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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을 쓰는 것 자체가 적절한 일인지 회의감이 든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은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자유분방한 매력을 나의 부족한 언어로 가두면 작품을 훼손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그러나 무릇 독서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이니, 나도 내 자유를 발휘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의 불가피한 훼손을 감수하고 몇 마디 글을 적어보려 한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는 서두에서 말했듯이 자유가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도 결국에는 자유에 관한 것이고, 무엇보다 소설에 쓰인 기교가 정말로 자유분방하기 때문이다. 디드로는 독자를 마치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학생처럼 다룬다. 자크의 사랑 이야기를 계속 중간에 끊어서 맥거핀이 되기 직전까지 만든다. 심지어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고 약을 올리기도 한다! 구성 자체도 자유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을 내세워 여러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가 다양한 생각을 품게 만든다. 18세기에 이런 실험적인 소설이 나왔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그보다 먼저 나온 「트리스트럼 섄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들었다. 나는 아직 그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다. 로렌스 스턴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제목부터 자크가 운명론자라는 설정이 드러나서, 나는 처음에 이 소설을 '시대착오적인 운명론을 믿는 자크가 망가지는 풍자 소설'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자크는 분명 운명론자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저기 높은 곳의 두루마리'에 쓰여있고 사람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두루마리에 쓰인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다. 다만 자크는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해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소극적인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명이 선고되기 직전까지 어떤 수든 써서 최선의 결과가 일어날 발판을 만들려 한다. 즉 과정을 밟을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 자체에는 연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전 상속 재산의 전도로 우리에게 부여된 삶을 최선을 다해 즐기려고 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목은 '자크와 그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소설은 자크가 주인인 것처럼 흘러간다. 주인 자체가 엄청 명석한 사람이 아니라 자크에게 여러모로 밀리는 감이 있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행동력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자크는 결과가 선고되기를 넋 놓고 기다리지 않고 자기 의지가 있으면 그것을 실현하려고 늘 애쓴다. 세상은 아무튼 행동하는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게 돼있다. 그래봤자 자크는 '그의 주인의 하인'이라는 운명 자체를 극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누리려는 것이 자크의 목표다. 사실 권력이라는 것이 운명으로 정해지는 것이기는 해도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 권력 위에는 권력이 있고, 누군가는 항상 누군가의 개이기 마련인 것을. 자크는 주종 관계 자체보다 그 상황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내려 애쓰니, 자크야말로 삶다운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자크를 고평가할 수밖에 수 없는 이유다. 


이렇게 디드로는 자크를 앞세워 자유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디드로의 모든 견해에 동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나는 포므레 부인의 복수극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포므레 부인의 행적은 그녀의 원한을 감안해도 용서하기 어렵다. 아르시 후작에게 품은 복수심은 십분 이해하고, 그 시절 프랑스인처럼 여자가 감히 그런 음모를 꾸며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포므레 부인은 복수를 위해 데농 모녀를 도구처럼 썼다. 데농 양은 어찌어찌 그나마 괜찮은 결말을 받은 것 같지만 데농 부인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디드로는 스스로 복수를 해내는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의지력의 발로를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나아가 때로는 복수가 선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도덕 규범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상대적인 것일 수 있다고 제시한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역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엑스트라가 된다. 주제를 전하기 위해서 개발되거나 인용된, 아무래도 좋을 존재로 쭉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자유를 목표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향유해야 진정한 자유가 온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포므레 부인의 일화에서 드러나는 디드로의 생각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한편 자유와 더불어 자크와 그의 주인의 여정에 동행하는 무언가가 있다. (외과 의사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우정이다. 열심히 투닥거리기는 해도 둘은 결국 붙어 다닌다. 디드로가 선고한 '자크와 그의 주인'이라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서, 좋든 밉든 한 번 맺어진 운명을 최대한 끈끈하게 즐기려 하는 것 같다. 둘의 모습은 상하관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둘은 함께 할 동료가 필요할 뿐이다. 자크의 압도적인 자유분방함에 주인의 계급이 묻히듯이, 모두가 각자의 의지를 충실하게 발한다면 계급이란 초기 조건의 하나일 뿐 실질적으로 아무런 위압도 주지 않는다. 친구처럼 지내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친구가 된다. 결국 둘 다 해피 엔딩을 맞은 것도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친구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꽤 두꺼운 책이고(약 420쪽), 문체 자체는 평이하나 구성이 워낙 자유분방해서 읽기는 어려운 편이다. 비논리적인 부분도 더러 있다. (단 주석에서 매번 짚어줘서, 오히려 눈치를 전혀 못 챘다가 주석을 보고 깨달은 적이 더 많다.) 그럼에도 사흘 동안 정말 재밌게 읽었다. 자유란 신기하다. 내가 당장 자유를 체감하지 못해도 누군가가 (심지어 가상 인물일지라도) 자유를 실현하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행복해지게 된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은 그런 면에서 내게 훌륭한 강장제였다. 이번 달에 기회가 닿는다면 디드로의 다른 소설인 「라모의 조카」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