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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분야가 분야라 별로 볼 것 같지는 않긴 한데 감상 올려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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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개념원리>는 분석미학 비평서다. 분석철학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이 한 문장만으로도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대도 최근 소박하게나마 인기를 끌었던 프랑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를 읽어본 적이 있다면 <비개념원리>의 비평의 진행 방식이 꽤나 익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개중 아무 것도 아니라면 이 책은 괴상하게 어렵기만 한 글의 모음집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 그 정도로 <비개념원리>는 꽤나 분석철학에 충실하고자 한 비평집이자, 간혹 구태여 인용할 필요가 없는 지식까지 과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비평집이기도 하다. 저자 본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하나의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서 포착한 비개념적인 것들을 개념화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각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본 다음, <비개념원리>에서 제시하는 비평이 어떻게 다른 음악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 예시를 들어보고자 한다.



<비개념원리>는 크게 세 단위로 묶이는데, 각각 [이름에 관하여], [지각에 관하여], [허구에 관하여]로 제목 그대로 '이름', '지각', '허구'에 초점을 맞춘 비평을 실었다. '이름'에서는 하이퍼팝, 해체 클럽, 노이즈 등의 장르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를 분석하고, '지각'에서는 음악에 담긴 의미, 음악의 속도, 온몸과 촉각으로 느끼는 음악을 분석하며, '허구'에서는 음악이 모종의 허구를 자아내는 '소닉 픽션', 믿는 체하기make-believe로서의 음악, 음악의 진정성이라는 허구적인 개념을 분석한다. 이 모두를 분석하는 방법은 서로 비슷한데, 분석 대상이 되는 단어, 개념, 속성, 그 밖의 온갖 것이 과연 얼마나 엄밀하게 취급될 수 있는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허술한 우산 개념umbrella concept1)에 가까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기존 통념을 타파하는 동시에 이를 보완하거나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 읽기 어려울 듯한 논증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각 비평 앞에 핵심 전개를 요약해주는 만화 몇 페이지를 실어놓았다. (수고가 많이 들어가서 그렇지 결과는 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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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식인데,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으로서의 하이퍼팝]에서 저자는 '하이퍼팝hyperpop'이라는 용어가 과연 이 장르를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hyper가 hyperactive의 hyper가 아니라면2) hyper-(과잉인)는 무언가를 수식하는 용어여야 하는데, 그 무엇이 어떤 것이든 제대로 된 용어라고 하기에는 전부 다 결격 사유가 있다는 것. 이를 위해 과잉인 성분 X가 있어서 이것이 많이 들어 있는 양적인 과잉이거나, 소위 음악성을 말하듯 무언가가 질적으로 더 우수해서 과잉인 거거나, hyper-pop이라는 말 그대로 모종의 '팝스러움'이 과잉으로 들어간 음악이라는 세 가지 경우를 따질 수 있다. 그런데 이 각각이 전부 다 문제가 있으며, 용어를 말 그래도 해석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 하이퍼팝의 '과잉'을 설명하기 위해 정보 이론 관점에서 신호/소음 이분법을 토대로 무언가 소음으로 취급되어 음악에서는 삭제되어 버린 막대한 맥락의 소리를 상상하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과잉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며, 하이퍼팝이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음악을 아우를 수 있는 분류어sortal에 가깝다는 대안 설명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런 식으로 <비개념원리>의 비평은 용어라는 언어에 극도로 집중하며 이것이 실제로 지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 대상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며 이것이 무언가를 지칭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하거나, 잘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방식이다. 비슷하게 '노이즈음악은 음악이 아닌 노이즈를 모아서 음악을 만든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라는 주장을 비판하는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사이비 역설에 관하여]3)에서는 '노이즈는 음악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양화사가 생략된-(모든) 노이즈는 음악이 아니다-모호한 명제거나 '노이즈는 음악이 아니어야 한다' 같은 당위 명제를 사실 명제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비슷하게 [다른 국면으로 듣기: 느려짐 혹은 빨라짐]에서는 나이트코어와 슬로우/리버브라는 빠르게/느리게 재생하는 음악 유행에서 정확히 '무엇'이 빨라지고 느려지는지를 심리철학적인 관점에서 음악의 국면aspect-곧, 우리가 무엇을 다르게 인지하는 순간순간-이 빠르게 지나가거나 느리게 지나가는 것으로 파악하는 등, 꽤나 납득할 만한 논증을 제시한다.



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분석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많은 이가 동의하는 바로, 이 분야가 너무나 엄밀한 언어-세계 대응물에 집착하느라 오히려 실제 논의 대상과는 거리가 있는 정확한 대상을 꽉 붙들어매려고 한다는 문제가 있다. 용어를 구성하는 의미에 집착하는 데에서도 간혹 이를 느끼긴 하지만 그 정도는 학문적 엄밀성을 위한 것이라고 넘어가줄 수 있는 반면, 그렇게 넘어가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진정성은 허구다(positive)]에서 음악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는 말을 비판하는 방식은 프랭크퍼트가 <개소리에 대하여>에서 진위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발화를 '개소리'라고 정의하며 분석 및 비판하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는데, 진정성이 사람의 본심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진정하다고 하는지 장르의 고전적 기준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진정하다고 하는지 용법이 섞여 있다는 말은 실제 범례상 그리 설득력 있지 않다고 느낀데다-두 의미를 한 글에서 섞어 쓰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진정성 담론이 무의미한 공회전을 부른다고 느끼는 핵심인 '진정성을 누가 확인할 수 있고 그게 왜 좋은 건가?' 라는 질문이 옆으로 슬쩍 비껴나간 탓이다.



비슷하게 분석미학적 비평을 위해 불필요한 이론이 들어갔다고 느낄 때도 종종 있었는데, 특히 ['노이즈의']에서 노이즈를 예화exemplify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의 가능성이 심리철학에서 다수 실현 가능성과 비슷하다는 긴 주석은-본 감상문의 주석3에서 이야기한 것과 함께 봤을 때-오히려 핵심에서 벗어난 이론을 제시한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노이즈가 다중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소리 속에서 우리가 음악으로 인식하거나 제작자가 음악으로 의도한 '음악'이 다양한 소리로 실현 가능한 것의 여집합에 가깝다는 점에서 더더욱. [소닉픽션]에서 '픽션'이 science fiction처럼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그 믿음으로서 기능하는 창작물, 혹은-[콘셉트로니카의 부상]에서 비꼬듯 언급하듯-세계관 구축world building의 픽션에 가깝다는 것을 무시하고 픽션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어떤 개념을 지칭하는 것인지를 파고드는 게 생산적인 비평이라기보다는 소닉픽션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론으로 무장한 파괴적인 공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별개로 이런 방식 자체는-주류가 되기는 힘들겠지만-꽤나 흥미로운 음악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락이라는 장르가 현재 어떤 식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분명한데, 포스트락이 "포스트-클럽post-club"처럼 해체 클럽을 위한 과도기적 용어로 쓰이고 버려지지 않은 것은 락 너머의 락이라는 post-rock이 사이먼 레이놀즈의 본디 의도와는 달리 수많은 감상자 및 청취자에게 강한 매력으로 다가온 탓이기도 하겠지만, 락의 범주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과거에는 그저 락의 한 하위장르로서만 보이다가 포스트락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과거의 하위장르에서 풀려나 현재 기준으로 과거를 재편성하는 족보 조작 과정으로 이어진 것을 생각할 때 post-라는 접두사에는 확실히 축자적인 마력이 있다. 일전 나원영의 <우리들의 포스트락을 찾아서>를 읽으며 어느 정도 장르의 특징이 굳어진 고정된 대상으로서의 포스트락을 중심으로 한국 포스트락을 다루던 걸 생각하면, 포스트락 담론은 오히려 포스트락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계보학적으로-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의 장르 확장 과정에 집중하여-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분석에는 당연하지만 '포스트'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가 핵심이 될 테다.



*



1) 우산어umbrella term, 우산 개념umbrella concept 등 우산- 접두사가 붙는 용어를 최근 자주 보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출판물은 나원영의 <대체 현실 유령>인데,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줬다가 대체 우산어가 뭐냐는 질문을 몇 번 받은 적이 있어서 기억한다. 어느 정도 자주 보던 용어였기에 실제로 자주 쓰는 용어다, 하는 식으로 대충 umbrella term을 설명해주고 말았는데, 지금 보니 구글 검색으로도 "우산어", "우산 개념" 등이 그리 잘 잡히는 편은 아니다. 영어에서 umbrella를 그 아래에 많은 걸 포함하는 상위의/포괄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걸 알기는 하지만 아직 조금 어색하기는 하다. 사실 다른 번역어도 영어 용어에 비해서 오히려 어색하게 다가오는 게 많기는 하다. 축자적literal, 표찰화labeling, 우유적accidental 등. 종kind, 범주category, 분류어sortal처럼 오히려 좀 더 익숙한 것도 많아 그냥 익숙해졌느냐 아니냐의 차이 같기는 하다. 



2) 나는 이쪽에 동의하는 편이다. 소위 webcore/internetcore라고 불리는 팝업창 가득한 프루티거 에어로 이미지나 무지개빛 찬양 일색이 놀리듯이 터져나오며 아무렇지도 않게 화면이 휙휙 전환되는 MLG 밈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포용해 도배하는 괴상한 미학, 리듬 게임에 써먹기 위해 유저들이 BPM을 아무렇게나 빠르게 돌려놓은 음원이 오히려 나이트코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다 하이퍼팝이라는 장르의 핵심 중 하나로 자리잡은 현상 등. (Adult Swim 채널에 올라온 애니메이션 Snooze Quest(링크)가 좋은 예시다) 야밤에 어두운 방에서 컴퓨터 화면에만 들어온 불에 집중하며 그 외의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ADHD 같은 증세의 음악.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모티브로 삼은 디지털 하드코어 밴드 Atari Teenage Riot이 내세운 그 게임 중독 이미지의 가벼운 정서불안이 하이퍼팝엔 늘 깃들어 있다. 이제는 꼭 게임으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틱1톡 같은 스마트폰 앱이 충분히 그 정서불안의 맥락을 제공해주는 듯하지만. [POV!]



3) 사실 이 글이야말로 위의 하이퍼팝 글에서 이야기한 정보 이론이 핵심적인 글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이즈가 노이즈인 이유는 "비-음악적 소리"라는, 보편적인 "음악적 소리"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소리여서가 아니라 무엇을 음악적 소리로 만들고자 신호와 소음을 구분하는 각 음악에서의 잣대가 작용하며 음악과 노이즈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일 테니까. 비틀즈와 비치 보이즈가 팝에서 사용하기로 한 각종 소리가 이 기준에서 사실 노이즈에 가깝다는 것도, 노이즈 음악에서 삽입되는 노이즈가 생산되는 방식이 실제로 저마다 다양해 자연스럽게 아날로그 소리에서 걸러내지 못한 잡음을 넣는 것과 프로그램을 통해 생성된 기계적인 소리를 넣는 것이 다르다는 것도, 소리와 음악의 차이를 논하는 글에서 언급하듯 우리에게 음악이라고 인식되는 범위 바깥의 소리가 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도, 전부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