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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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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마음의 양식이다"라는 소리와

"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라는 아주 상이하게 다른 소리라 생각한다.


얼핏 보면 후자가 전자에 대해 더 확고부동하게,  입장을 분명히 명시하고자 하는 결연함으로 내비쳐질 수 있으나, 그것은 그 내용이 뒤따를 때.


사실 학창 시절 엄마가 읽으라 사줬던 책이고

보다가 뭔 잡스러워서 던졌지만

다시금 목차를 보면 그저 소수 민족의 USA Life 성장기다. 공부와 삶 본연의 가치에 대해 논하는 것은 눈 씻고 찾기 어렵다.



아니 차라투스트라(니체)는 저가 깨달았고, 자신의 글을 뒤따를 일부의 이들을 위해 설파하기 위한 예언서적 느낌의 글이라면.

저 때늦은 골품제를 주장하는 유전학적 한국인은 자신과 실증적 한국인 사이에 뭔 공통점이 있다고 자기가 먼저 간 사람임을 자처하는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극해야 한다는 범 인종적 당위를 부여하지만, 이형진은 내가 공부를 통해 성장했고 너희도 나와 같은 인종적 한국인이라는 것뿐이다. 차라리 예상 독자가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의 예에서처럼 꿈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 전체라면 모르겠다. 그것은 폄하될 수 없는 그녀 만의 고유한 가치니까.

그러나 이형진은 그럴 자신이 없었는지, 자신이 속해있던 사회로 내려왔고 그렇게 "줄타기 광대"로 전락한 것이다.



깨달은 자는,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

타협을 하더라도 그건 최소한의 것으로 남기고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 하나 공부가 인생의 예의라던 이형진은 비굴해졌고 결국 "줄타기 광대"로 전락했다.

이제 그의 공부론이 아무리 큰 실존적 가치를 지닌다 해도 그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것이다.

그가 큰 포부를 버리고 내려온 순간 이와 같은 비판은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 된 것이다.



덧붙여 내려오는 자는 최소한 무게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것처럼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지라도 그것이 그만한 가치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공부는 인생의 예의라는 그의 말.

그렇다면 공부를 하지 않음은 불손이요 불의라는 것인가? 공부를 하지 못할 환경에서 태어난 아프리카 아이들 같은 경우는 예를 다하지 못하는 나태함의 산물이란 것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염시킨 기독교의 오만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오만함이 현대 미국의 자화상이다.

그렇다. 그래서 그의 글이 그저 소수 인종의 미국 엘리트 사회 내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글이 올바르게 갔으려면 적어도 그 글의 예상 독자가 한국인이 아닌 문맹국의 질병과 기아,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있었어야 한다.



"공부는 마음의 양식이다"가 유유부단해 보이지만 따듯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양식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헐벗은 이에게 주는 빵과 포도주와 같은것이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가 결연해 보이지만 나약하고 기만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강자는 거기에 예의라는 나약한 표현을 가져다 붙이지 않는다.



그러니

온전한 줄타기 광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형제애의 순례자도 아닌 이 쓰레기 같은 글이 갈 곳은 한 군데인 것이다.