독서를 통한 여성 교육론이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독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록으로는 마르셀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그 프루스트가 맞다)가 쓴 서평인『독서에 관하여』가 포함되어 있다. 프루스트도 러스킨의 저작을 상당히 감명 깊게 읽은 모양이다. 그는 이 책을 직접 불어로 번역하며, 이 서평을 달아 출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외로 해당 서평에서는 러스킨의 독서론에 대고 반박을 하는 모습 역시 보인다. 구체적으로 보면 그는 러스킨의 '독서 교육론'에 반대하여 '개인적 경험'으로서의 독서를 옹호하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 이는 그의 대표작들에서 보이는 견해들과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러스킨의『참깨와 백합』은 1, 2부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감상문도 그것을 기준으로 남기려고 한다(당연히 각 항의 제목은 러스킨이 붙인 그대로이다.) 이후 프루스트의『독서에 관하여』에 대해서도 추가로 감상문을 적는다.
상술한 대로 두 사람의 독서론은 대립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면서 자신은 독서의 효용을 두고 둘 중 어떤 인물의 관점을 지지하는지 따져봐도 좋을 듯 싶다(다소 사족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러스킨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평소 독서 습관이 그가 이 강연에서 보여준 것만큼 철저한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말이다.)

『참깨와 백합』

1. 참깨:왕들의 보물
러스킨은 이 첫번째 강연의 시작에서 몇 가지 사항들을 짚는다. 그 첫번째는 지금의 강연에서 이야기할 '왕'이나 '금고'라는 개념들이 정치•경제학적 용어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아무래도 이 뒤에 이야기하는 사항들과 겹쳐 오해를 낳을 수 있기에, 이를 짚고 넘어가는 듯 싶다.) 그렇다면 두 단어는 어떤 의미로 사용 되었는가? 이 강연에서 말하는 '왕'은 지도자다운 경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즉, 러스킨이 생각하는 '교양'을 갖춘 신사이다. '금고'는 위대한 사람들이 남기고자 한 기록과 연관이 있다. 단순히 보면 책이 여기에 대응된다. 그러나 러스킨의 의도에 비추어볼 때, 구체적으로 '금고'가 가리키는 대상은 도서관일 것이다. 두번째는 강연의 주제이다. 러스킨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 그것은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이다. 빅토리아 시대 당시에는 출판업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강연에서는 다양한 책들이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고 있는 세태에 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참고로 존 스튜어트 밀이『자유론』에서 출판과 언론의 자유에 대해 자세히 논설하는 부분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러스킨과 밀은 동시대인이었다. 또한 서로 대치되는 지점만큼 합치되는 지점도 가지고 있었다.) 세번째는 서두에서 말한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교육 현장에 대한 내용이다. 국가 내부의 기조는 빅토리아 시대나 지금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았나 보다. 러스킨은 당시의 교육 환경을 두고, "교육 환경의 질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출세'라는 결과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라고 평한다.
상기한 두 가지를 바탕으로 그가 자세하게 다루는 건 세번째 부분이다. 그는 먼저 '출세'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출세'를 위대한 업적을 이루거나, 혹은 부를 축적하는 것으로 많이들 환원한다. 하지만 러스킨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술한 것들을 '달성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출세'에서는 실제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 명예로운 인물이 되는 것이 우선이 된다. 러스킨이 문제 삼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널리 알려진 명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류 사회'에 들기 위해서이다. 상류 사회에는 왜 들어야 하는가? 자신이 상류층이라고 내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허영심'은 인류 발전의 동인 중 하나라고 러스킨 역시 인정한다. 다만 다른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그곳에만 매달리는 것은 천박한 태도라고 비판한다.
러스킨이 밝히는 당대의 영국 국민들이 무시하고 있었던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과학, 예술, 자연,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 요소는 영국이 스스로 추구하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다. 그들은 과학과 예술을 진리를 위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서만 추구한다. 따라서 돈이 되지 않는 과학과 예술이 있다면 그것들에는 무관심하다.
뒤의 두 가지는 대놓고 무시하는 중이라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빈민의 구제를 위해 구빈법을 만들었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구빈원의 환경이 어떤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실제로 한 기사에 따르면 구빈원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굶어죽은 빈민도 있었다.
여기까지가 러스킨이 당대 영국 사회에서의 각 요소에 대해서 남긴 평을 정리한 것이다(실은 그가 여기서 자세한 설명과 사례를 덧붙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러스킨의 사회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면면들은 거의 생략했다. 이유는 지난번에『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 대한 감상문에서 제대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저작에서도 자유방임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그의 시점은 잘 드러난다. 그 대안이 그리스도교적 내재적 규범에 기반한 '정의'와 '미덕'의 도입이라는 점 또한 동일하다. 다만『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는 정책적인 면도 어느 정도 다룬다면,『참깨와 백합』에서는 주로 독서를 통한 교육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전자는 정치경제학–정치경제학과 현대 경제학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전에 올린 감상문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서적이고, 후자는 미학, 교육학 서적에 가깝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에 대해 다양한 당시의 사회 문제들을 들면서 이러한 일은 국민들이 그저 '군중'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군중'은 무감각하거나, 감각의 지속도가 매우 짧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요컨대 '잘 잊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 현상의 원인을 '시민들에게 교양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소위 '군중'들의 행태를 문제 삼고, 그것의 원인이 '교양'의 결핍이라고 본다는 점은 매튜 아널드와도 유사하다. 참고로 그 역시 러스킨과 동시대인이며, 동일하게 문학과 사회 전반에 대한 비평으로 유명했다. 또 보편 교육의 확대를 꾸준히 대안으로서 두었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좋지 않은 지점에서 유사한 것이 있다면, 두 인물의 저작은 그 전제가 상당히 명료하지 않다는 것이다.)
러스킨은 이어서 이런 상황을 개선할 두 가지 제안을 한다.
그 첫번째는 제대로 된 독서 방법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러스킨은 제대로 된 독서란, 저자의 의도와 상징, 문헌학적 요건 등의 요소들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피상적으로만 읽고 자기 생각을 논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저자의 본래 의도와 사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한 실례를 보여주기 위해서『실낙원』으로 유명한 존 밀턴의 시를 그 자리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러스킨은 그 자신의 말 대로 철저하게 단어 단위로 상징과 밀턴의 사상을 접목하여 다루고 있다. 문학 평론으로도 유명했던 그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두번째는 공공 도서관의 확충이다. 러스킨은 영국 전역에 여러 국립 도서관들을 세우고, 다양한 양서들을 구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가 주도하여 독서를 장려한다면 시민들이 독서의 중요성을 깨달을 것이라는 고전적인 견해에 속한다. 그는 다른 예술들에 대해서도 모두 이런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그중에도 가장 쉬운 것이 도서관이므로 일단 이것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2. 백합:여왕들의 화원
1항에서 다룬 것과 이어지는 강의이다.
그러나 본 주제를 논하기 전에 앞선 '왕' 비유를 더욱 구체화 하는 데에 어느 정도 지면이 소모되고 있다(첫번째 강의에서는 '왕'이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었지만,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이 된다.) 어쨌든 정보가 제시 되었으니 나도 이에 대해 정리하겠다.
러스킨에 따르면 왕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전제정이나 군주정의 통치자라는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 그의 기준에서 진정한 왕과 그가 가지는 대권은 어떠한 조건 하에 성립한다. 그 조건이란 진정한 교육과 독서(이는 첫번째 강연에서 러스킨이 예시를 동원해 다룬 것이다) 하에 형성된, 요컨대 국가를 '계도할 수 있는 역량'이다. 한 마디로 1항에서 요약한 '교양'이 정치적으로 적용된 모습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지는 왕위와 대권은 그의 기준에서는 망령일 뿐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도 잠시 논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나는 기본적으로 러스킨의 말이 함의하는 바에는 동감하지만, 그래도 직책이란 명시적인 기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그가 무능하다고 하여 직위의 정당성–어떤 국가에서는 전제정이나 군주정이 정당화 되어있다면–이 곧바로 부정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국가'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정당화 된다고 주장한다. 국가를 뜻하는 'State'에는 상태, 안정성 등의 의미도 있다. 조각상이라는 뜻의 Statue의 어원도 여기서 온다. 다시 말해 국가를 State라고 부르는 것에는 그것이 부동의 것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술하듯, 그는 여기서 전제정이나 군주정을 상정한다) 그 국가의 기반은 국왕의 권위와 역량의 안정성이 된다. 그는 모두가 이러한 왕다운 조건을 지닐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책만이 진정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교육적 효과를 가진 책들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프루스트와의 충돌도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이후로 논의는 본론에 들어간다. 러스킨은 이 대목에서 상술한 교육을 통해 쌓을 수 있는 교양이 여성의 경우 어느 정도일지를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왕'은 첫번째 강연에서의 '왕'과 성별을 제외하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교양'을 가진 여성이 곧 여왕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러스킨에 의하면, 여성이 획득할 수 있는 교양의 한계점을 논의하기 전에, 한 가지 중대한 전제를 먼저 세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여성의 권리와 의무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다(지금은 성별에 따른 권리와 의무의 차이가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는 아직 여성 일반은 커녕, 대다수의 도시 노동자들의 참정권도 주어지지 않았을 시점임을 감안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의 많은 편견들(권리와 의무에 관하여, 첫번째로는 여성의 것과 남성의 것을 완벽히 분리하여 서로 결부되지 않는다고 바라본 시점, 두번째로는 여성은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시점이 거론된다)이 언급되지만, 그는 그것이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적절한 시점인가? 그는 그것을 과거의 저자들에게서 상징을 통해 끌어내고 있다.
첫번째로 언급되는 저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는 훌륭한 여성은 많은 반면, 훌륭한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러스킨은 밸런타인만이 훌륭했으며, 이외에는 오셀로만이 유일하게 훌륭할 뻔 했다고 말한다.) 코딜리아, 데스데모나, 이자벨라, 실비아, 로절린드, 버질리아 등의 인물들은 모두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남성 주인공들의 실책으로 인해 발생한 일들을 다잡았거나, 혹은 그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겨울 이야기』나『심벨린』에서는 두 주인공들의 실책으로 소멸될 위험에 빠진 왕가를 그들의 부인들이 구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셰익스피어는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을 지혜롭고 일관된 성격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두번째로 언급되는 저자는『아이반호』를 쓴 월터 스콧이다. 스콧의 경우도 셰익스피어와 유사하다. 명목상 상당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남성 인물들은 많지만, 그들은 항상 중대한 결함 요소 역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을 매울 수 있도록 조언을 하고, 그들을 이끌어 결국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들이다. 스콧의 작품들에는 완벽한 남성상이 없다. 대신 여성들은 언제나 이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남성들보다 지혜롭고 성숙한 인물로 묘사된다. 여기까지가 러스킨의 주장이다.
세번째로 언급되는 저자는 단테 알|리기에리이다. 그의『신곡』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작중에서 단테를 이끌어주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베아트리체이다(물론 베르길리우스도 포함된다.) 맨 첫 부분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단테를 구해준 것도, 단테가 동요하거나 의심할 때마다 그를 이끌어주는 것도, 천국에 대해 안내해주는 것도 모두 베아트리체가 맡고 있는 역할이다. 또 단테는『새로운 인생』을 비롯한 다른 시들에서도 베아트리체가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을 도왔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도『오디세이아』의 나우시카와 페넬로페 등, 여성에 있어 남성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는 경우는 차고넘친다. 게다가 그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국왕의 교육을 그의 여자 형제에게 맡겼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러스킨이 말하는 여성의 힘이다. 즉, 여성의 능력은 남성과 분리 되어있지 않으며, 남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이런 결론은 물론 여성에 대한 당대의 경시를 한층 누그러뜨려 준다. 다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 되어있다는 관점이 드러나긴 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의무는 무엇이 되는가? 이 부분은 딱히 러스킨의 견해라고는 볼 수 없을 듯하다. 거의 전통적인 여성관이 그대로 담겨있다. 남성이 외무를 담당한다면, 여성은 내조에 치중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러스킨은 그것이 균형을 이룰 때 진정 화목한 가정이 형성되고, 더 나아가 모든 여성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때 국가 자체가 개선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다음으로 논하는 것이 사실상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 일반에게 그런 자질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어느 정도 투입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다.
그는 먼저 여성이 아이일 때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신체적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신체적 조건이 먼저 형성될 때 외형적 아름다움 또한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신체적 틀을 완성한 뒤에야 지식에 대한 교육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이러한 러스킨의 관점은 루소의『에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러스킨은 여성이 배우면 안 되는 학문으로 신학을 뽑는데, 그 이유는 여성은 남성보다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논증이 확실한 학문들에서도 그런 경향이 자주 보이는데, 신학처럼 이해하기 난해한 학문에서는 더더욱 빈번할 것이라는 추정이다(이러한 시각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다소 불쾌해보일 수도 있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우리는 시대상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점만 제외하면 소년과 소녀의 교육은 그 과정과 교재에서는 같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시점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말한다. 소녀의 지성이 더 먼저 발달하기 때문에, 심오하거나 난해한 주제로의 이행도 소년의 경우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방향성은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여성에게는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지식이, 남성에게는 근본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유는 상술한 전통적인 성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서이다.
위 대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는데 이 부분도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러스킨은 교육에 있어 소설을 읽히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이 위험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일상을 무던하게 만들고, 가상의 경험에 대한 갈망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소설은 인간의 특정한 천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위험은 모두 소설의 생생한 묘사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허접한 소설보다 위대한 소설이 더 위험하다.
그는 소설 읽기를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지는 논하지 않겠지만, 대신 교육을 위한 책 고르기의 기준을 제시하겠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교육을 위한 책은 효용성이 아니라 내용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최대한 고전을 읽을 수 있도록 하고, 근래에 출간된 잡지 및 출판물들을 소녀의 독서에서 차단시켜야 한다. 모든 예술에 대해서도 역시 같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들만 엄선하여 교육에 활용하여야 한다.
그가 여성의 교육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하는 당부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당대 기준으로는 여성의 권익을 위하는 인물이었다는 것 역시 말해준다. 그는 여성의 교육에도 남성을 교육할 때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을 교육할 때처럼 가장 훌륭한 교재와 교사, 훌륭한 면학 환경을 갖추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땅히 양육자로서 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될 때 진정 여성 일반이 그에 걸맞는 교양을 갖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독서에 관하여』
서두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 글은 마르셀 프루스트가『참깨와 백합』에 대해 작성한 서평이다.
사실 이 글의 상당 부분은 러스킨과 관련 없는 프루스트 개인의 회상이 차지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은 자신이 어렸을 때 독서를 하던 장면에서 뻗어나가는 유년 시절 전반에 대한 회상이다.
이러한 구성의 적절성을 떠나서 이 부분이 말해주는 바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문체의 차이이다. 러스킨과 같은 학문적인 이론가들은 주로 간결한 글을 쓴다(물론 러스킨은 이론가 중에는 간결하지 않은 문체를 구사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교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 학자와 소설가들의 글이 상당히 다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면 이 글에서 제시되는 프루스트의 긴 회상 부분은 간결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스스로의 유년에 대한 면밀한 묘사와 감각에 대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학자의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소설가의 능력이다. 두 인물의 문체의 차이는 모두 글을 매개로 하지만, 실제 표현 방식은 상당히 다른 두 직업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이 비교의 방점은 그 부분에 있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긴 회상이 끝났을 때 프루스트는 드디어 본론에 들어간다. 서두에서 말한 러스킨의 독서론에 대한 반대 교설 말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러스킨은 독서가 교육이라는 절대적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다(첫번째 강연에서 언급된 사실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앞에서 제시된 그의 개인적 회상은 주장의 전개를 위한 의미도 지닌다. 그는 여기서 본인의 회상을 통해 '유년기의 독서 활동은 지식보다는 그것과 얽힌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그의 말을 직접 따온 것이다)들을 남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러스킨과 칼라일의 관계를 통해 그의 주장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환기한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이 강연을 준비할 당시의 러스킨은 칼라일과 교류가 깊었던 듯하다. 게다가 첫번째 강연에서 언급한 공공 도서관의 책임자가 칼라일이기도 했다. 그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강연에서 제시된 영웅적, 귀족적 이상이 칼라일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내 생각은 좀 다르다. 확실히 영웅주의적 인상은 그 이전 저서에 비해 강해졌다는 감상이 든다. 하지만 러스킨의 입장이 다소 당대의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을 함의하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발표한 저작에서도 그러하다.『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역시 당대 중간계급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의 입장인가? 의도상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한 결론을 보여주긴 하나, 그의 사고 자체가 그렇지는 않다. 실은 내가 그를 매튜 아널드와 줄곧 연관을 짓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외에는 데카르트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러스킨의 독서론은 독서를 위대한 저자와의 대화로 요약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유사하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독서와 대화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특히 그는 러스킨이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쓸모없는 부류의 대화에는 매달리면서, 위대한 이들과의 대화인 독서는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데에 초점을 맞춘다.) 독서는 혼자 할 수 있는 활동이지만, 대화는 혼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독서를 할 때는 충실히 자성을 할 기회가 있지만 대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프루스트는 아마도 러스킨이 좀 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자신과 같은 결론을 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독서의 본질은 러스킨의 정의와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독서의 한계는 그 미덕 자체에서 기인한다. 독서의 미덕은 결의나 동기를 주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말에 따르자면 책의 지혜가 끝나는 순간, 우리의 지혜는 시작된다. 책은 그의 결론을 내며 끝이 나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질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에게 독서가 교육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에게 독서는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공부의 시작일 뿐 종착점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프루스트의 견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뒤에서 다시 묘사를 이어나가는 부분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기 위해 쓰였는지 알기가 어렵다. 다만 자신이 읽은 작가들의, 그리고 그에 관한 자신의 일화 등이 실려 있으므로, 역자가 언급한 '개인적 경험'으로서의 독서를 강조하는 한 부분이 아닐까 추정해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